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고급차 시장 이동
  • 남유철 기자 ()
  • 승인 2006.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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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소형차 공략 호기


자동차 시장 판도 재편… 日 · 유럽 쇠퇘, 美 재기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미국의 데이비드 할버스탐은 미국 자동차산업의 몰락을 다룬 자신의 저서 《재심판》(The Reckoning)에서 집필 동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미국과 일본 어느 쪽에도 미국 산업의 침몰과 일본의 부상을 서술한 책이 없다는 게 내게는 이상했다. 두 나라의 역전 드라마를 보여주는 데 있어 자동차야말로 가장 적합한 상품이었다.” 이 책이 85년에 출간되자 미국의 경제 일간지 <월 스트리트 저널>은 “모든 미국 경영자에게 필요한 책”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강점만을 강조한 할버스탐은 세계 자동차시장의 판도가 그로부터 10년이 채 안돼 다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는 못했다.

“저것도 자동차냐”라는 미국인의 조롱을 받으며 도요타사가 크라운 자동차를 캘리포니아에 상륙시킨 것이 지난 57년. 그로부터 35년이 흐른 지금 일본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세계 자동차시장의 승자로 군림하고 있다. 일본제 자동차가 미국 거리에 홍수처럼 쏟아지던 지난 90년도에 미국의 시사 경제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일본의 도전 앞에 모든 선진국의 자동차산업이 몰락의 위기에 처했다”고 했다. 일본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당시 30%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특집 기사로 일본 자동차산업의 세계 지배를 우려한 《비즈니스 위크》도 불과 2년 후 일본 자동차산업이 갑작스런 쇠퇴를 맞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 자동차시장의 판도는 지금 놀라운 속도로 재편되고 있다. 성장가도만을 달리던 일본의 자동차 판매가 사상 처음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절치부심해온 미국의 자동차산업이 새로이 경쟁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세계 자동차시장의 90%를 차지하는 선진국 수요는 급격히 감소한 반면, 종래 자동차 수요가 거의 없었던 중남미와 중국 같은 제3세계 시장이 새로운 자동차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소비자의 욕구가 다양해지면서 자동차 생산방식도 단일 모델의 대량생산 방식에서 다양한 모델의 중 · 소량 생산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이런 국제적 환경 변화는 지난 91년 1백50만대 생산으로 세계 9위 자동차 생산국에 진입한 한국에게 새로운 도전과 독약의 기회를 동시에 부여할 전망이다.

도요타 세전 이익 40% 감소

한국자동차공업협회 李東和 국제담당 이사는 세계시장의 판도 변화에서 우선 주목할 점이 ‘막강 일본’이 후퇴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80년 이후 지칠줄 모르고 성장만을 거듭해온 일본의 자동차 판매와 생산은 작년에 사상 처음으로 감소했다. 올해에도 하향 추세는 계속되고 있다. 작년 일본 자동차의 국내 판매 대수는 전년에 비해 3.3%가 감소했고, 수출도 주요 시장인 미국 및 유럽에서 다같이 부진해 전년에 비해 1.3%가 감소했다. 지난 6월30일 결산된 도요타의 91회계연도 세전 이익을 보면 전년에 비해 무려 40%가 하락해 일본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충격을 주고 있다. 일본의 2위 자동차업체인 닛산도 올해 상반기에 엄청난 적자를 내 사상 처음으로 주주들에게 이익배당도 못했다. 영국계증권회사 바클레이스의 도쿄 지점에서는 일본 자동차산업을 분석하는 리차드 고씨는 “93년에도 일본 자동차의 판매가 호전될 전망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일본의 갑작스런 후퇴는 일본 자동차업체의 성장을 지탱한 환경에 변화가 일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장하기만 할 것 같았던 일본의 내수시장이 드디어 성장의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고, 일본에게 당하기만 해온 주요 경쟁국이 다시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기아경제연구소 朴基榮 사업연구2실장은 “일본 경쟁력의 비밀이었던 독특한 생산방식(lean production system)을 미국 기업이 배우면서 최근 경쟁력을 회복하고 있다”고 말한다. 미국의 경쟁력 회복은 제너럴 모터스(GM)가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소형차 시장의 공략을 위해 새롭게 만든 새턴의 판매 호조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새턴은 금년 7월 2만2천3백5대가 팔려 지난 17개월 동안 월평균 13.7%의 놀라운 판매 증가율을 보였다.

