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락치 양심선언'진실을 추적한다
  • 김당 기자 ()
  • 승인 1994.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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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사실 무근"주장 공식 입장은 안 밝혀

 ' 남매 간첩 사건'에 관련된 안기부 프락치 백흥용씨의 양심 선언에는 무척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이 사건에는 영화.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른바 간첩과 프락치(끄나풀) 그리고 국가안전기획부 직원이 등장한다. 또 사건을 추적하는 젊은 인권 변호사들도 등장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흥미로움은 이같은 등장 인물 때문만은 아니다. 이 사건의 극적 요소 가운데 하나는 백흥용이라는 본명보다는 배인오(28.전 남누리영상 대표)라는 가명으로 더 알려진 자칭 안기부 프락치의 양심 선언이다. 과거에 경찰이나 보안사 같은 수사.정보 기관의 망원이나 끄나풀이 양심 선언을 한 적은 있지만 국가 최고 정보기관인 안기부의 끄나풀이 양심 선언을 하기는 이 사건이 처음이다. 더구나 이 프락치는 주도면밀하게도 자기가 프락치 활동을 했음을 증명할 안기부 직원들의 얼굴과 대화 내용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 2개를 물증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안기부는 백흥용씨의 양심 선언을 조작극이라고 부인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쟁점은 백씨의 양심 선언이 사실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이다.

정보원 관리에 실패한 안기부
 이 사건의 또 다른 본질은 백씨가 양심 선언을 하게 된 직접 동기가 된 이른바 국가 정보기관(안기부)의 '역공작'여부이다. 쉽게 말해 간첩을 잡기 위한 본연의 업무 수행이 공작이라면, 역공작은 간첩을 '만들기'위한 업무 수행인 셈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안기부가 끄나풀을 내세워 간첩 혐의자 또는 평범한 시민이 간첩 행위를 하도록 유인 또는 조작했느냐는 것이다(29쪽 상자 기사 참조). 결국 이 사건의 핵심은 백흥용이라는 자칭 안기부 프락치가 △재야 운동권에서 문화운동(〈이름 없는 영웅들〉이라는 16㎜ 노동운동 영화를 만든 바 있음)을 하다가 △안기부에 프락치로 포섭되어 △2년 남짓 주로 국내 운동권 조직(또는 개인)과 해외(주로 일본) 친북한 조직(또는 개인)에 침투해 양자를 서로 연계하는 공작 임무를 수행해 오다 △지난해 9월 안기부 일부 조직과 함께 김삼석.김은주 남매를 간첩으로 만드는 데 가담했으며 △이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지난 10월31일 베를린에서 양심 선언을 하게 되었다고 밝힌 고백의 진위(또는 경위)를 밝히는 데 있는 셈이다. 우선 이 사건 규명에 강한 의욕을 가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대표 고영구 변호사)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위원장 김상근 목사)와 함께 11월9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안기부 간첩 공작수사 진상발표 기자회견'을 갖고, 베를린에서 백씨를 만나 사실 확인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이기욱.이덕우 변호사의 조사 결과 백씨의 양심 선언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민변은 기자회견장에서 물적 증거로 △백씨가 안기부 직원들 몰래 찍은 안기부 직원들의 얼굴과 대화 내용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2개 △베를린의 한 호텔에서 두 변호사가 백씨를 만나 조사하는 내용을 담은 또 다른 비디오테이프 △그리고 백씨가 직접 서명 날인한 진술서 2통을 공개했다. 한편 안기부는 예상과 달리 이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민변과 언론사 등에 백씨의 양심 선언 내용이 사실무근한 조작이라는 안기부 견해를 비공식적으로 전달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안기부의 견해는 포괄적인 부정일 뿐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 이를테면 백씨가 자기에게 프락치 공작을 지시한 안기부 직원이라고 지목한, 비디오에 찍힌 두남자가 안기부 직원인지 아닌지 등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안기부의 한 관계자는 대신 이를 쟁점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회 정보위에서 사안 별로 안기부 입장을 밝힐 예정이라고 전했다. 민변측이 제시한 백흥용씨의 진술서 및 비디오테이프와 안기부측의 비공식적 견해를 토대로 이 프락치 양심 선언 사건에서 규명되어야 할 요소를 역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양심선언에도 석연찮은 대목 있어
