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생사람 잡는’ 원양어선
  • 부산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2.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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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사망 · 실종 8백명, 대부분 의문사… 유족 “경찰 수사 미온적” 반발

이제 선상폭력의 실태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난해 9월12일자 《시사저널》에 ‘사람 잡는 먼 바다 고깃배’ 기사가 나간 이후, 본지 편집국에는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한다며 “당국의 철저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독자편지가 쇄도했었다. 또한 각 언론에서도 앞다투어 선상폭력 문제를 다루어 해양경찰대를 비롯한 관계 당국을 당혹케 했으며, 급기야 국정감사에까지 이 문제가 오르내렸다.

그 이후 원양어선에서 벌어지는 선상폭력관행은 어떻게 되었는가. 선상폭력에 대한 당국의 수사는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시사저널》 보도 후 선상폭력 단속 강화돼
언론으로부터 세차게 두드려맞자 수수방관해오던 해양경찰이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선 것은 사실이다. 지난해 국정감사 때 해양경찰대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88년부터 90년까지 선상폭력 혐의로 선장이 구속된 경우는 단 1건, 선원이 구속된 경우는 8건에 불과했다. 반면 부산해경에 10명의 형사로 구성된 선상폭력 전담반이 설치된 지난해 11월18일 이후 올 1월말까지 선상폭력으로 구속된 수는 45명에 달한다. 불구속입건도 50명이다.

이는 그동안의 수사가 얼마나 형식적으로 행해졌는가를 알려주는 자료일 뿐이다. 더구나 전담반까지 설치하면서 극성을 떤 해경의 수사결과에 대해 사망 선원의 유족들은 미원적인 수사라며 반발하고 있다. 현재 유족들이 “사망원인을 밝혀달라”며 청와대를 비롯한 관계기관에 탄원서를 올려 해경에서 골머리를 앓는 대표적 사건 두가지를 예로 들어보자.

지난 90년 9월26일 부산에 거주하는 강영호씨(41)는 해경으로부터 느닷없이 “원양어선을 탄 처조카가 실종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실종된 처조카는 김상운군으로 당시 18세였다. 기군은 3대독자로 홀어머니가 재가해 2명의 고모가 번갈아 돌봐야 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던 중 김군은 고모와 의논도 없이 980년 9월16일 명태잡이 원양어선인 북양2호에 승선했다. 그리고 북태평양 해상에서 동료 이원기군(17)과 함게 변을 당한 것이다. 바다에서 실종됐다니 어찌 해볼 도리도 없었다.

그로부터 약 14개월 후인 91년 12월9일 강씨 부부는 회사측으로부터 “김군의 시신이 일본 북해도 무로랑 앞 48㎞ 해상에서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시신은 12월20일 가족에게 돌아왔다. 물론 현지에서 화장해야 한다는 회사측의 집요한 주장을 물리친 뒤였다. 그러나 김군의 시신은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상태였다. 머리와 양팔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갈비뼈와 척추만이 김군의 참혹한 죽음을 응변으로 부여주고 있었다. 하반신은 비교적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일본 경찰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에서 신분확인이 가능했던 것은 바지주머니에서 발견된 수첩 때문이었다. 수첩에는 김군의 가족과 친구들의 연락처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이때부터 김군 가족의 외로운 싸움은 시작됐다. 당시 수사기록에는 “배에서 탈출하려고 구명동의를 입고 뛰어내렸거나, 배멀미 대문에 갑판에서 바람을 쐬다 실족해 바다에 떨어졌을 것”이라고 돼 있다. 그러나 유족들은 엉터리 수사라고 주장한다. 배멀미를 하는데 왜 구명동의를 입었으며 살아날 가망이 없는 망망대해에서 탈출을 감행한 이유가 분명치 않고, 설혹 탈출을 감행했다 하더라도 어린 선원을 극한 상황까지 몰고간 ‘위협적 분위기’에 대해 왜 수사를 하지 않았는지 납득이 안간다는 것이다. 또한 원양어선을 타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급선원은 구명동의에 손을 댈 수 없도록 원천봉쇄돼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14개월 동안 바다에 떠다닌 시체치고 하반신이 너무 멀쩡했다. 척추 아래의 하반신은 거의 온전하게 살이 붙어 있었다. 가족의 눈에는 김군의 유품도 14개월 간 바닷물에 노출된 것이라고 믿겨지지 않았다. 일본 경찰로부터 넘겨받은 유품은 수첩 · 바지 · 손수건 · 할머니 사진 · 국산껌 몇통 · 넥타이 · 선원용 구두 · 혁대 · 천원권 지폐 33장 · 노랫말 메모 등이다.

