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배고픈 이라크, 유화제스처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0.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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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만사태가 1백일이 경과하는 동안 이라크는 화  전 양면의 양동작전을 구사해왔다. 국제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쿠웨이트의 이라크령 편입을 기정사실화한다든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침공할 경우 '옥쇄'를 각오하고 항전할 것을 거듭 표명하고 있는 점 등이 '전쟁'의 입장이라면, 다국적군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극히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조건부 협상'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평화'의 입장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다국적군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강경노선으로 인해 페르시아만에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이라크의 대응은 서방인질의 대대적인 석방이라는 유화 제스처로 나타나고 있다. 전쟁발발의 예봉을 피하면서 다국적군의 행동통일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다국적군 내에서도 무력을 통한 사태해결을 반대해온 소련과 프랑스의 인질을 우선적으로 석방하기로 약속한 것은 이들 두나라가 이라크가 주장해온 '국제회의를 통한 분쟁 해결'의 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가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만사태 이후 이 지역에 착착 증강돼온 미군 및 다국적군의 군사력에 대해 이라크는 당연히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을 터이다. 이미 20만명이 넘는 미군이 이 지역에 집결해 있고 앞으로 10만명 정도가 증파될 예정이라는 보도도 있다. 사막의 기온이 다소 수그러지는 11월부터 앞으로 4개월간이 미군이 군사작전을 벌이기 가장 좋은 기후라는 지적도 있기 때문에 이라크의 위기감은 더욱 높을 수밖에 없다.

다국적군에 의한 경제봉쇄가 최근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는 현지보도도 있다. 이미 9월에 식량배급제를 실시하기 시작한 이라크는 10월에는 휘발유배급제를 실시하는 등 어려움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는 개전 초기부터 이같은 열세를 '범아랍주의'의 기치로 극복하려했고 대미 성전을 선포함으로써 아랍연맹 국가들 중 비산유국들과 기층아랍 민중의 지지를 끌어모아 상쇄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 '이라크 대 국제사회'라는 대립의 도식을 '아랍 대 미국'이라는 구도로 바꿔 국면전환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8월12일 발표된 이라크군 철수의 3조건, 즉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철수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지구 철수 및 시리아군의 레바논 철수와 동일선상에서 취급해야 한다는 조건은 국면전환을 위한 이라크측의 전략을 반영한 것으로 요르단인들 및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 8월과 9월 중동 각 지역에서 전개된 반미시위는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아랍세계에서 후세인의 주장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 10월8일 동예루살렘의 성지에서 벌어진, 이스라엘 경찰관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대량학살 사건은 후세인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동예루살렘 사건은 다국적군을 구성하는 서방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페르시아만사태를 중동문제의 포괄적 해결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지적이 서방지도자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9월24일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사태해결을 위한 4원칙을 발표했는데, 이는 이라크의 무조건 철수와 쿠웨이트의 왕조 복귀를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하는 미국과 영국의 강경노선과는 일선을 긋는 것이었다. 소련도 9월7일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국제회의를 통한 사태해결을 주장한 이래 10월에는 프리마코프 소련대통령 특사가 후세인을 방문하는 등 평화적인 사태해결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미테랑 대통령의 유엔연설 이후 이라크는 기존의 강경노선을 완화하여 인질석방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쿠웨이트 점령정책의 변경 가능성을 시사하는 등 협상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라크의 점령 목적이 궁극적으로 전체 영토의 지배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 영토의 할양에 있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이다. 최근 이라크측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이나 여러가지 정황을 살펴볼 때 이라크의 궁극적 목표는 이라크 국경지대에 있는 쿠웨이트의 루메일라유전과 페르시아만 출구에 해당하는 부비얀섬 및 와르바섬의 할양에 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지난 8월27일 쿠웨이트를 19번째 주로 편입할 때 이라크는 유독 이 지역만을 따로 떼어내 이라크남부 바스라주에 편입시켰고 또 최근에는 쿠웨이트 주둔 군대를 이 지역에 집중배치하고 주변에 콘크리트와 가시철선으로 경계선을 설치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최종적인 순간에 이 선까지의 철수를 협상조건으로 삼으려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측의 발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지역을 이라크에 떼어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아랍국가들 사이에서도 일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사태를 해결할 경우 이라크가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미국이 강경한 반대입장을 누그러뜨리지않고 있기 때문에 협상을 통한 분쟁해결의 길은 아직도 요원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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