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쓰레기 시한폭탄 ‘째깍째깍’
  • 김당 기자 ()
  • 승인 1994.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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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분장 선정 초읽기... 정부와 주민 · 반핵단체 일전 불가피



  지난 6년 동안 표류해온 핵쓰레기 처분장 선정 작업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같은 움직임은 정부가 11월15일 발족시킨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기획단(기획단)에서 읽을 수 있다. 한영성 과학기술처 차관이 단장을 맡고 정부 공무원들이 ‘범부처’로 참여하는 이 기획단은,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을 선정키 위한 실무 추진 기구이다.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근처에 사무실을 두고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면서 일하는 기획단은 기술기획반 · 지역개발반 · 사업지원반 등으로 구성돼 있다고 전해진다.

  특이한 것은 기획단의 인적 구성이다. 기획단에는 과기처(3명)말고도 내무부(3명) · 경찰청(3명)과 상공자원부 · 총무처 · 공보처(각 1명) 공무원들이 파견 형식으로 참여하고 있다. 기획단에 핵쓰레기 처분장을 선정하는 주무 부처인 과기처보다 ‘힘이 더 센’ 관련 부처에서 파견된 인원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은, 처분장 선정 및 건설 추진 작업이 그동안 과기처가 표방해온 ‘민주적 절차와 주민의 동의’라는 원칙을 벗어나 ‘물리력’에 의존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곧 88년 제221차 원자력위원회에서 방사성 폐기물 관리시설 건설 계획을 의결한 이래 과기처 산하 원자력연구소(더 정확히는 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환경개발센터)가 맡아 추진해온 핵쓰레기장 선정 사업이 과기처 손을 떠났음을 의미한다.

기획단 발족하자 반핵운동본부 결성
  물론 이같은 추진 방식 변화는 지난 6월 정부내에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추진위원회를 내무부 · 법무부 · 건설부 · 교통부 · 상공자원부 · 과기처와 시장 · 도지사 및 경찰청장 등 관계 장관들과 기관장들의 협의체 형식으로 구성키로 한데서 예고된 것이기는 하다. 당시 이 협의체의 간사를 맡은 한영성 차관은 범부처 협의체를 구성한 배경을 “과기처의 힘과 방식만으로는 더 이상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부지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결국 지난 10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고 15개 관련 부처 장관 및 해당 지방자치단체장이 참여하는 범부처 협의체를 구성함으로써 과기처는 힘에 부치는 짐을 덜 수 있게 되었지만, 이는 곧 안면도 사태 이후 과기처가 강조해온 △민주적인 절차 △주민 동의 △방사성폐기물 관리 시설 주변 지역 지원이라는 부지 선정 방식의 수정을 의미한 셈이다.

  따라서 기획단이 발족하자마자 11월22일 ‘핵없는 사회를 위한 전국 반핵운동본부’(반핵운동본부)가 뜬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그동안 반핵운동을 주도해온 환경운동연합, 배달녹색연합 등 환경운동 단체들과 울진 · 양양 등의 핵발전소 · 핵폐기장 지역 주민 대책위들은 이날 한국반핵운동연락협의회와 전국 핵발전소 · 핵폐기장대책위원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반핵운동본부를 발족시켰다. 아울러 반핵운동본부는 이재돈 신부(천주교 환경사제단 대표), 임원식 위원장(울진 핵발전소 대책위), 정구선 의장(핵발전소 · 핵폐기장 건설 반대 광주전남대책회의)등 3명을 공동대표로, 최 열 사무총장(환경운동연합)을 집행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만약의 사태에 기동성 있게 대응하기 위해 서울 영동권 · 부산영남권 · 광주호남권 등 세 곳에 권역별 상황실을 두기로 했다.

  반핵 단체들과 지역 주민이 이처럼 긴박하게 대응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정부의 올해 안 핵폐기장 선정 방침이 어느 때보다 확고하다는 점이다. 이는 핵폐기장을 선정 할 총대를 멘 김시중 과기처장관의 거듭된 ‘연내 부지 선정 매듭’ 공언에서 엿볼 수 있다. 원자력에 대해 남다른 소신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김장관은, 이같은 공언만으로는 미덥지 않은지 최근 들어서는 아예 텔레비전 광고에 출연해 “전기가 없는 세상을 상상이나 해보셨습니까? 원자력 폐기물 관리 시설 우리가 함께 풀어갑시다”라고 원자력 홍보에 적극 나서고 있는 형편이다. 

