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승계는내년 가을 이후”
  • 김춘옥 국제부장 ()
  • 승인 1992.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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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북한외교관 高英煥씨

북한 귀순자들로부터 듣고 북한 정세를 보도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른다. 우선 귀순자가 폐쇄된 북한사회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지 확실치 않은 까닭이다. 또한 싫어서 떠난 체제에 대한 이들의 평가는 부정일변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高英煥씨(39)가 작년 9월13일 첫 기자회견을 했을 때 우려는 어느 정도 씻겨졌다. 10여년간 외교관으로 해외근무를 했고(자이레와 콩고) 김일성의 불어 통역도 맡았던 고씨인지라 그가 말하는 ‘오늘의 묵한’은 설득력있는 논리를 갖추었다.

<파리 마치>지를 애독한다는 이유로 국가보위부에서 파견된 지구언과 다투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씨가 부인 김연옥(36)과 아들 경림(7)을 남겨둔 채 (딸 은정(9)은 평양에) 콩고를 탈출한 때는 작년 3월2일이고 서울에 온 것은 꼭 두달후였다. 통일이 되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 재주많은 전직 외교관으로부터 최근의 북한 정세를 들어본다.

그동안 어떻게 생활했습니까.
이제 막 서울 생활에 발을 붙이고 있습니다. 운전면허증을 두고와서 2월13일에는 운전면허시험도 볼 예정입니다. 남북한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만나자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운전면허 필기시험 준비할 시간도 거의 없습니다.

남한 학자들이 북한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봅니까.
약 90% 이상은 아는 것 같습니다. 논리적인 부분은 상당히 깊이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한 사람의 주관에 의해 움직이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그런 것은 귀신도 알 수 없습니다. 북한사회의 특수성이나 북한사람들의 가치관 세계관을 좀 이해하지 못한다는 느낌입니다.

지난 12월 김정일이 군총사령관이 된 것은 어떻게 보십니까.
나도 깜작놀랐습니다. 북한 외교관들은 북한사회주의헌법이 세계최고라고 자랑하며 다닙니다. 그 헌법상 주석이 군통수권을 쥐게끔 되어있지요. 번뜩 생각이 든 게 뭐냐면 김일성이 작년에 중국에 다녀온 뒤 등소평처럼 중앙군사고문위원회 같은 것을 꾸리려 하지 않는가, 중국식을 모방해 오진우 박성철 이종옥 백학림 이을설 등과 같은 구세대를 끌고 자신이 주임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 넘겨주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반 병사들이나 위관들은 김일성을 총사령관으로 생각해왔지만 장성이나 정치간부들은 이미 10년 전부터 김정일을 최고사령관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따라서 상징적인 의미 외에는 큰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김정일에게 넘겨주겠다는 의지를 가속화한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북한이 정상회담에서 어떻게 나올 것으로 보십니까.
89년 신년사에서 정치협상회의가 정상적으로 되면 정상끼리 못만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가 처음 나왔습니다. 그때 대사관에서 대리대사로 근무하면서 대사관 대변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본부에서 징침이 내려왔는데 기자들이 정상회담에 관해 물어볼 경우 “우리는 정상회담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활동한다”고 답변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외교관 내부참고사항에는 “우리는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될 시기가 아니라고 간주한다. 정상회담은 장래의 일이므로 서방 기자들이 꼬리를 물고 문의할 경우 깊이 대답하지 말 것”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89년의 입장보다 전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요컨대 남한정부와 인민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책략이 많이 숨어있다고 봅니다. 지금 상황에서 북측으로서는 정상회담을 준비할 조건이 성숙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같은 외교관이라도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천지개벽이나 되듯이 놀랄 것입니다. 북한의 절대다수 대중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항입니다. 북측이 얻으려는 기본 목표는 경제적 실리추구입니다. 북한이 미, 일과의 관계접근을 가장 현안으로 추구하고 잇는데 그 열쇠를 남한이 쥐고있음을 알고서는 정면돌파를 결심한 것 같습니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인사들을 통해 북한이 정상회담 의사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김일성이 말장난을 하는 듯합니다. 김우중회장에게 여러가지 말을 했다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대남비방을 계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남한측에 혼란을 주려는 목적인 것 같습니다. 북한은 남한이 아무때나 하자고 할 때 달려온다고 생각합니다. 정상회담이나 고위급회담을 자기식으로 끌고가려고 합니다. 북한이 회담을 하는 것은 남한으로부터 경제원조를 받고 미국과 일본 기업인을 끌어들이기 위한 간판일 분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간과 돈이지요.

