꼬방동네 미장이 허병섭 목사
  • 박상기 문화부차장,김 당 기자 ()
  • 승인 1990.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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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직 버리고 날품 팔며 ‘건축노가다’ 공동체 운영

 “동덕여대 앞에서 내려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꼭대기까지 와서 사무실을 물어보세요.”

 미장이가 된 허병섭 목사와 그 패거리들이 문을 연 ‘일꾼 두레’ 사무실(전화번호 911-8677)로 연락을 하자 그쪽에서 가르쳐준 길안내였다. 다음날 안내대로 기울기가 60도쯤 돼보이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 두레 사무실을 찾았다. 두평쯤 됨직한 방 두 개를 이은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업무국장이란 직함을 가진 강충원(41)씨뿐이었다. 다른 패거리들은 모두 현장에 일하러 나갔고 두레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자신만 사무실을 지키면서 현장이나 외부에서 오는 전화를 받는다는 거였다. 허씨는 안양에 현장답사차 내려가고 없었다.

 

76년 빈민선교운동에 투신

 ‘일꾼 두레’의 우두머리인 허씨가 두레장으로서 맡는 몫은 ‘일거리를 물어오는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그가 바쁜 까닭은 거기에 있었다. 게다가 허목사는 섭외일이 없을 때면 두레 회원들이 일하는 공사현장에 들러 공사가 진행되는 품을 살핀다. 또 두레 회원으로서, 미장이로서 한달이면 열흘꼴로 벽 천장 바닥 등에 모르타르를 바르는 미장일을 한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목사로서 자신이 개척해 세운 교회에 이제는 평신도로서 나간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서 허병섭 목사는 목사가 아니다. 전직이 목사일 뿐이고 지금은 2년째 막일을 해온 미장이 허씨이다.

 허병섭(50)씨가 이곳 성북구 하월곡동과 처음 인연을 맺은 때는 지난 76년. 한국신학대학 (기독교 교육학과)을 졸업하고 군목으로 입대하기 전에 1년쯤 안양에서 목회일을 한 것을 빼고는 지난해까지 줄곧 13년을 이곳에서만 빈민선교를 해왔다. 그 당시 기독교에서는 박형규 목사가 중심이 된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이하 특수선교위)가 조직되어 처음으로 목회자들이 ‘빈민 속으로’ 들어가던 때였다. 허씨를 비롯 당시에 특수선교위 출신으로 활동한 ‘동지’ 목사들을 보면 박형규 권호경 김동완 이해학 조승혁 모갑경 등으로 모두가 지금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활동가들이다. 74년6월 제대한 뒤 허씨가, 그때만해도 교회없이 처음 빈민지역 선교활동지로 택한 곳은 ‘신설동 우범지역’. 당시는 그렇게 불렀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이철용씨(평민당)를 그곳에서 처음으로 만났다(38페이지 상자기사 참조.)

 허씨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이철용씨는 젊은 나이에 평화시장에서 메리야스 도매상을 하면서 은성학원이라는 구두닦이 야학을 ‘운영’하던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청년이었다. 본디 지식인, 특히 “이빨만 까는 지식인”에게 깊은 반감을 가졌던 이씨는 허씨를 만나면서 “이런 지식인도 있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이씨는 나중에 허씨의 추천으로 특수선교위 훈련실무자로 발탁되기도 했는데 이때에도 이씨는 타고난 조직력과 언변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허씨는 “세간에서는 제가 이철용씨를 국회로 보냈다는둥 이철용의 대부라는둥 말하지만 그건 다 뭔가 특정해 규정을 지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라들이 잘 모르고 하는 허튼소리”라면서 “본디 뛰어난 사람인데 사회가 만든 우범지역에 갇혀 있던 그 뛰어남이 나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밖으로 드러난것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무튼 이씨는 그 무렵 중랑천변 뚝방마을에서 ‘사랑방교회’같은 조직활동을 펼치면서 당시 철거민들에게 ‘땅 1평 사주기 운동’을 전개하는 등 빈민운동을 펴왔는데 이런 이야기들은 그의 소설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 사람들≫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또 망우동으로 옮겨간 천막교회를 다시 철거반원들이 철거하는 과정에서 ‘교회 십자가를 똥통에 처박은 사건’은 이 땅의 교회와 목회자, 신학자들이 ‘더러운 곳’에 더 관심을 가지는 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이철용씨를 비롯한 특수선교위 실무자들은 이런 철거현장으로 목회자들을 안내해 현장을 보게 했는데 이를 지켜본 문동환목사 등이 처박힌 십자가를 건져내 들고서 행진하기도 했다. 허씨는 그런 모습들을 지금 생각하면 지식인이 민중을 의식화시킨다기보다는 민중이 지식인을 의식화시키고 회개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허씨가 빈민선교 활동을 하면서 딴 별은 20개나 된다. 전과기록이 스무번쯤 된다는 말이다. 그중 하나를 보면, 보안사 사찰기록 개인 카드에는 “76년 7월3일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 사건 주동” 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허씨는 이것이 본디 조작한 사건일뿐더러 주동도 아니었다고 밝힌다. 당시 정부는 눈엣가시인 특수선교위에 간첩 사주를 받은 지하단체 활동 혐의를 뒤집어씌우려고 박형규 조승혁 김동완 이해학 권호경 모갑경 등 관련 목사들을 50여일간이나 시경 대공분실에 가두고 비공개 수사를 했다. 또 함께 ‘엮을’ 실무자들과 교인들을 각 경찰서에서 따로 수사했는데 당시 서대문서에서 조사받던 이철용씨가 기지를 발휘, 탈출에 성공하여 언론과 세계교회등에 간첩조작 음모를 폭로함으로써 경찰당국을 당황케 했다. 여론이 불리해지자 정부는 불기소로 풀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씨와 이씨는 그해 하월곡동에 들어가 동월교회를 함께 세웠다.