  또 정부(과기처와 공보처)가 지난 10월부터 3개 텔레비전 방송의 주요 시간대에 탤런트 이정길씨를 내세워 외국의 핵쓰레기 처분장을 소개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습니다”라고 연내 부지 선정의 불가피성을 집중 홍보하는 것도 핵폐기장 터 선정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실제로 원자력 연구소가 지난9월 마련한 방사성폐기물 관리사업 계획안에도, 올 12월까지 토지 매수 위탁협약을 체결하고 내년부터는 관리 시설 건설에 착수하기로 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가 최근 집중적인 홍보전을 펼치며 연내 부지선정을 서두르는 일차적 배경은, 해를 넘길 경우 내년 상반기로 예정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이후에는 핵폐기장 터를 확보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현재 각 발전소 부지에 임시 보관하는 핵쓰레기(중 · 저준위 방사성폐기물)와 사용후핵연료(고준위 폐기물)가 넘쳐나지 않으려면 올해 안에 반드시 터를 확보해야 한다는 위기 의식도 정부를 다급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전력공사에 따르면, 10월말 현재 고리 · 월성 · 영광 · 울진 4개 발전소 부지에 보관중인 중 · 저준위 폐기물 발생량은 총 4만5천1백80 드럼(2백리터 들이)으로, 총 저장 능력 7만9천9백 드럼의 56.5%에 달한다. 특히 울진의 경우는 95년, 전체 평균으로도 99년이면 임시 저장고마저 가득 차 더는 저장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와 한전측의 설명이다.

  사용후핵연료 또한 사정이 엇비슷해 97~98년쯤이 예상 포화 연도이다. 따라서 항구적인 방사성폐기물 관리 시설을 건설하는 데 평균 7년이 걸리는 만큼 늦어도 95년에는 공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측 논리이다.

“핵쓰레기장 건설 더 늦출 수 있다”
  그러나 해당 지역 주민과 반핵 · 환경 단체들의 반대 논리 또한 만만치 않다. 우선 이들은 방사성폐기물 관리 시설을 지금 건설하지 않는다면 원자력 발전은 중단되고, 제한 송전과 함께 전기 없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정부의 논리를 거짓 협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환경운동 연합 문유미 간사는 “핵폐기장 건설을 더 늦출 수 있는데도 정부가 연내로 시한을 정해 놓고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수가 없다고 외길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지역 주민의 의사가 어찌되었건 강행하겠다는 사실상의 기만이요 협박이다”라고 반박했다.

  ‘더 늦출 수 있다’는 역논리는 사실 틀린 말이 아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중 · 저준위 폐기물 영구 처분 시설과 달리 원전 부지 안에 있는 임시 보관 시설은 비교적 쉽게 건설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늘려왔다는 점에서 ‘저장 시설이 없어 원자력 발전이 중단되고 송전을 제한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했다’는 주장은 아직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원자로 4호기가 들어서 잇는 고리 원전의 경우 본디 92년이 예상 포화연도였으나 한전은 기존 폐기물 저장고 옆에 임시 저장고(2만3천 드럼 규모)를 증설해 예상 포화 연도를 2001년으로 늦춰 놓았다. 또 한전은 최근 정부가 연내 핵폐기장 터 선정에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폐기물 초고압 압축 설비를 들여놓았다. 한전에 따르면, 이 압축 설비를 이용할 경우 방사성폐기물 발생량을 현재 3분의 1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예상 포화연도는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 상황 여건에 따라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연내로 시한을 못박고 부지 선정을 서두르는 것은 방사성폐기물 관리 사업을 위해 설치한 원자력환경개발센터가 그동안 예산을 수백억원이나 쓰면서 사실상 안면도 사태 이후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는 데 대한 초조감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따라서 정부가 유독 연내 선정을 고집하는 논리는 “그러면 지금까지는 뭐했느냐”라는 반론에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한편 내년 상반기로 예정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때문에 올해를 넘기면 부지 선정이 더 어려워진다는 논리는, 오랜 중앙집권주의적 타성에 젖은 발상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원전 업무에 종사하는 한전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지방자치가 정착하면 오히려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을 유치하기가 더 쉬울 수 있다. 즉 지금은 모든 것을 중앙 정부에 의존하지만 지방자치가 정착하려면 지방자치단체의 재원 확보가 필수이므로 정부가 안전성에 대한 신뢰 분위기만 조성하면 중앙 정부의 막대한 자원이 법으로 보장된 폐기물 관리 시설을 유치하려는 지방자치단체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좋은 예는 핵쓰레기 처분장과 농축 · 재처리 시설이 함께 들어서 있는 일본의 로카쇼무라 원자력 단지이다. 일본 원연(原撚) 주식회사가 관리하는 이 일본 최대의 핵단지 또한 처음 후보지로 선정된 84년에는 주민들의 반발이 완강했다. 그러나 부지 선정 이후 10개월에 걸쳐 주민에게 안전성에 홍보와 설득 작업을 편 결과 아오모리 현의 로카쇼무라 지방의회로부터 사업 유치 결정을 이끌어냈다. 따라서 정부도 지금 당장 무리하게 선정하는 것보다는 지방자치가 정착된 뒤 지방자치단체와 유치 협상을 하는 편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는 지적이다.

