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간의 고독, 자살로 마감
  • 광주.허광준 기자 ()
  • 승인 1994.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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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 장기수 김문찬씨, 갱생보호소에서 목 매... 사회의 포용력 부족이 낳은 비극


  지난 10월30일 오전 광주시 북구 매곡동 법무부 갱생보호회 광주 · 전남기부 보호서. 직원 ㄱ씨는 여기서 생활하던 장기수 출신 金文燦씨(67)가 자기 방인 생활관 9호실에서 목을 매 죽은 것을 발견했다. 빨랫줄로 쓰던 빨간 나일론 끈을 벽에 박힌 못에 감아 목을 맨 김씨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ㄱ씨는 10월29일부터 문이 잠긴 채 인기척이 나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30일 아침 문을 뜯고 들어가 김씨의 주검을 발견한 것이다. 북한의 대남 공작 안내원에서 남파 간첩, 장기수, 전향 출소자로 신분이 바뀌어온 김씨의 67년 삶은 1.5평 남짓한 갱생보호소 독방에서 끝났다. 북녘에서 33년, 남녘에서 34년을 보낸 삶이었다.

  함경남도 단천군 이중면에서 태어난 김문찬씨가 남한 땅을 밟은 것은 60년 4월 말이다. 대남 공작원을 남한 지역으로 안내하는 임무를 띠고 일행 4명과 함께 강원도 고성군 근방에 내려왔으나, 배가 고장나 군경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검거되었다. 동료들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김씨는 서울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무기형을 언도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서대문구치소 · 대전교도소 · 전주교도소 · 광주교도소를 거치며 21년 동안 형을 살았다.

경찰 등에 천만원 떼인 ‘노랭이 김씨’
  전향 각서에 손도장을 찍은 김씨가 가석방으로 출소한 것은 81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 특사때였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김씨는 30대 중반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중반으로 변해 있었다. 북에는 부인과 아들 둘이 있지만, 남녘 땅에서는 혈혈단신인 김씨가 갈 데라고는 없었다. 그는 갈 곳 없는 출소자를 수용하는 광주 갱생보호소를 스스로 찾아들었다. 본적도 새로 만들었다. 본적지는 갱생보호소가 현재의 위치인 매곡동으로 옮기기 전 주소인 광주시 동구 지산동 394번지였다.

  보호소측은 김씨가 교도소에 있을 때 목공예칠 일을 배운 것을 알고, 그를 목공소에 취업시켰다. 그러나 오랜 수형으로 몸이 약해진 김씨는 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83년 초부터 청소 일을 하던 김씨는 운좋게 선이 닿아 서울로 올라갈 길을 찾았다. 갱생보호소측이 김씨의 취업을 이북5도민회에 의뢰했는데, 김씨가 스스로 자기 사정을 써서 고향인 함경남도 단천군 군민회에 편지를 냈던 것이다. 그는 83년 8월 동향사람이 의사로 있는 서울 중구 광희동 한 병원의 관리인으로 취직했다.

  김문찬씨의 서울 생활은 개인적으로는 그가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편안하고 따뜻했지만, 장기수 출신이라는 굴례는 그를 편안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김씨는 동향인 병원장 최아무개씨가 소유한 수원 부근 농장에서 일하던 한 여성과 만나게 됐고, 그와 가정을 꾸미려면 주거 제한의 벽을 허물어야 했다. 김씨는 나중에 갱생보호소 지정남 지부장을 통해, 자기를 담당하는 김아무개 형사에게 선처를 부탁하여 2백만원 가량을 건넸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씨는 한국 사회가 돈으로 굴러간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형사에게 돈을 주고도 주거 제한 해제 같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게다가 김씨는 자기를 서울에 취업시켜 준 군민회 간부 김아무개씨에게 8백만원 가까이를 빌려주었다가 떼이게 되었다. 이 돈은 술 담배도 하지 않는 그가 신앙처럼 모은 돈이었다. 김씨는 자기를 담당한 검사와 정기적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이같은 사실을 다 말해버렸다. 해당 경찰관은 문책당했다. 대신 김씨가 얻은 것은 경찰 관찰 기록의 ‘요주의 인물’평가였다.

  장기수 출신 동료들은 김씨가 이때부터 자기 주변에 대해 피해 의식을 갖고 살게 됐다고 말한다. 89년 여름, 김씨는 서울 한복판에서 사소한 시비로 폭행을 당하고 병원에 두세 달 입원하게 되었다. 김씨는 이를 두고, 담당 형사나 검사가 앙심을 품고 사람을 시켜 자기를 폭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동안 푼푼이 모은 돈을, 빌려주었다 떼이고 경찰관에게 상납하고 병원비를 대느라 거의 다 날린 김씨는 89년 12월 광주로 다시 내려왔다.