 

“사회변혁운동 이탈한 배신자” 비난도

 허씨는 최근에도 자신이 여전히 법법자임을 확인시켜 주는 문건을 받았는데 그것은 저작권법 위반혐의 상고심이 남아 있음을 알려주는 우편물이었다. 자신이 세운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시절에 노동현장에서 부르는 개사곡을 수집해(이른바 노가다 아닌 노가바 즉 ‘노래 가사 바꿔부르기’를 말함) 악보 가사를 실은 책자를 만들었는데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음반 관련 협회를 부추겨 허씨를 고발케 한 것. 허씨는 “이미 10년이 넘은 일이고 고법에서도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검찰이 상고한 모양” 이라고 남의 일처럼 말했다. 보안사 기록에 다르면 그 이전에도 “75년 12월 판자촌 철거 항의코저 ‘사랑방교회의 노래’ 작사·작곡” 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동월교회는 판소리 설교, 농악 굿예배 실험, 한국찬송 40여곡 작곡 등으로 유명하다. 그밖에도, 한번 더 보안사 기록을 빌리자면, 전국목회자 정의평화실천협의회(정목협) 부회장이던 허씨는 지난 “86년 11월18일 관훈동 민정당 중앙당사 앞에서 ‘영구집권 획책하는 군부독재 물러가라’는 제하의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NCC 가입 교단 교역자 51명을 선동, 시위주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허씨는 지금 그때 그 자리에서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하는 대신에 흙손을 손에 쥐고 벽을 바르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허씨를 “혼자서만 슬쩍 사회변혁운동의 대열을 이탈한 ‘배신자’”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쉽게 말해 어느 하세월에 그런 공동체운동으로 이 땅의 민족 민주 통일을 앞당길수 있겠냐는 다그침이겠다. 또 민중교회하는 후배들 중에는 “하월곡동 산등성이에 교회가 선 이래 ‘비탈교회’가 1백여개나 섰는데 ‘민중시학을 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 목사직을 반납하면 기존의 보수교단에서는 민중교회를 어찌 보겠느냐”면서 사직원을 반려하라는 ‘다그침’을 아끼지 않았다.