정상회담으로 얻는 게 많을 텐데 말장난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순수한 남한식 시각일 뿐입니다. 북한에서는 어린아이에서 노인까지 미국 일본 남한과는 같이 살 수 없다는 것이 고정관념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북한에 변화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외부로 웃는 얼굴을 보이는 것만큼 속으로는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북한의 현실입니다. 항상 그 양면성을 전제로 북한을 판단해야 합니다. 북한은 항상 남한을 눈앞의 원수로, 힘이 생기면 쳐부숴야 할 상대로 간주합니다. 정상이 만나서 북한내부에 정치적 혼란이 생기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경제적 실리는 김우중회장을 만나는 식으로 얻을 수있으리라고 봅니다.

최근 북한 외교관들이 조기 정상회담을 바라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김용순의 발언 때문에 남한 언론들이 상당한 기대를 갖는 것 같은데 우리도 90년경에 외국에 다니면서 “통일문제 해결을 위해 정상이 만나야 한다”는 말을 해왔습니다. 주로 제3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말해서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그런 발언은 새로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북한이 유엔에 가입하고 국제사회에 나오는 이유는 단 하나, 경제사정의 악화 뿐입니다. 외교부 고위관리들이 사석에서는 모두 경제형편을 걱정합니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든 실무자들은 다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주민들의 동요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일은 가급적 피하려는 것이 북한정부의 입장입니다.

남한 언론이 조기 정상회담을 점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인가요.
북한이 회담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경제적 실리입니다. 북한형편이 지금보다 어려워지면 북한이 진정으로 정상회담을 하자고 나올 것입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저쪽에서 고위급회담 같은 공식통로를 통해 제의를 해 올 것입니다. 김우중 회장 같은 기업인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뭐가 다른 저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정일의 권력승계에 관해 추측이 만발합니다.
김정일은 70년대는 당 권력을 장악했고 83년까지는 외교와 정치사찰을 장악했습니다. 북한 권력의 약 90%는 김정일에게 넘어가 있고 일체의 인사권이 김정일에게 있습니다. 지금 김일성은 북한이라는 거상의 모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김정일에게 주석직이 넘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북한 논리대로 하면 당총비서직이 먼저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당대회를 해야 하고 그 1년 내지 8개월 전에 당중앙위의 구호나 붉은편지가 나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대적인 정치 ‘깜바니야’(캠페인)가 필요한데 아직은 그런 게 없습니다. 또 김일성의 생일을 앞두고 아들이 아버지의 주석직을 가져간다는 것도 북한사람들의 생각에 맞이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 생각으로는 생신상 차려준 다음 4월말이나 5월초에 공시가 나와서 10월에나 당대표자대회 등을 통해 올해 안에 총비서직이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내년에 3차 7개년계획이 끝나면 당대회가 있어야 합니다. 7차 당대회와 당총비서선거와 주석직선거도 내년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변정세가 급격히 변하다 보니 당총비서직 승계는 금년 10월에라도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근거에서 적어도 내년 10월까지는, 6공이 끝나는 날까지는 노대통령이 만날 상대는 김일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일이 장악하지 못한 나머지 10%는 어떤 부분입니까.
가장 기본적인 건, 중국 일본의 원로지도자와의 외교, 국내적으로는 농업정책 등을 김일성이 쥐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여러번 ‘내가 농업사령관이다’라는 말을 했고 올해 신년사에서는 ‘대농의 해’라고 정하기까지 했습니다.

