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교육 의지’ 법원이 인정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2.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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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언어연구교육원 해직 강사들, 해고무효소송 1심 승소

지난달 30일 오후 1시즘 서울 종로구 운니동 구 덕성여대 구내 서울 한국어학당(원장 김정혜) 사무실에서는 갑자기 환호성이 터졌다. 이 학당에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5명의 선생님들이 지난 5월 연세대학교를 상대로 낸 해고무효소송 1심에서 승소했다는 연락을 담당 변호사로부터 받은 것이다.

원장인 김정혜씨 등 5명은 모두 연세대 언어연구교육원(구 한국어학당)에서 10년이 넘게 시간강사로 일해오다가 지난해 봄 갑자기 교육원측에서 계약을 취소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실업자 신세가 됐었다(《시사저널》 91년 5월2일자 보도). 교육원측에서는 계약해지 사유를 “근무성적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밝혔으나 이는 교육원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쉽게 수긍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이 교육원을 졸업한 외국인 제자들로부터 “한국어를 가르치는 데는 귀신 같은 선생님들”이란 찬사를 듣는 유능한 강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교육원측의 조처는 89년부터 시간강사협의회를 만들어 교육원 운영과 강사들의 처우개선을 꾸준히 요구해온 데 대한 보복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며 해고무효소송을 청구하고 근 8개월여 동안 법정투쟁을 벌여왔던 것이다.

해외 외국인 제자들도 ‘해직 선생님’ 격려
김정혜씨는 “이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해고되고나서 너무 답답해 법정에서라도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하려고 소송을 제기했을 뿐이다. 소송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 문제가 법정에까지 가서야 해결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는 법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상식으로 풀었어야 할 문제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씨 등이 승소하기까지는 주변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이들이 해고당하자 교육원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 시간강사들은 즉각 복직청원 서명과 소송비용 모금을 시작했다. 이 서명운동에는 이 학교 외국인 재학생 2백50여명도 참여했다. 동료 강사들이 1인당 20만원이란 적지 않은 돈을 흔쾌히 내어놓는 바람에 소송비용도 순식간에 8백만원이나 걷혔다.

스승의 해고소식을 전해들은 외국인 제자들도 서명운동에 합류했다. 일본 등지에 흩어져 있는 외국인 제자들은 서로 연락을 취해 2백여명이 연대서명한 복직청원서를 학교당국 등에 보내왔다. 이들은 또 선생님들에게 서투른 한글로 1백50여통에 달하는 격려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는데 개중에는 소송비용에 보태쓰라고 돈을 부쳐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복직청원 서명서와 편지 등은 나중에 법정에 참고자료로 제출됐다.

해직강사 이숙씨는 “일을 당하고 나서 우리는 정말 어쩔줄 몰라했다. 나중에는 학교측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는 정말 무능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10여년 동안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뛰어왔는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만약 동료들과 우리가 가르친 학생들의 도움과 격려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냥 주저앉아버리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소송에서 이겼지만 이들은 다시 교육원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한다. 그동안 뜻있는 후원자를 만나 그들이 가장 자신있고 가장 하고 싶어했던,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을 제대로 알려줄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같은 해직 강사인 손경숙씨는 “직장을 잃고 나서 우리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학생들 과외도 하고 번역일도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든 도무지 신이 나지 않았다. 할 일이 따로 있는데 엉뚱한 데서 힘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그래서 우리끼리 한국어학당을 꾸려나가기로 뜻을 모았는데 다행히 제때 우리를 이해하는 후원자가 나타나 뜻을 이룰 수 있었다”고 얘기했다.

이들은 “이름은 밝히기를 싫어한다”는 그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지난 1월15일 서울한국어학당의 문을 열었다. 현재 학생은 7명분 이지만 이들의 꿈은 상당히 크다. 앞으로 서울한국어학당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는 한국어교육기관으로 키워보겠다는 뜻을 가꾸고 있는 것이다.

“현재 외국인에 대한 한국어교육은 대개 대학 부설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각 대학이 너무 투자에 인색해 강사들은 이만저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별다른 교재도 없이 한국어를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연구도 하지 말고 그저 들어가 시간이나 때우라는 식이다. 연구하고 교재개발하고 하면 그만한 대우를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풍토에서는 국제화 사회에서 한국을 잘 알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서울한국어학당의 강사인 이종경씨의 말이다.

사설 한국어학당 세우고 연구에 몰두
이들이 현재 가장 주력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교재의 개발이다. 유신을 찬양하거나 특정지역 사람들을 비아냥거리는 그런 구태의연한 교재가 아니라 요즘 실정에 맞고 배우기 쉬운 교재를 개발하기 위해 10여년간 축적해온 경험을 서로 교환하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최근 뜻하지 않은 고민거리가 생겼다. 인가를 받으려고 구청에 찾아갔다가 현행 법규하에서는 사설 한국어교육기관의 인가를 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국어학원에 대한 규정이 따로 없이 때문에 외국어학원이나 입시학원에 적용되는 법 규정에 따라야 하는데 그러자면 시설비가 엄청나게 많이 들게 된다. 현행 법규에 따르면 입시학원이나 외국어학원 은 강의실 면적만 1백3평 이상을 확보해야만 인가를 받을 수 있다.

김정혜 원장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외국인에게 자국어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교사도 국가가 돈을 들여 키우고 자격증도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이 사재를 털어 교육기관을 세우려 해도 법규가 까다로워 어려운 실정인 것이다.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됐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분개했다.

“우리 문화와 언어를 바르고 정확하게 알리고 싶다”며 법정투쟁까지 불사하다 스스로 교육기관을 세우기까지 한 이들이지만 다시 암초에 걸려 방황하게 될지도 몰라 근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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