 허씨가 한국기독교 장로회 서울노회에 동월교회 목사직 사직서를 낸 것은 88년 8월. 백번의 설교보다 ‘저들’과 함께 현장에서 일하면서 행동과 실천으로 선교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들’을 위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직서를 내면서 곧장 교회집사인 윤창호 목수와 기와장이 이한용씨를 좇아다니며 공사판 잡부일을 배웠다. 좀더 ‘저들’과 가까이 가려고 공사판 막일꾼답게 담배도 배웠다. 그러나 89년 8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미장기술을 배웠고 마침내 노회에서도 89년 10월 사직원을 받아들임으로써 허병섭 목사는 ‘정식으로’ 미장이 허씨가 되었다. 물론 아직도 두레에서는 ‘전직을 예우해서’ 곧잘 허목사님이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나이를 쳐서’형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허씨의 ‘앎과 함’이나 사람됨을 두고 하는 평가는 다양하다. ‘이철용을 국회로 보낸 도시빈민의 대부’ ‘살아 있는 예수’ ‘길 잃은 목자’ ‘변혁운동 대열을 이탈한 배신자’등 그에게 매겨진 세속적인 찬사에서부터 비난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현재의 허씨는 어눌한 아마츄어 건축업자, 중간쯤 가는 기술을 가진 미장이, 동월교회 집사일 뿐이다. 지난 10월23일 시내 한 다방에서 허씨가 건축주(의뢰인)를 만나 나눈 대화를 보면 일거리 따는 ‘솜씨’나 공동체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이날은 5천만원짜리 큰공사를 맡길 건축주를 만나기로 했는데 건축주는 다름아닌 허씨의 신학대학 후배인 임성헌목사(고양군 일산읍 백석교회)였다. 올해 물난리로 무너진 교회건물을 고치고 늘려짓는 일을 꼼꼼학 짱짱하게 할 업자를 찾던 중 허씨가 집도 짓는다는 말을 들은 터라 그 일을 맡길 요량으로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악덕업자만 살찌우는 공사판 관행

 “현재는 수리보수만 맡고 있지만 내년부터는 신축공사도 맡는다. 업자(집장수)들보다 30%쯤 싸게 지어줄 수 있을 것이다. 건평은 얼마나 되냐?”

 “대지가 93평이니 건평을 60%쯤 잡고 54평은 되지 않겠어요. 교회(교단)가 모금하고 신도들이 헌금한 돈 5천만원 드릴테니 형님이 잘좀 지어주시오. 남으면 알아서 좋은 일에 쓰시고 부족해도 알아서 채워주시고‥·.”

 이 대목에서 두 전·현직 목사 사이의 ‘구두 거래’에 기자는 “다른 건축업자들에게도 견적을 빼보고 맡기는 것이냐”고 끼어들었다.

 그러자 임목사는 “다 아니까 믿고 맡기는 것 아니냐. 더구나 목사님이 하시는 일인데‥·라고 데면데면하게 말할 뿐이었다.

 아무튼 공사는 91년 3월부터 시작하기로 임목사가 허씨에게 다짐을 받고 그날의 섭외는 아퀴가 지어졌다. 대충 이런 식으로, 세속의 눈으로 보자면 ‘위태로울 만큼 허술하게 입으로 가계약을 끝낸 두사람은 관철동 골목에서 갈비탕을 한그릇씩 먹고 헤어졌다.

 허씨를 따라간 관훈동 구 민정당사 맞은편 2층 건물에서는 내부수리가 한창 이었다. 아래층은 일식집, 위층은 까페로 쓰던 것을 화랑으로 쓰려고 고쳐짓는 일인데 두레패 1명쯤이 일하고 있었다. 올해 두레에서 맡은 일감으로는 가장 큰 천만원짜리 공사였다. 이 공사는 민예총 건축분과위를 맡고 있는 조건영씨(기사건축 대표)의 소지로 계약서 없이 지난 8월 27일부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 공사비 3천5백만원쯤 썼다고 한다. 지난 10월8일에 시작하여 10일만에 낸 수유동 문호근씨 집 수리공의 경우, 당초 예상비용은 5백25만원이었는데 실제비용은 3백82만원이었다. 차액은 이른바 노가다 관행으로는 으레 남긴 업자의 몫이나 영수증 첨부하여 집 주인에게 반납했다. 두레 일꾼들은 여느 건축일꾼들처럼 가진 것은 비록 몸둥아리와 연장뿐이나 정직과 성실을 담보로 노동을 파는 셈이다.

 이들이 돋보이는 것은 바로 오랜 관행처럼 일반화된 건축 불공정거래 탓이다. 불공정거래는 부실공사를 낳기 마련이다. 허씨는 2년전부터 건축공사장에서 막일을 해오면서 이런 잘못된 관행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아차렸다. 집 한채를 짓더라도 건축주, 업자, 4대마 오야지, 하급 오야지, 기공과 조공 순으로 이어지는 피라미드식 하도굽거래가 남아 있는 한 정작 일은 안하는 ‘악덕업자’만 살찌고 건축노동자는 늘 말 그대로 노가다팔자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른바 4대마는 목수, 미장이, 조적(기와 벽돌)공, 철근·콘크리트공 등 집을 짓는 데 없어서는 안될 네가지 기술을 말하고 오야지는 건축노동자들을 부리는 책임자를 말한다.

