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세계에 '새 깃발'펄럭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4.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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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노총 준비위 발족에 한국노총 안절부절…' 중간 노조'쟁탈전 치열

 노동계에 지각 변동 바람이 일고 있다. 올초부터 한번 움직일 때마다 노동계 전체를 들썩이게 한 대규모 노조가 한국노동조합총연맹(노총)에서 줄줄이 빠져나가더니, 최근 민주노총준비위원회(준비위)라는 이름 아래 뭉친 것이다. 11월13일 서울 경희대 운동장에서 정식 발족한 준비위의 주축은, 지난 여름 전대미문의 철도 지하철 연대파업을 실질적으로 이끈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이다. 파업 주체였던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전지협)를 비롯해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대노협) 등 대표적인 강성 노조단체 대표가 망라된 준비위는 "이제 협의체 수준의 기구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라고 전노대 자진 해체를 선언했다. 이 날 준비위가 발족함으로써 노동계 일각의 민주노총 건설 작업이 본격화하게 됐다. 또 '노총민주화론'처럼 기존 노총을 부정하기는 마찬가지이면서도, 제2 노총을 띄우는 데에는 난색을 보이던 노동계 일각의 이견도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노동운동 이론가 이목희씨(한국노동운동 연구소 지도위원)는 "노총민주화론 등은 87년 대투쟁 때부터 줄곧 쟁점이 되어 왔다. 준비위가 발족함으로써 그같은 내부 의견을 노동자 대중 스스로 정리한 셈이다"라고 평한다.

제2 노총, 몸 불리기 '조직 개편'박차
 노동계의 유일.합법 중앙으로 자처해온 노총은 집안 단속을 하는 데 비상이 걸렸다. 11월17일 서울 강서구 88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노동운동 발전 및 사회개혁을 위한 전국노조대표자대회'는 다급한 노총 입장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근래 들어 가장 큰 규모로 열린 이 날 행사에서, 노총 박종근 위원장은 올 한 해 준비위측(전노대)으로부터 두고두고 시빗거리가 되어온, 노총과 경총 간에 임금 인상률을 주된 내용으로 하여 이른바 '사회적 합의'를 해오던 관행을 내년부터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물론 노총 중앙이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정부와 자본측의 부도덕성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총이 사회적 합의를 취소하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노총 내부의 동요를 막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박종근 위원장은 대회사에서 "최근 일부 노동 조직이 따로 모여 노총을 분열시키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어 노동운동의 진로를 더 어둡게 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노총의 다급한 입장은 준비위에 대한 대통합 제의에서도 보인다. 노총은 10월28일 노총과 비노총 세력간 통합 의향을 언론에 흘린 데 이어, 11월17일 행사를 통해 통합 제안을 다시 한번 공식으로 내놓았다.

노총은 "노동조합 조직률이 15% 이하로 떨어진 상황에서 기존 조직 쟁탈전을 벌이다가는 노동자 전체가 피해를 본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또 노총은 양측 동수로 통합추진 기구를 설치하고, 합의제로 통합방안을 세우자는 파격적인 방안을 내놨다. 넘어온 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해 준비위측 입장은 단호하다. 노총이 카드로 내놓은 사회적 합의 중단 부분에 대해 준비위 이용범 위원(전노협 홍보부장)은 "영양가 없는 내용이다. 벌써부터 정부는 노총과의 관계를 일부 재조정하기 위한 작업을 벌여왔다.

정부가 가장 버리기 좋은 떡이 바로 사회적 합의였다 "라며, 이번 선언의 효과를 평가절하했다. 준비위는 또 통합의 전제로 '복수 노조 허용''노총에 대한 정부의 국고보조 중단'을 제시했다. 이 가운데 특히 국고보조금 부분은, 현재 노총 살림살이에 필요한 자금의 대부분이 정부로부터 나오는 상황이어서 노총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올해 정부는 노총에 70억원이 넘는 보조금을 내놓았다. 그런데도 노총은 산하연맹 조합에서 의무금(이른바 맹비)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준비위는 집행위원회 회의를 통해 몸 불리기를 위한 조직 개편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의 지역.그룹.업종별 조직 단위를 보강해, 노총에 반대하면서도 아직 준비위측으로 넘어오지 않은 이른바 '중간 노조'에 대한 흡수 작업을 강화하겠다는 구상이다. 현재 양측의 세력 분포는 숫자상으로는 준비위가 열세이다. 준비위 깃발 아래 모인 조합원 수는 지역.그룹.업종별 조합원 수를 합쳐 40만명 정도이다. 반면 노총은 20개 연맹 별로 소속된 조합원 수가 94년6월 말 현재 1백40만명 가량 된다고 공언한다. 하지만 준비위는 노총측 조합원 규모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태도이다. 조합원 수가 부풀려져 있을 뿐 아니라, 노총에 소속된 조합 대부분이 영향력이 미약한 오합지졸 모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준비위 이용범 위원은 "낮은 노조 조직률을 볼 때, 국내의 조직 노동자는 통틀어 1백60만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준비위측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노총 소속으로 봐도 20만명이 부풀려져 있다"라고 주장한다.

"노총 독점 시대 막 내렸다"
 하지만 중간 노조(또는 반노총.비전노대 노조)에 대해서는 준비위측이나 노총측이나 그 중요성을 똑같이 인식하는 상황이어서, 이들을 둘러싼 쟁탈전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이용범 위원은 "중간 노조가 준비위로 넘어오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이 노총의 합법성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준비위가 실체로 인정받으면, 우리 편으로 넘어오는 것은 시간 문제다"라고 주장한다. 준비위측은 현재 노총에 남아 있는 중간 노조의 조합원 수를 5만~10만명 정도로 추산한다. 대표적인 중간 노조로는 조합원 수 5만명으로 국내 최대를 자랑하는 한국통신노조가 있다. 제2 노총 건설에 대한 노동계 바깥의 이론 싸움도 치열하다.

한쪽은 노총의 견해처럼 제2 노총이 노동계 분열을 가속화하고, 궁극적으로 양쪽의 선명성 경쟁을 부추겨 국가적으로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다른 쪽은 반박 논리를 편다. 이른바 '어용 단체'로 낙인찍힌 기존 노총을 민주성.자주성을 띤 제2 노총이 대체함으로써 노동운동이 비로소 정상 궤도에 진입할 것이라는 논리다. 임영일 교수(경남대.사회학)는 "바람직하기로는 노동자가 자기 생존을 위해 노동시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제2 노총은 바로 그러한 이상에 근접해 있다"라고 평한다. 실제로 어느쪽 주장이 들어맞을는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 확실한 것은, 노총이 노동자의 이익을 혼자서 대변한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용범 위원은 "정부는 이미 제2 노총 조직을 불법 단체가 아닌 법외 단체로 바꿔 부르고 있다. 그만큼 실체를 인정하겠다는 의사 표시다. 노총은 사용자.정부와의 대화에서 지난날 누렸던 독점적인 권리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숨가쁘게 진행되는 노총과 제2노총의 주도권 싸움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심각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것은 정부와 기업만이 아니다.
朴晟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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