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찬 주필이 본 통일후 동독 지역
  • 안병찬 주필 ()
  • 승인 1994.12.0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통제 언론에서 자유정보 시장으로 신문. 방송 민영화 이후 4년째 적응 훈련

이나 마르티네즈는 독일연방정부가 베를린 일정부터 5박6일 동안 안내인 겸 영어 통역으로 붙여준 여대생이다. 마르티네즈는 베를린 자유대학 정치학과 4학년으로 국적이 독일이다. 그러나 그의 가계는 남부 유럽에서 동부 유럽 끝까지 얽혀 있어 유럽형 코스모폴리탄이라고 규정할 만하다. 아버지는 스페인 사람(국적을 지키고 있다), 어머니는 독일 사람, 남편은 러시아 유학생이니 유럽의 세 민족 혈통이 한 집을 이루어 사는 격이다.

독일은 통일되고 4년을 넘겼으므로 이른바 베를리너 마우어(베를린 장벽)는 존재와 가치가 소멸했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옛 동독 땅인 포츠담과 드레스덴으로 가기 전, 마르티네즈가 베를린에서 안내한 여러 장소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곳은 역시 베를린 장벽이었다. "잠깐, 저기 아주 기막힌 그림이 있다. "마르티네즈는 뮐렌 거리에 기념물 삼아 부분적으로 남겨놓은 1.3㎞의 베를린 장벽 한 곳에 차를 멈추게 했다.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에리히 호네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제1 서기가 실감나게 키스를 하고 있다. 냉전시대 철의 장막과 베를린 장벽을 지킨 두 거물이 이념적 동성 연애자였음을 묘사한 벽화다. 예술가 1백18명이 참가해서 동쪽 화랑(이스트사이드 갤러리)이란 이름으로 벽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도 그 중 하나라고 했다. 브레즈네프는 82년에, 베를린 장벽은 89년에, 호네커는 94년에 모두 가버렸으나 벽화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까닭은, 이 자리가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공존하는 오씨. 베씨. 보씨
 오늘의 통일 독일에는 세 종류 사람이 살고 있다. 서독 출신과 동독 출신 그리고 그 중간 지대에 있는 사람이다. 옛 서독 사람은 베씨(wessi), 옛 동독 사람으로 지금은 신생 연방주에 살게 된 사람은 오씨(ossi)라고 부르고, 오씨와 베씨의 중간 지대 사람은 보씨(wossi)가 되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전형적인 보씨이다."본의 외무부에 근무하다 차출되어 옛 동독 지역인 브란덴부르크 주 수도 포츠담의 주정부에서 일하는 요한 크리스토퍼 예센 박사의 말이다. 그는 주정부 총리실의 법률 및 유럽.연방 문제 담당 장관 자문관이다.

그렇지만 배석한 주정부 공보관인 에르하르트 캠퍼씨는 자기가 오히려 진정한 보씨라고 주장했다. 그는 58년에 동독 치하 포츠담을 빠져나가 서베를린에 이주해서 공무원이 되었고, 통일이 되면서 차출되어 고향 포츠담에 돌아왔으므로 그렇다는 말이다. 브란덴부르크 주정부의 경우 장관 11명 가운데 재정.경제 장관 등 3명이 베씨이고 나머지 8개 부서는 모두 오씨가 맡고 있다. 신생 연방주와의 경제적 통합은 그런대로 청신호를 보인다. 문제는 사고방식의 차이에 있다. 신생 연방주에 사는 오씨들 머리에 박혀 있는 구시대 사고 틀을 베씨의 그것에 근접하도록 바꾸는 일은 아직도 멀었다.

 이는 오씨와 베씨와 보씨를 통틀어 통일 독일 사람들이 공감하는 문제이다. 동서독 지역 사람들이 여러 가지 격차를 해소하고 정체성을 얻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언론의 기능이다. 옛 동독 지역에서 과거에 사회주의 통일당 정부 기관지로 운영되던 신문과 방송은 새로운 통일체제, 자유로운 정보 유통 시장을 학습하여 체질화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신생 연방국에 사는 오씨들은 과거보다 범죄가 늘고 있다고 느낀다. 신문의 자유로운 보도로 그렇게 체감하게 된 것이다. 신문은 범죄가 증가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접근 가능한 모든 출처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권리 등을 보장하고 있는 독일 연방헌법 5조의 법리에서 나오는 현상이다.

브란덴부르크 주 포츠담 시에서 발행되는 〈메르키셰 알게마이네〉신문은 옛 동독 시절에는 사회주의 통일당 기관지였다. 이 신문은 〈메르키셰 폴크스스티메〉라는 제호를 가지고 있었으나 통일 직후 90년에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고, 91년에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신문에 의해 민영화됐다. 그에 따라 발행인이 바뀌고 경영관리부서 책임자만 서쪽에서 온 베씨가 담당하고 있다. 편집국 인원은 1백30명으로 전보다 20여 명이 줄었으나 구체제 때의 구성원이 거의 남아서 근무한다. 〈메르키셰 알게마이네〉신문 정치부장 한스요아킴 바렌베르크는 공산당원 출신 박사이다.