 우선 백흥용씨의 양심 선언에서 석연찮은 대목은, 백씨의 가족 관계와 안기부에 포섭된 경위이다. 백씨는 자기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 제작한 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을 상영하는 문제로 92년 6월 미국을 방문했다가 귀국한 직후 안기부 직원들에게 부산 해운대 등지 안가로 연행돼 미주지역 범청학련과의 관계 등을 추궁받다가 뚜렷한 혐의점이 없자 '같이 일하지 않겠느냐'는 회유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회유가 먹혀들지 않자 안기부원들이 노동운동을 하다가 수배된 큰형 (백우용.38)이 도피해 살고 있는 집에서 나오는 장면 등을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며 "언제라도 (네 형을)잡아들일 수 있으나 우리한테 협력하면 불문에 부치겠다"고 협박하여 고민하다 결국 굴복했다는 것이 백씨가 밝힌 포섭 동기이다. 그러나 큰형 백우용씨가 과연 노조 활동으로 수배중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 3형제 중 막내인 백씨의 확인된 유일한 혈육인 작은형(백성용.34)에 따르면, 백우용씨는 몇 년 전 집을 나간 뒤 현재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백씨의 형수에 따르면, 백흥용씨 또한 작은형 결혼식에 참석한 이후 1년 가까이 연락을 안하고 지내리만큼 형제들 사이에 소식이 두절된 상태이다. 또 백씨의 몇 안되는 친구들은 한결같이 백씨로부터 형 얘기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밖에도 그 정도의 장기(6년) 수배자라면 노동 운동권에서 모를 수가 없는데, 백우용이라는 인물은 없다는 점에서 백씨의 진술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백씨와 함께 영화운동을 했던 전승희씨(28)는 백씨로부터 큰형이 노동운동을 했다는 얘기를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고, 백씨가 만든 노동운동 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에는 그런 부분들과 백씨 자신의 자전적 삶이 묘사돼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백씨 진술의 부분적 의혹에도 불구하고 백씨가 독학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객관적 사실이
바로 안기부가 포섭하기에 딱 좋은 표적이 되었다는 지적은 설득력을 지닌다. 가족과 대학 동기 등 보호막이 없다는 점은 정보.수사기관들이 프락치를 심는 데 가장 기초적인 공작 여건이다. 이에 반해 안기부측 주장은 백씨가 안기부에 포섭된 것이 아니라 제발로 걸어들어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백씨가 말한 것처럼 2년 전이 아닌 4년 전(90년 1월) 대공상담소로 전화를 해 자기가 진 빚을 갚아주면 정보원으로 일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 뒤 93년 2년께 김삼석.김은주 남매의 간첩 혐의를 제보한 것도 백씨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백씨의 제보를 토대로 제3의 수사팀을 붙여서 김씨 남매를 검거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같은 설명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어떤 형태로건, 즉 프락치건 제보자건 백씨가 안기부와 4년 전 또는 2년 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셈이다. 그것은 백씨가 밝힌 "안기부에서 2년 가까이 있으며 보고 느낀 점들"이 실제 경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알기 힘든 것들이라는 점으로도 뒷받침된다. 이를테면 △공작 지시를 받거나 회사(남산 안기부)에 들어갈 때마다 안기부 김과장을 만난 남산 밑의 ㅋ다방 △해외(일본) 공작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안기부 직원들과 함께 이틀씩 합숙하며 보고서를 작성한 마포의 오피스텔 △안기부 직원들과 함께 타고 다닌 공작업무용 승용차 △신분이 노출될 위험에 처한 뒤 안기부 직원의 도움으로 피신한 파주의 한 낚시터 등은 모두 상상력으로만 꾸며내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우선 ㅋ다방의 경우 인근 ㅇ호텔과 함께 통상 남산 안기부 직원들과 볼 일이 있는 일반인들이 출입하는 장소이다. 다른 정부 부처와의 통상적인 연락 업무조차도 몇평 안되는 을씨년스런 면회실에서 이뤄질 정도로 접근하기 어려운 안기부의 특수성에 비추어 이곳은 일종의 비공식 면회실인 셈이다(심지어 일부에서는 이곳이 안기부가 운영하는 다방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안기부 과장 등을 만나 공작 지시를 받거나 일본을 다녀올 때마다 사장(국장급)에게 인사하러 본사(안기부)에 들어갔다는 것이 백씨의 주장이다. 그러나 안기부 관계자는 외부인은 본사에 들어올 수도 없거니와 백씨가 들어가본 적이 있다고 말한 과장실.사장실.방송실.녹음실 등은 없거나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했다.