경쟁력 회복하는 미국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선진국 시장의 자동차 판매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전세계적인 불경기와 함께 선진국 수요는 이미 구조적으로 줄어드는 추세이다. 작년에 세계 자동차 생산은 전반적인 수요 감소로 전년에 비해 5%가 감소했다. 올해와 내년에도 주요 선진국의 자동차 판매는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유럽의 경우 작년의 판매량이 1천3백43만대였으나 올해에는 1천3백만대 이하로 떨어질 전망이다. 북미시장과 일본도 물론 전망이 밝지 않다. 반면에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지역은 생산과 판매가 급성장을 보이고 있다. 아시아에서의 수요는 올해 7.6% 성장에서 내년에는 8.4%로 뛰어오를 것으로 보인다. 경제 부흥을 보이고 잇는 중남미와 동유럽의 자동차 수요도 높은 성장율을 부일 전망이다.

세계시장에 일고 있는 환경 변화는 한국의 자동차산업이 제2의 도약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낙관적으로 평가한다. 쌍용경제연구소에서 지난 5년간 자동차산업을 분석해온 徐忠模  수석연구원은 “업계 안에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혼재되어 이고, 업계 밖은 ‘한국차로는 안된다’는 비관론 일색이다. 그러나 30년의 짧은 역사에 생산국 9위로 진입한 저력을 보면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쉬운 시점에 한국은 와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한국 자동차업체는 현대자동차가 미국시장에 진출해 잠시 붐을 일으킨 후 품질 미비로 세계시장에서 빠르게 밀려났다. 그러나 그 시기에 맞춰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내수시장 때문에 한국 자동차산업은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세계9위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내수 판매는 87년부터 90년까지 연평균 30%씩이나 증가했다. 그러나 작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한 내수 성장은 올해 15%대로 줄어들 전망이며, 앞으로는 더욱 둔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낮은 품질에 높은 가격의 차를 산 국내 소비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국내업체가 다시 수출시장에 도전해야할 시기가 닥쳐온 것이다.

내수 부진과 과잉 설비투자에 흔들리면서 일본은 중소형차에서 고급차로 재빨리 옮겨가고 있다. 종전의 판매량 확대보다는 이윤을 극대화 하겠다는 전략이다. 현대자동차 金鍾赫 수출계획부장은 “일본은 고급차로 독일과 싸우고 있다”면서 “일본이 독식해온 소형차 시장 진출의 적기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부장은 경쟁이 너무 치열해 이익이 적은 미국시장 보다는 유럽을 공략하는 것이 현대자동차가 생각하고 있는 90년대 수출 전략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마케팅에 돈이 너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쌍용경제연구소의 孫宗源 선임연구원은 “유럽시장은 늘어날 여지는 있으나 올해와 같은 큰 신장세는 앞으로 기대하기 힘들다”라는 견해이다.

유럽시장 공략하는 한국

유럽은 올해 들어 한국 자동차 수출의 최대시장으로 부상했다. 올 8월까지의 실적으로 볼 때 총 수출의 27.6%를 유럽이 차지했다. 작년에 유럽이 차지한 비중은 불과 14.3%였다. 김부장의 말처럼 유럽 공략에 사운을 건 현대는 한국이 유럽에 수출하는 물량 가운데 95%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시장이 한국의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년 같은 기간의 43.9%에서 올해 23%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고전해온 미국시장에서 이탈하면서 한국의 자동차업체들이 구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전략은 수출선을 다변화하는 것이다. 올 8월까지 중동지역의 수출은 작년 동기에 비해 3백%가 증가했고, 중남미 시장은 무려 3백51%가 늘었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의 이동화 이사는 “올해 들어 수출이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수출 다변화 전략의 결실”이라고 평가할 정도이다.

그러나 기아경제연구소 朴源莊 산업연구1실장은 “다변화는 좋은 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는 경우의 차선책일 뿐이다”라고 지적한다. 민간 경제연구소의 전문가들은 최소한 중소형차 시장에 관한한 미국이나 일본시장에 한국이 본격적으로 재진출할 수 있는 기반은 구축되어 잇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내수 위주로 커온 자동차업체들은 아직도 ‘편안한 시장’만 찾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서충모 수석연구원은 “지금 우리 기술로도 미국시장을 석권할 수 있으나 하겠다는 정신과 의지가 없다”고 안타까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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