  김씨는 출소했을 때부터 자기를 지켜본 광주 갱생보호소 지정남 지부장에게 “서울은 무서워서 못살겠다. 광주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이니 광주에 있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정했다고 한다. 김씨의 주소지는 다시 광주 갱생보호소가 있는 광주시 북구 매곡동 54번지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김씨의 세계는 갱생보호소 생활관 맨 끝방인 9호실 1.5평으로 축소되었다. 자물쇠 고리가 하나 달린 베니어 합판 쪽문은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사회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인 침묵을 상징했다. 낮에는 갱생보호소가 광주시로부터 하청받은 청소 업체의 환경미화원으로 일했다. 밤에도 김씨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광주에 내려와서도 작은 사고가 있었다. 어느 날 작업을 하다 차에 부딪혔다. 김씨는 자기를 진단하고 요구하는 대로 진단서를 끊어 주지 않은 병원장을 10여 차례 고소했다. 주변의 모든 상황은 김씨에게 출소자 신분인 자신을 옥죄는 불합리로 비쳤던 것이다.

  올해 9월 추석을 전후해 좀 쉬고 싶다고 말하던 김씨는 죽기 한달 전 환경미화원 일을 그만두었다. 시체로 발견되기 전, 갱생보호소 동료들은 김씨가 왼쪽 손에 붕대를 감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사망 후 부검한 결과 김씨는 죽기 며칠 전에 손목 동맥을 끊으려 시도했다는 추정이 나왔다.

  갱생보호소에서 지낸 마지막 4~5년 동안 김씨의 고독과 단절은 완강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말했다. 천성이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품이라 주위와 어울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남 앞에 나서지도 않았다. 그에게 남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있어도 모르고 없어도 모르는 바람 같은 존재였다.

  김씨가 죽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던 경찰과 갱생보호소 직원 들은 김씨의 통장을 하나 발견했다. 통장에 들어 있는 금액은 1천26만원이었다. 빌려주고 떼인 돈과 경찰에 건네준 돈을 다 합치면 그가 생전에 번 돈은 2천만원이 넘는 셈이다. 이것이 그가 이 땅에 살다 갔음을 증명하는 가장 큰 자취이다.

  김씨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생전에 돈을 억척스럽게 모았다고 말한다. 아니, 돈을 모은 것이 아니라 쓸 줄을 몰랐다고 한다. 동료들이 농담으로 ‘노랭이’ ‘짠돌이’라 부를 정도로 자기를 위해서든 남을 위해서든 돈을 쓸 줄 몰랐다는 것이다. 보호소 관계자는 김씨의 지출이 기껏해야 한달에 5~7만원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생전에 쓴 가장 큰 돈은 의사를 고소하는 데 들어간 공증 비용이었다.

  김씨는 자기가 태어나서 출소하기 전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자본주의 사회의 생리를 어렴풋하게나마 피부로 느꼇던 듯 하다. 그가 긴히 쓸 데도 없이 맹목에 가깝게 돈을 모은 사실이 그것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김씨의 죽음 석연치 않은 면 있다”
  김씨는 왜 어두컴컴한 갱생보호소 독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보호소 지정남 지부장은 김씨가 10월26일 6·25 전쟁중 북한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창호 소위 보도를 보고 크게 심란해 했다고 전했다. 이미 전향해 버린 마당에, 이제 북한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를 비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광주 기독교교회협의회(NCC) 같은 광주 지역 인권운동 단체나 장기수 출신 동료들은 그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고 주장한다. 최근 미 · 북한 회담이 타결되어 장기수들이 남북 상황에 대해 희망을 갖는 분위기인 데다가, 그처럼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이라면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살았을 때 신앙처럼 여긴 저축금에 대해 아무런 유언이 없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경찰은 이같은 주장에 따라 김씨의 시신을 부검했다. 부검 결과는 아직 정식으로 통보되지 않았지만, 일단 목을 매 죽은 것에는 이견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부검을 마친 김시의 시신은 11월2일 그가 한국에서 사회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갱생보호소에서 출상했다. 김씨와 비슷한 처지인 장기수 출신 예닐곱 명과 광주 지역인권운동 단체 회원등 60여 명이 그가 떠나는 길을 지켜보았다. 김씨의 동료들은 김씨를 30만원자리 두꺼운 오동나무 관에 뉘였다. 수의도 두툼한 것으로 골라 입혔다. 살아서는 자기를 위해 돈을 써본 적이 전혀 없는 김씨지만, 저승 가는 길이라도 호강시켜 주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김씨는 평소 아주 친한 한두 사람에게만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같은 전향 장기수 출신인 박아무개씨의 부인이 “이제 고향 갈 생각은 말고, 다 잊고 여기 정붙여 살아야 되지 않겠냐”라고 했다가 김씨에게 혼쭐나기도 했다. 집 식구들이 다 북에 있는데 왜 이곳에 정을 붙이냐는 것이었다.

  김씨는 광주 망월동 시립묘지 제8 묘원에 뭍혔다. 묘지 번호는 1877호. 무덤 위에 입힌 떼는 자리를 잡지 못해 성기고, 남도의 황토가 그 사이를 메우고 있다. 김씨의 무덤에는 아직 비석도 서지 않았다. 식별을 위해 묘지 관리인이 소주병 안에 ‘8-1877 김문찬’이라고 써 넣은 쪽지만이 그가 잠든 자리임을 알려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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