 허씨의 셈에 다르면 보통 건축주와 업자간에 계약한 총공사비 중 10~15%는 업자가 공사를 따낸 ‘프리미엄’으로 먹고, 4대마 오야지들이 다시 10~15%를 챙기니 총공사비의 20~30%쯤이 자재비나 인건비와는 전혀 무관하게 공사비로 책정된다는 것이다. 결국 오야지나 업자를 거치지 않고 건축노동자들이 직접 공사를 따내면 20~30%쯤 되는 비용을 인건비 몫으로 돌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두레 만들어 일당이 1만원 이상 올라

 14년째 하월곡동에서 살아온 허씨로서는 주민 중 절반 이상이 일용노동자(일고)인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일꾼 두레라는 건축공동체가 생긴 배경이다. 건축노동자 노임은 현재 기공(기술자)은 하루에 4만~5만원, 뒷일을 하는 조공은 하루에 3만원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다. 4만원씩 꼬박 30일로 셈하면 한달에 1백20만원. 적은 벅이가 아니다. 일년 12달로 셈하면 1천4백만원이 넘는 연봉이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일년 3백65일을 노가다로 채울 수는 없다. 노가다의 일년 노동일수는 그걸 반으로 접어야 한다. 공사가 원천봉쇄되는 겨울철 빼고 공치기 마련인 비오는 날 빼면 반년이 고작이다. 그러니 앞서의 셈도 월60만원이 옳다. 퇴직금도 국민연금도 떼지 않는 돈이니 노후대책이 있을리 없다.

 그러나 이들을 정작 가난하게 만드느 것은 천대와 불신풍조 그리고 그로 인한 소외감 등이다. 한마디로 낙이 없다. 그래서 허씨와 그를 따르는 일꾼들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몫을 늘리고, 하루벌이로 살아가는 건축노동자들의 불안한 삶을 안정되게 하고, 인격적인 비인간화를 극복하려는 한 방편으로 두레를 만들었다.” 실제로 이들은 두레를 만들어 공사를 한 결과, 당초 예상했던 대로 일당이 1만원 이상씩 오랐다. 두레의 기술자는 5만~6만원, 조공은 4만원씩이다.

 무엇보다도 업주나 오야지가 없이 일하는 데서 오는 주인의식은 이들조차 예상치 못했던 큰 소득이다. 현장에서 모두가 오야지인 셈이다. “솔직히 말해서 전에는 노가다가 하루 시간만 때우면 된다는 자세로 일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내일처럼 느껴져 일하니 더 열심히 하게 된다”는 것이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다. 으레 공사판 노동은 해 뜰 때 시작하여 해질 때 끝내는 10시간 노동이 보통이다. 그러나 “일꾼 두레에서는 두달 전부터 하루 8시간 노동원칙을 지키고 있지만 노동의 질과 강도는 차이가 없다”는 게 업무국장 강씨의 말이다. 공사국장 윤창호씨는 한술 더떠 그 까닭을 “노동의 강도는 더 세지만 일은 안하면서 거드름만 피우는 오야지들이 현장에 지키고 있는 데서 오는 정신적 구속이 없으니 오히려 덜 피곤하다”고 설명했다.

 건축주에게도 이익이 돌아감은 물론이다. 관훈동 화랑건물주인 우찬규씨는 “공사를 잘 맡겼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건축주의 입장에서는 우선 아무리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내집에 들어가다는 믿음을 갖게 되니 ‘대만족’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집 2층에 방 두 개를 새로 들인 최재현 교수는 “이들과 함께 일하면서 육체노동의 보람을 실감했다”면서 “자재를 빼돌리고 부실공사가 판을 치는 공사풍토에서 서로 ‘믿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를 새삼 확인했다”고 말했다.

 문을 연 지 한달쯤 되는 일꾼 두레 사무실에는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제목의 벽보가 붙어 있다. 두레에서는 현장에 나갔던 일꾼들이 돌아오는 대로 사무실에 들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두레 헌장’ 옆에서 이들은 그날그날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서로 이야기하거나 각자 자신에게 배당된 내일 일을 확인하며 술잔을 돌리면서 ‘자체 평가’를 하기도 한다.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일을 하면서도 뿔뿔이 흩어져서 일하다가 가족적 분위기 속에서 함께 일하니 일이 즐거워서 좋다.” 공사국장 윤창호 목수의 말이다.

