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위안부가 뭐죠?”
  • 도쿄 · 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2.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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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한 · 일정상회담에서도 과거의 도식이 그대로 답습되었다. 90년 5월의 盧泰愚 대통령 방일 때는 일왕의 사죄문제, 작년 1월의 가이후 총리 방한 때는 재일교포 법적 지위 문제 그리고 이번에는 정신대 문제가 한 · 일간의 모든 현안을 뒤덮어 버렸다. 그렇다고 되풀이되는 과거사 문제에서 양국간에 시원하게 매듭이 풀린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정상회담이 거듭되면 될수록 양국간 ‘감정의 앙금’은 더욱 굳어지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2년 전 일왕의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는 의미불명의 한마디로 과거사 문제는 일단락되었다는 것이 일본측의 기본입장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작년 1월 가이후 총리는 발걸음도 가볍게 파고다 공원을 찾았고 미야자와 총리는 지난번 방한 때 경주를 둘러봤다. 또한 작년 5월 가이후 총리가 싱가포르 연설에서 전후 45년만에 처음으로 동남아시아 각국에 공식 사죄한 것도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미소기 논리’에서 나왔다. ‘미소기’라는 것은 지은 죄를 물로 씻어내면 깨끗이 없어진다는 일본의 옛 풍습인데, 이 한마디로 동남아시아지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책임은 끝났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일왕 아키히토는 즉위 후 첫 방문지로 ‘미소기 의식’이 끝난 동남아시아지역을 골랐다. 미야자와 총리가 취임 후 첫 방문지로 한국을 선택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방한 전 그의 측근들은 “총리는 이전부터 첫 방문지를 꼭 아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을 흘리며 그것도 一衣帶水 관계에 있는 한국을 골랐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새로운 마찰의 시대로 접어든 한 · 일관계
 그러나 미야자와 총리가 한국을 선택한 것은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관례대로라면 총리 취임 후 미국을 방문해야 하지만 부시 대통령의 방일이 이미 결정된데다, ‘아시아 중시외교’를 다지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방문하자니 가이후 총리와 일왕이 다녀간 지가 바로 엊그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유럽공동체(EC) 통합을 앞두고 반일감정이 격화되고 있는 유럽을 방문하기에도 적당치 않았다.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급부상한 정신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사죄성명도 한국에 대한 ‘미소기 의식’은 이미 끝났다는 입장에서 나왔다. 일왕의 사죄로 양국의 전체 과거사 문제가 이미 결말이 난 이상, 한국측이 일왕의 사죄 문제를 재론 않는다면 얼마든지 지엽적인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총리가 사죄에 응한다는 전략인 것이다.

 미야자와 총리 방한 중 서울의 데모대가 일왕의 인형을 불태운데 대해 일본 외무성이 외무부에 항의한 것도 일본의 ‘일왕온존 작전’에서 나온 것이다. 일본 외무성의 다니노 아시아국장은 지난 21일 “일본의 상징인 천황폐하를 대상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일본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 일 · 한관계의 장래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므로 재발을 방지해달라”고 요청했다.

 〈아사히신문〉이 미야자와 총리 방한 직후인 지난 19일 일요쇼핑으로 북적대던 긴자에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졌더니 4명 중 한사람은 아예 그 단어의 의미조차 몰랐다. 남성보다는 여성이 젊은이보다는 연장자가 더 이해를 표시했지만 20세의 한 사무실 여직원은 “아직까지 그러한 단어를 들은 적도 없고 관심도 없다”며 되레 “그 한자는 어떻게 쓰지요”라고 물을 정도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미야자와 총리에게 일왕을 공식 초청했다. 그러나 서울의 일왕 화형식을 보고 난 자민당의 일부 보수파의원들은 일왕의 방한은커녕 올 가을로 예정된 일왕의 중국방문도 중지해야 된다고 법석을 떨면서 거듭되는 일본의 ‘사죄외교’에 큰 불만을 드러냈다.

 일본의 이러한 ‘미소기 논리’에 한국인 대부분은 아직도 큰 불만을 갖고 있다. 일왕의 사죄발언을 당시 과거사 논의의 결말로 평가했던 한국인은 거의 없었고, 미야자와 총리의 개별보상과 연계되지 않은 이번 사죄표명도 실은 말의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또 작년 1월 가이후 총리가 약속한 재일교포 법적 지위문제도 지문날인 문제만 해결되었지 취직차별 철폐 등 근본적인 문제는 아직도 미해결 상태이다.

 또한 ‘한 · 일무역불균형 시정을 위한 구체적 실천계획’과 ‘한일 산업과학기술재단’의 설치만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대일적자와 기술이전 문제가 금방 해결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보면 한 · 일관계는 지금 바야흐로 새로운 ‘마찰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평가가 어울리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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