사진 찍힌 직원은 안기부도 인정
 안기부는 백씨가 일본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안기부 직원들과 합숙하며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마포의 한 오피스텔에 있는 안가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백씨는 이 사무실의 내부 구조(벽돌을 쌓아 3등분한 방)나 이곳에서 마주친 다른 프락치에 대해 꽤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안기부 김과장은 가능한 한 프락치끼리 마주치지 않도록 합숙 일정을 조정했으나, 불가피하게 마주칠 경우에는 서로 얼굴을 보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 백씨의 설명이다. 이 사무실의 임대자는 지난해 7월부터 현재까지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다만 백씨가 프락치 또는 협조자로 활동한 시점과 중복되는 시기의 임대자 황○○씨는 2년간(91.8~93.7)임대한 것으로 밝혀져, 가명을 사용해 임대한 것으로 보이는 황씨와 안기부와의 관련 여부가 규명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안기부 직원들이 백씨를 낚시터에 피신케 할 때 이용한 쏘나타 승용차(서울 1× 3460)는 백씨와 안기부와의 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이다. 그러나 차적을 조회한 결과 이 번호판을 단 쏘나타 승용차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이 차는 경찰 컴퓨터에 등록되지 않은(또는 차적 조회에 나타나지 않는) 공작용 차량이거나 위장 번호판을 단 차량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경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안기부와 백씨의 관계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물증은 바로 이 차 안에서 몰래 녹화(녹음)된 백씨와 안기부 직원들 간의 생생한 대화 내용과 직원들의 얼굴이다.
과장:일체 전화한 데 없지? 지금 고비다. 절대 전화하지 마라.…금요일 열시까지 ㅋ다방에 나온나. 가 가지고(사장한테?) 인사만 착 하고, 다음주 금요일날부터는 거기 들어간다.
백씨:(동에 가서) 등본을 떼야 하는데.
과장: 우리가 배인오 니놈 잡으러 다니는 걸로 돼 있으니까 우리가 너 잡는 걸로 하고 우리가 떼줄께, 동사무소로 가서. 그래야 눈치 안채지. 우리가 니 잡으러 다니는 걸로 하고…그러니까 니는 우리가 조치하고 있는데 절대 어디 전화연락하지 말고 낚시터에 앉아서 세월만 보내란 말이야.
백씨:(김씨 남매) 재판은 언제 끝날 것 같아요?
과장: 빨리 끝날 거야.
윤○○:지금 1심 들어가 있으니까.
과장: 빨리빨리 끝내라 그랬어. 1심만 끝나면 되는 거야. 2심 없어.
 백씨는 93년 10월 30일 선배의 약혼식 촬영을 핑계로 들고다닌 비디오카메라로 위 대화에 등장하는 두 안기부 직원의 얼굴과 대화 내용을 비디오테이프(1시가20분짜리)에 담았다. 남매 간첩 사건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온 김은주씨 또한 이 비디오테이프에 등장하는 김과장이 남산 지하실에서 자신을 구타.협박했던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50대 직원이고, 윤○○라는 사람은 자기가 검찰에 송치될 때 동행한 안경 낀 젋은 직원이라고 말했다. 백씨가 안기부 직원 주선으로 피신한 파주의 한 낚시터(ㄱ양어장)에 남긴 흔적 또한 안기부와의 관련성을 입증한다. 백씨는 약 넉달 동안 이곳에서 피신해 있었다고 진술했으나 이 낚시터 사장(육○○)과 전 관리인(김○○)그리고 백씨가 밥을 사먹은 ㅇ식당 주인 내외에 따르면 한달 정도 머문 것으로 확인되었다. 식당 주인 내외는 백씨가 지난해 11월 초쯤 이곳에 가끔 들르는 김과장 등과 함께 와 관리인의 소개로 외상을 달고 밥을 먹었다고 말했다. 또 관리인에 따르면, 백씨는 승용차를 탄 3~4명과 함께 왔으며, 사장의 지시로 방갈로 열쇠를 주었더니 한달쯤 머물다 갔다. 그러나 고시 공부하러 왔다는 말과 달리 방에는 책 한권 없고 1주일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으며, 백씨를 데려온 남자(김과장)는 그뒤로 서너번 들러 밥값을 주고 갔다는 것이 관리인의 설명이다. 한편 낚시터 사장은 그 청년(백흥용)이 낚시터에 머문 것은 사실이나 가끔씩 들른 50대 남자(김과장)가 안기부 직원인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날조된 시나리오'라는 안기부의 포괄적 주장이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안기부도 비디오 테이프에 담긴 직원들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안기부측은 "우리 회사 직원들이 그 친구(백흥용)의 신변 보호 요청에 따라 피신시켜준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제보자에 대한 신변 보호 차원일 뿐이지 녹음 테이프 내용은 김씨 남매 간첩 조작과는 무관하다"라고 해명했다. 이 사건에 대한 안기부의 또 다른 주문은 "그 친구가 원래 시나리오 작가임을 고려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기부의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해도 결국 보안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국가 안전기획부는 '3류 시나리오 작가'에게 꼼짝없이 당한 셈이다. 게다가 문제는 '3류 작가'가 쓴 시나리오 치고는 그 구성이 너무 완벽한 시나리오라는 데 있다.
김 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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