김정일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면 북한이 어떻게 변한다고 보십니까.
김정일이 조만간 모든것을 장악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나 사실입니다. 그 후 군부나 정계에 어떤 변화가 올것인가. 나는 기본적인 변화는 다 일어났다고 봅니다. 내적으로 이미 중진 이상 인사를 모두 측근으로 꾸려놓았습니다. 물론 박성철 이종옥 백학림 이을설 등은 모두 물러나겠지요. 초점은 북한 대내외정책의 변화입니다. 좋은 부분부터 찾아보면 50세 젊은 나이인만큼 혹시나 개혁개방이 가속화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바람이지요. 젊은 테크너크랫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중국식 개혁개방을 할 수도 있습니다. 부정적 전망을 해보면 이게 가장 가능성이 크지만, 그의 유년시절에 뒤틀린 성격, 타인에 대한 불신과 선입감, 성격의 불안정성 등을 보면 북한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점쟁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김정일은 스탈린과 히틀러를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히틀러에게 간단명료한 보고를 한 칼텐부르너라는 사람이 있는데 김정일이 국가보위부원들에게 “당신들도 칼텐부르너처럼 일하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이는 히틀러를 숭배한다는 말이지요. 히틀러의 《나의 투쟁》도 다 읽었다고 합니다. 또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을 영도한 쥬꺼브 장군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가미할 것은 그가 매일같이 술마시고 포카놀이하고 스트립쇼 보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과는 다르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김정일이 나오면서부터 횃불시위가 생겼어요. 이는 나치의 돌격대를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그가 집권하면 김일성 때보다 돌발적인 상황이 훨씬 많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급격한 정책전환도 심해질 것이고 북한이 어느정도 고립되느냐에 따라 제2의 6.25가 발생할 가능성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것입니다. 미국이나 일본과의 관계는 지금보다 더 활발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김정일이 대부분의 결재를 담당하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요.
80년대 초, 김정일이 권력집중의 명분으로 내세운 게 바로 그겁니다. “골치아픈 일은 전부 나에게 가져오라”고 하면서 하나하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김일성도 그걸 다 알고 있으며 “이제 내가 조직비서 대문에 마음이 편하다”고 말합니다.

유엔을 중심으로 한 외교 다변화는 어떻게 될 것으로 보십니까.
북한은 유엔을 크게 두가지로 활용할 것입니다. 첫째는 일종의 보복심리입니다. 즉 남한측에서 “유엔에 들어오면 통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보자는 식의 말싸움은 오히려 많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남한의 공해문제에까지 애를 먹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적 선전장으로 이용하리라는 것은 거의 명백합니다. 또 유엔개발계획(UNDP)이나 세계식량농업기구(FAO) 등과 같은 국제기구에서 더 많은 원조를 유치하기 위한 기회로, 그야말로 ‘화를 복으로’ 만드는 데 이용할 것입니다.

북한외교관들의 자질은 어떻습니까.
물론 사람 나름이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60년대만 해도 외교의 ‘ㅇ’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외교관으로 나갔는데 지금은 ‘외ㄱ’정도의 수준은 됩니다. 북한 내부사정과도 관련이 되는 게 60~70년대까지만 해도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근무하는 당일꾼을 가장 선호하고 신임이 높았는데 80년대 후반에 들어 당일꾼보다 외교관을 더 선호합니다. 왜냐하면 외국을 구경할 수 잇고 달러를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심정은 어떻습니까.
붉은 포도주를 매일 밤 한잔식 마시고 잡니다. 취할 만큼 마실 줄은 몰라요. 향수병은 이제 많이 치유됐습니다.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난해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입니다. 이제 그럭저럭 지낼 만합니다. 원래 독서와 음악감상을 좋아하는데 마음이 안정되어야 이것도 하지 요즘은 그러지도 못합니다. 배드민턴이나 탁구도 좋은데 상대가 없으니 하기 힘듭니다. 취미생활은 없는 셈이죠. 음악은 차이코프스키나 베토벤을 듣고 책은 불어소설을 몇권 사서 읽고 있습니다.

이곳에 와서 실컷 운 적이 있나요?
두번… 펑펑 울어봤습니다.

남한의 흉 좀 보시지요.
눈에 좀 거슬리는 것은 골목길이나 거리가 깨끗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당에 감녀 너무 버리는 음식이 많아요. 자원낭비도 되고 냄새도 심합니다. 잘살기 대문에 그런 것 같은데, 사실 잘살면 얼마나 잘삽니까. 그래봐야 국민소득 6천달러 수준인데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 생각입니까.
통일된 후에는 외교관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12살때부터 키워온 꿈입니다. 통일되기 전에는 북한과 관련된 연구소에서 조금이라도 도움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몇군데에서 권유를 받고 있는데 아직 결심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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