가족들은 구두와 넥타이 등 김군의 물품이 고스란히 들어 잇는 것으로 봐서 “선상에서 죽은 후 일정 기간 냉동창고에 보관됐다가 일본 북해도 근처에서 버려진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도대체 바다에 뛰어드는 사람이 왜 구두를 신으며, 넥타이와 껌은 왜 가지고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수첩과 메모의 글씨는 잉크자국이 번지지도 않고 선명하게 남아 있어, 가족들은 “14개월 간 바다에 떠다닌 시체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이재천씨(56 · 부산)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씨는 아들이 꽃집을 크게 차려 살아가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혼기가 찬 딸의 결혼비용을 내손으로 마련하고 싶다”면서 지난해 8월19일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징어잡이배 518행복호에 올랐다. 이씨는 원양어선만 10년째 탄 베테랑이라 가족들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번에 맡은 직책이 조리사였기 대문에 가족들은 설마 시신이 되어 돌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씨는 약 4개월만인 12월11일 페루 공해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사고 직후 518행복호는 급히 페루 카를로항에 입항, 현지 경찰에 변사사실을 신고했다. 페루 경찰이 현지에서 부검한 결과 사망 원인은 “목이 졸려 숨졌다”는 것일 뿐, 자살 또는 교살인지가 분명치 않았다. 다만 이씨의 위에는 음식물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위액만 검출된 것이다. 위액만 검출됐다는 사실은 적어도 2~3일 굶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회사측에서는 사인이 밝혀지지도 않은 12월12일 가족에게 “부친이 자살했다”는 통보를 해왔고, 시신은 12월21일 부산에 도착했다. 아들 이진행씨(30)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살할 이유가 없어 어버님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발벗고 나서게 됐다”면서 올 8월에 배가 들어오면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겠다고 말한다.

이씨의 시체는 80㎝ 폭의 침실 입구에서 발견됐다. 최초의 발견자에 따르면 이씨의 목에는 나일론 끈이 묶여 있었고, 이 끈의 상단에는 못이 박여 있었다고 한다. 침실 바닥에서 못까지의 높이는 고작 1백60㎝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발견 당시 이씨는 목을 약간 숙인 채 앉은 자세로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씨의 키가 1백61㎝였으니 자살하려면 앉은 자세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가족들은 “자살할 이유도 없을 뿐더러, 과연 그런 자세에서 자살이 가능했겠느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자살을 택했다면 자신의 키와 비슷한 높이에서 자살을 결행해야 하기 때문에 ‘죽기 위해 애쓴’ 흔적이 시신에 나타나야 한다. 즉 색혼(목이 졸린 자국)이 여러 개 남아야 하는데 사진(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시신의 색흔은 뚜렷한 단선을 긋고 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목을 매단 시신에서 발견되는 색흔은 목 뒷덜미로 갈수록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시신의 색흔은 목젓 바로 위에서 거의 일치선을 그리며 나타났다.

한마디로 가족들은 “누군가 끈으로 목을 졸라 죽이고 이를 위장하기 위해 꾸민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밖에 회사측에서 제시한 동료선원들의 증언에서도 많은 모순점이 발견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씨의 자살에 설득력이 없는 이유는 뚜렷한 자살 동기가 없다는 것이다. 이진행씨는 “손자의 돌잔치와 딸의 결혼도 계약기간이 끝나는 1년 뒤로 미룬 채 배에 오른 아버님이 유서 한장 없이 무엇 때문에 자살을 했겠느냐”고 반문한다.

가족들이 제기한 의문점은 518행복호의 항해 일정을 보면 금방 드러난다. 페루 근해에서 조업했던 518행복호는 10월초부터 한달에 한번 꼴로 페루의 카야오항에 입항, 1주일간 정박했다 다시 출항하곤 했다. 따라서 만약 이씨가 자살할 정도로 극한 상황에 몰렸다면, 12월4일 세번째 입항했을 때 배에서 빠져나왔거나 적어도 가족에게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이씨는 이전에도 중간에 하선해 귀국한 적이 있다.

“희생자 4백명으로 줄이는 게 당면 목표”
위의 두 사건처럼 선윈의 실종이나 사망사건은 대부분 사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채 의문사로 남는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망망대해의 배 위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선원은 연간 8백명에 달한다. 우리나라 전체 선원이 2만명에 불과한데 하루에 죽어나가는 선원이 무려 2.4명에 이르는 셈이다. 그러나 원양어선의 열악한 근로조건은 선원에게만 불리하게 되어 있는 선원법이 바뀌지 않는 한 당분간 해결될 수 없을 듯하다.

“해마다 8백명씩 죽어나갔지만 그걸 4백명으로 줄이는 게 당장의 목표입니다.” 전국선원피해자협의회 황경연 위원장(32)의 말은 선원들이 당하는 고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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