 “오야지가 없는 데서 일하니 나도 모르게 노가다 근성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허씨의 매제이자 두레패 출퇴근 봉고차 기사이자 현장 조공인 김영곤(33)씨의 솔직한 심경토로이다. 김씨는 나이 열일곱에 고향 안동을 뛰쳐나와 기름밥 먹으면서 체질화된 ‘개 같은 성깔’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을 느낀다면서 이제 두달째라 아직 옛날 성질이 남아 있으나 내가 생각해도 이렇게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 같이 사는 거구나 깨닫게 된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노가다가 땀흘리고 일하면 3대가 노가다판을 못벗어난다는 말이 있다. 얼마나 자조적인 말인가. 다들 잘 살려고 땀흘려 일하는데 땀흘릴수록 노가다판을 못벗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역설인가. 이는 일거리나 술값 담배값을 미끼로 오야지들이 노예근성을 심은 탓이다.” 근처에서 만화가게를 하다가 허씨의 일에 동참했다는 강충원씨의 말이다.

 “정신적 구속이 없으니 더 열심히 일해도 덜 피곤하다.” 87년 대통령선거 때 이 지역 공정선거감시단원으로 온 고려대생들을 ‘로마병정’들이 막았을 때, 또 동월교회가 불법 건축물이라고 망치부대가 몰려왔을 때 늘 앞장을 섰던 유도 2단인 한별이 아빠 강설원(31)씨의 말이다. 그밖에도 일급 방수기술자인 설영기(41)씨, 노래를 썩 잘하는 고범석(25)씨, 늘 웃는 낯인 김성배(32)씨, 일급 철근공그리 기술자인 정금조(38)씨, 기와장이 이한용(31)씨 등이 비슷한 요지의 말을 했다.

 그중 나중에 들은 바로는, 좀처럼 속내를 잘 비치지 않던 한 청년은 국민학교도 제대로 못마치고 어릴 때부터 거렁뱅이 넝마주이 양아치를 전전하다가 “허목사를 만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어엿한 건축기술자로서 아기 아버지이기도 한 그 청년이 교회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와 결합하는 데도 허씨가 다리를 놓았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탁아소 교사로 일했던 아내와의 이른바 세속적인 기준의 ‘수준차’를 극복한 것은 이씨가 정직하고 성실했기 때문이라고 허씨는 밝혔다.

 관훈동 공사현장 감리를 맡고 있는 김영곤씨(기산건축 건축사보)는 “처음 맡기는 일이고 개인적으로 관심이 커 유심히 지켜봤는데 우선 믿고 맡길 수 있어 만점이고 기술적으로도 흠집을 찾기가 힘들다”고 밝혔다. 김씨의 말인즉 현장감리를 해보면 못 하나 박는 망치질 소리만 들어도 일하는 품에 성의가 있는지 없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는데 다들 내일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공동체의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본디 공사판이라는 곳이 오야지가 인부들을 여기저기서 끌어모으다보면 공기를 제대에 맞출 수 없는 불안정 요소가 늘 널려 있는데 이곳은 이웃사촌의 공동체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일하니 그런 걱정이 없어 좋다는 것이다.

 일꾼 두레의 두레장 허씨와 두레패는 올해는 비록 수리·증축공사 5건밖에 못맡았지만 기대와 의욕을 가지고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있다. 현재 두레에서는 품삯의 0.5%를 회비로 거두어 이를 사무실 운영비와 기금에 보태고 있다. 내년이면 신축공사를 포함 공사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이들에게 올겨울은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우선 회원규모도 현재의 40명선에서 1백명선으로 늘릴 계획이다. 현재 예약된 설계도면상 건축평수는 7백평쯤이나 목표인 2천평을 달성하면 1백명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 되면 한달에 1백만원 올리기는 가뿐하다는 기대이다. 앞으로 자리가 잡히면 두레에서는 월급제를 시행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들이 기대를 갖는 데에는 그만한 근거가있다. “3대가 노가다판을 못벗어난다”던 강충원씨는 이제 “공동체에서 조금씩이나마 노가다판에서는 꿀 수 없는 꿈을 가지는 자세로 바뀌고 있다”는 말을 했다. 윤목수는 “전에는 그런생각 꿈에도 해본 적이 없는데 이제는 고등학생인 막내가 본인이 원한다면 목수일을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의 바람대로 이 땅에 더 많은 공동체가 생긴다면 윤씨의 말대로 “대학을 안가도 사람대접 받으면서 살 만한 세상”이 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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