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는 세계적 정치 구호인가
  • 남유철 기자 ()
  • 승인 1994.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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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경제 불안감 해소할 목적으로 이용…“경제학자 거짓 논리 전파에 대중도 솔깃”



  미국에서 ‘경쟁력’ 혹은 ‘국가 경쟁력’ 이란 말이 경제 정책의 주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이었다. 일본이 미국에 수출 총공세를 시작하던 시기이다. 미국은 80년대 후반부터 장기적인 침체기에 들어서자 위기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경제적 불안감에서 비롯된 미국민의 위기 의식은 ‘강력한 미국’을 외친 공화당의 레이건에게 집권 기회를 안겨주었다.

  레이건이 국민에게 내놓은 경제 정책은 이른바 ‘공급주의’였다. 공급주의는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가 있는 감세를 정당화하는 경제 논리이다. 세금을 줄이면 근로 의욕이 살아나 경제가 더 활성화하고, 그 결과 정부도 세금을 늘릴때보다 오히려 더 많이 거둘 수 잇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결과는 연방정부의 천문학적인 재정 적자였다. 세금 감면을 위해 사회복지다 줄어들다 중산층과 저 소득층의 고통은 더욱 커졌다. 그 결과는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집권으로 나타났다.

“기업의 경쟁 논리, 국가 차원에서 적용하는 것은 잘못”
  무역 이론에 권위를 가진 폴 크루만 교수가 <경제 사기꾼들>을 집필하기 시작한 때는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공급주의 경제 정책의 허구성과 정치적 동기를 파헤치는 것이 최초 목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집필중 클린턴이 집권하자 그는 집필 방향을 다소 바꾸게 되었다고 밝혔다. 국가 경쟁력 강화를 앞세운 클린턴의 ‘전략적 통상 정책’도 공화당의 공급주의와 같은 사이비 경제학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중을 쉽게 속일 수 있다고 해서 거짓이 국가 정책을 주도하는데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고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강조했다.

   크루그만 교수는, 정치인이 국민에게 내놓기 쉬운 ‘경제 답안’을 찾기 때문에 이러한 정치적 수요에 부응하는 사이비 경제학자들이 나타난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름까지 일일이 거명해 로버트 라이크 노동장관, 이라 매가지너 백악관 정책고문, 그리고 <세계경제대전>으로 돈방석에 오른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레스터 서로 교수를 ‘경제 사기꾼’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크루그만 교수의 주장은 미국의 국내 정치와 그 속에서 전개되는 경제 정책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가 국가 경쟁력 개념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은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국가 경쟁력 강화’ 가 오늘날 정치인들에게 가장 입맛 당기는 정치용 구호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유수의 경제 연구소들도 개념에 대한 정확한 규정도 없이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 보고서를 쏟아내고 있다.

  크루그만이 국가 경쟁력을 부정하는 논거는 의외로 단순하다. 기업에 적용되는 경쟁 논리가 국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 근거로 국가 간의 무역은 ‘적대적인 경쟁 행위가 아니라 호혜적인 행위’라는 무역 비교우위론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 자동차회사들의 성공은 상대적으로 미국 자동차회사들의 실패로 이어지는 적대적 경쟁관계이지만, 미국과 일본의 국가 경제는 (비록 그 혜택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무역을 통해 서로 이익만을 향유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역=경쟁’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그는 강조한다. 크루그만 교수는 ‘세계화’와 같은 국제 무역의 확대 현상도 정치적 필요에서 강조되는 ‘무지막지한 과장’이라고 신랄히 비판한다.

  크루그만 교수의 주장에 대해 반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국가 경쟁력 개념을 너무 좁게 해석했다는 것이 반론의 주종을 이룬다. 국제 전력문제 연구소 어니스트 프리그 연구위원은 국가 경쟁력이 오늘날 각국의 경제 정책 논쟁에서 크루그만이 규정한 것보다 훨씬 폭넓고 다양한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크루그만 교수가 국가 경쟁력 논리의 핵심을 가장 탄탄한 경제학적 논거로 공박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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