포츠담 시 교외, 짙은 가을 풍경으로 경치 좋은 식당 민스크에서 그와 대좌했다. 전형적인 게르만족 외모를 한 남자인데, 새로운 언론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꽤 주눅이 든 듯했다. "나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 건국일에 태어났으니 금년 45세이다"바렌베르크 부장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84년에 베를린 사회과학 아카데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에는 기관지가 정치적으로 상의 하달만을 해왔다. 통일 이후 직업적 업무뿐 아니고 모든 생활에서 새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그는 새 체제하의 고충을 이렇게 실토했다. 바렌베르크 부장은 한국 통일에 대해 의견을 말할 때는 경제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강조한다.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민한테 심적 부담이 생기면 사회적 긴장이 생긴다. 동독 사람들은 흔히 패자라고 생각하지만 이 말은 맞지 않다. 우리 모두가 승자이거나 우리 모두가 패자인 것이다"바렌베르크 부장은 과거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은 풍기려 하지 않았지만, 오씨와 베씨 사이에 현존하는 경제적.정신적 격차가 해결해야 할 중대사라고 강조한다. 그에게 북쪽 사람이 남쪽에 내려가 요직을 장악한 베트남의 현실을 상기시키고 독일의 동서 차별과 어떻게 다르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서독은 동독을 점령한 것이 아니다. 동독이 통일을 원했으므로 이루어진 통일이라는 점이 베트남과 다르다."

"언론 통합 위해 법률 재정비 필요"
〈메르키셰 알게마이네〉는 사회주의 통일당 기관지 시절에는 하루 6~8쪽씩 30만부를 발행했으나, 현재는 16~24쪽에 발행부수는 24만이다. 옛 동독 지역인 작센 주 수도 드레스덴은 베를린 리흐텐베르크역을 떠나 프라하를 경유해 빈까지 가는 특급 열차로 2시간 4분 걸린다. 이 도시의 대표적 신문은〈작시셰 차이퉁〉이다. 이 신문은 46년에 사회주의 통일당과 공산당 합작 기관지로 출발했다. 〈작시셰 차이퉁〉부국장 올라프키텔은 39세의 젊은 나이인데, 책상머리에 개인용 컴퓨터가 있는 사무실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통일 직후에는 대변혁으로 이 신문이 무너질까 염려했다.

89년 이후 우리 신문은 새로운 경험을 했다. 편집진이 바뀌어 새로운 국장을 선출했다. 새로 선출된 편집진이 당분간 자치적으로 운영했다."키텔 부국장은 포츠담에서 만난 바렌베르크 부장보다 젊고 통일 체제에 더 잘 적응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90년 초부터 서독 쪽의 큰 신문이 국영기업 관리청(트로이한트안슈탈트)을 통해 동독쪽 신문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작시셰 차이퉁〉은 〈디 차이트〉신문과 주간지 〈슈테른〉을 발행하는 회사인 그루나르-야르가 인수했다. 새 경영자는 엘베 강변의 12층 사옥을 말끔하게 보수하고 5억 마르크를 투자하여 도약을 다짐하고 있다.

발행부수 42만5천부로 독일에서 3,4위를 다툰다. 지역 뉴스 중심으로 편집국 구성원 1백60여 명이 18개 지국에 나뉘어 일하고 있다. "이 신문의 중요한 변화는 젊어졌다는 것이다. 통일 이후 나이 많은 구성원 55명은 조기퇴진제도로 신문사를 떠났다. 현재 국장을 비롯해 기자는 모두 오씨 출신이다. 서쪽에서 온 부장급은 경제부장과 편집서무부장 2명뿐이다."키텔 부국장은 동서 통합과정에서 겪은 고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선 동서독 사람의 사회적 태도가 다르다는 점이다. 신문에서 일하자면 그런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동서의 차이속에서 일하면서 그 차이를 없애는 것이 우리 임무라고 인식한다. 내 견해로는 진정한 통합을 위해서는 동서 양쪽의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에 오씨는 정부가 보살펴 주는 데만 익숙했다. 서쪽의 베씨는 승진을 위해 팔굽으로 남을 쳐내며(해치며) 경쟁했다. 우리 임무는 동서 경험을 합쳐 새로운 큰 것을 창조하는 데 있다. ""나는 상황에 적응하는 데 만족한다. 자유롭게 기사를 쓰고 있으며, 내년에는 우리도 서쪽과 같은 임금을 받으리라고 기대한다.

우리 신문기업은 성공적이다."키텔 부국장의 경험담은 언론의 통일.통합 역시 많은 시행 착오를 거침을 알게 만든다. "과거 동독 시절에는 중앙 정부가 언론을 통제해 왔으나, 통일 후로는 각 주정부가 매체를 관리하게 되었다. 40년 동안 서독이 발전시킨 언론 관계법으로 언론계를 통합하자면 그 법의 재정비도 필요한 것이 통일 독일의 현실이다."작센주 언론법 담당 자문관 크리스토프 마이어씨의 말이다. 과거 사회주의 통일당 기관지에서 일한 기자들은 통일 이후 어떤 '사실'을 표현하는 데 부족함을 느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민영화한 동독 지역 신문들은 아직 변화를 수용하여 체질화하는 데 여려움을 겪고 있다. 기자들은 이제 문제의 요점과 관심 요소를 스스로 깨우치도록 요구받고 있다. 수많은 정보의 파편들 중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당국의 안내 지침 없이 자유로운 정보시장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초점을 잡는 습관이 몸에 배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