대안 없이 닥친 선택의 순간
  그러나 이같은 유보론은 현재의 정부 방침으로 보건대 별로 채택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핵폐기장 터 후보지로 선정된 10군데 해당 지역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반핵단체에서는 현재의 정부 방침이나 기획단의 인적 구성 등에 비추어 택일만 남은 것으로 본다. 기획단은 이를 부인하지만, 과거의 전례와 부지 선정 작업의 특성에 비추어 장소 선정과 지원개발계호기 등 마스터플랜을 다 짜놓고 공표 시기만을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이 환경 단체들의 일치된 관측이다.

  이같은 예상을 뒷받침하는 것이 지난 6월 제정된 ‘방사성폐기물 관리사업의 촉진 및 시설 주변 지역의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다. 기획단에 참여하고 있는 과기처의 한 관계자는. 긴 이름만큼이나 시행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운 법령임을 들어, 법대로 민주적인 절차와 주민의 동의를 거쳐 주변 지역에 대한 지원 사업을 제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행령이 행정 당국의 처지에서는 복잡하고 까다로울지언정 주민의 처지에서 보면 결국 ‘선지정 후동의’ 방식을 보장하고 있다는 데 있다.

  21쪽 그림에서 보듯 현행 부지 선정 절차는 마치 프로야구에서 신인 선수를 지명 · 계약하는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즉 정부가 먼저 부지 한 곳을 정해 이를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한달 이상 공개하고 공청회와 지역협의회 의견을 수렴해 이를 원자력위원회에서 최종 확정한다는 것이 정부의 복안이다. 한마디로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의견은 충분히 듣겠지만 결정은 정부가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역협의회 구성 비율을 볼 때 주민들의 의견이 충분히 수렴될지도 불투명하다. 시행령에 따르면 지역협의회 위원은 해당 지역의 △시 · 군 · 구 지방의회 의원 △광역 · 기초단체장이 지명한 공무원(2명) △읍 · 면 · 동장이 추천하는 주민(7명) △과기처 및 상공자원부 장관이 지명한 전문가(2명) 등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다만 정부는 해당 지역의 발전을 위한 지원 사업과 보상 계약을 위한 협상에는 최대한 인내심을 갖고 충분히 협의하겠다는 자세이다. 정부의 지원 계획에는 이미 △부지 선정 직후 초기 연도에 지역발전기금 5백억원 이상 지원 △건설기간중 매년 50억원 지원 △시설 운영  기간중 매년 30억원 지원 같은 ‘파격적인 당근’이 포함되어 잇다. 문제는 후보지로 거론되는 10곳 모두가 억만금을 준다 해도 결사 반대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정부는 선정 · 협상 과정에서 안면도 사태와 같은 집단 시위가 발생할 경우 공권력 투입이라는 채찍을 동원해서라도 이를 관철한다는 방침이다.

  물론 협상할 여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반핵운동본부 최 열 집행위원장은 “우리가 핵폐기장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일방적 건설 계획을 연기하고 사회적 합의에 의해 국가의 장기 전원개발 계획을 다시 짜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즉 2006년까지 원전 14기(건설중 7기, 계획중 7기)를 더 짓는 장기 전원개발 계획을 유보 · 수정할 경우 처분장 선정과 관련해 정부와 협조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국민 투표와 주민 투표가 전제된다. 스웨덴처럼 국민투표를 통해 워전 의존형의 장기 전원개발 정책으로 갈 것인지를 선택하고, 일본처럼 주민 투표를 통해 처분장 유치를 자치적으로 결정케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합(국민 투표)과 소통합(주민 투표) 병행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은 핵정책에서만큼은 별로 받아들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전기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원자력 외에 대안은 없다.” 퇴로가 차단되고 이같은 벼랑끝 외침만 울려퍼지는 가운데 핵쓰레기 처분장 선정을 둘러싼 외길 선택의 순간은 시한폭탄처럼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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