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시대에 저항한 피고 51명과 변호사
  • 김훈 부장 ()
  • 승인 1994.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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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훈의 독서산책 /한승헌 변호사 회갑 기념 문집·사건 실록

 韓勝憲 변호사의 회갑을 맞아 그가 변론을 맡았던 시국 사건 피의자들이 한 변호사와 함께 겪은 법정 체험기와 사건 실록을 역은 <分斷侍代의 彼告들>이 범우사에서 나왔다.

  이 책은 지난 30여 년 간 군사 통치를 통과해 나오면서 한변호사와 함께 치러낸 자유화 투쟁의 고난 속에서 맺어진 많은 벗들이 한 변호사에 대한 추억을 엮은 <한 辨士의 肖像>과 함께 그의 회갑 기념 문집으로 봉정되었다.

  <분단시대의 피고들>에 등장하는 한승헌 변호사의 ‘피고들’은 51명이다. 그 명단과 그들을 법정으로 몰고간 사전 목록은 30년 군사 통치에 대한 저항과 자유화 투쟁의 한 역사이다. 그 피고인들은, 남정현(소설 <분지> 필화 사건) 이응로·박인경(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박성준(통혁당 사건) 김지하(담시 <오적> 필화 사건) 임증빈(월간 <다리> 필화 사건) 윤형두(김대중 회고록 출판 사건) 서 승(재일 한국인 모국유학생 간첩 사건) 김상현(유신 반대 야당 의원 구속 사건) 고준환(동아방송 보도 필와 사건) 박형규·권호경(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 백기완(긴급조치1호 구속사건) 이해학(긴급조치 1호 성직자 구속 사건) 김동완(유신 반대 내란 음모 사건) 이성희(울릉도 간첩단 사건) 임헌영(문인 간첩단 사건) 정상복(민청학련 사건) 김동일·김찬국(긴급 조치 4호 위반 사건) 이원달(박영복 부정 대출 사건 보도 필화 사건) 김대중(야당 대통령 후보 선거법 위반 사건) 조승혁 (기독교 사회문제연구원 사건) 허병섭(노래 가사 바꾸어 부르기 사건) 윤재철·송기원(‘민중교육’ 사건) 오태영(부천경찰서 성고문 규탄대회사건) 장영달(광주 희생자 추모식 사건) 이돈명(이부영 은닉 위장 사건) 고영근(목요기도회 설교 사건) 정도상(전부대 총학생회 사건) 윤 용(고려대 신문방송연구소 사건) 김주언·김태홍·신홍범(보도지침 폭로 사건) 권중이(안두희 응징 사건)· 김병오·유시춘(6월 민주항쟁 사건) 이상호· 전정호(민중 미술 탑압 사건) 임정호(국회 공부원 집단 면직 사건) 이재오(안동 미사 인권 강연 사건) 고 은(남북 작가회담 추진 사건) 리영희(<한겨레 신문> 방북 취재 기획 사건) 문익환·유원호·임수경·문규현·황석영(방북사건) 이승환(한국 근현대 민족해방운동사 사건) 김근태(전민련 창립 사건) 박순경(기독교와 민족통일 강연 사건) 김락중(간첩 사건)등이다.

인간의 자유를 위한 싸움
  시국 사건 한 건에 수명씩 피고인이 연루되어 있었으므로, 한승헌 변호사의 피고인들 숫자는 열거되 범위를 훨씬 넘는다. 한변호사의 이 수 많은 피고인들은 ‘국토 분단’이라는 동일한 비극의 맥락으로 이어져 있다.

  사건 실록인 <분단시대의 피고들> 속에서 피고인들은 법의 형식 그 너머에 있는 삶의 정의를 지향하고 있다. 대체로 그들의 싸움을 탈법적이거나, 법의 현실 구속력에 구속되지 않으려는 싸움이다. 그리고 그 싸움을 뒤치다꺼리하는 한변호사의 싸움은, 법을 뛰어넘으려는 싸움이기는 하지만, 법의 테두리안에서 이루어지는 싸움이다. 피고인들의 싸움은 탈법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결국은 법의 구속력 안에 갇히는 싸움이고, 한변호사의 싸움은 법 안에 이미 부여된 힘으로 법의 구속력을 풀어헤치려는 싸움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법의 구속력 너머에서 숨쉬는 인간의 자유가 여전히 합법적 자유임을 입증하려는 싸움이다. 피고인들의 길과 한승헌 변호사의 길은 그렇게 방향이 다른 길이다. 피고인들은 아직 도래하지 않는 미래를 출발점으로 삼아 길을 떠난 뒤 결국 현실의 덫 속으로 끌려 들어와 있고, 한변호사는 현실의 덫 속에서 출발해서 그 덫에 걸려 있는 피고인들과 함께 미래를 지향한다.

  <분단시대의 피고들>은 그처럼 방향이 다른 피고인과 변호사의 길이 한데 어우러지던 군정 30여 년의 법정 모습을 사건 별로 엮어 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책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들은, 피고인의 길과 별호사의 길이 법의 울타리 안에서 한데 합치면서 ‘합법성’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들이다. 한변호사는 볍의 힘으로 법의 울타리를 조금씩 조금씩 넓혀 나감으로써, 이미 법의 밖으로, 미래로 튕겨져 나간 피고인들에게 ‘합법성’을 부여한다. 그 합법성을 향한 전진이 성공할 때 피고인들은 무죄이거나 혹은 이런저런 구실을 붙인 석방이괴, 그 진전이 좌절될 때 피고인들은 장기 복역이라는 형을 받게 된다. 합법성을 향한 진전이 좌절될 때, 검찰과 변호인이 싸우는 모습은 무내용하고도 무의미하다. 그때의 싸움은 진실의 실체에 관한 싸움이 아니라, 그 진실의 실체에 관해 이해 관계가 있는 자들의 정치적 입장에 관한 싸움에 불과하다. 그때의 싸움은 싸움 그 자체로서 이미 타락한 싸움이고, 타락한 싸움은 그 싸움에 동원되는 모든 언어를 다시 타락시킨다. 그때 재판은 재판정에 끌려와 묶여 있는 피고인의 행위의 진실을 재단하지 않고, 재판정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권력의 뜻을 재단한다. 한승헌 변호사의 피고인들의 싸움은, 미래에 실현될 의미나 가치들을 앞당기기 위한 싸움이지만, 한변호사의 싸움은 현세의 법정에서 벌어지는 무의미들과의 싸움이다.

급소 찌르는 법정 ‘선문답’
  <분단시대의 피고들> 속에서, 피고인들의 여러 가지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한승헌 변호사의 법정 변호인 신문의 급소는, 정연한 법 논리를 전개할 때보다는 그가 그 법정의 무의미와 무내용을 폭발적으로 노출시켜 버리는 대목들이다. 그럴 때 한변호사의 변호인 신문은 거의 선문답에 가까운 파괴력을 행사하면서 세앙의 무의미를 번개치듯 드러내 버린다. 김지하 피고인의 기술에 따르면, 김지하를 변호인 신문하던 한변호사와 피고인 김지하와의 법정 문답의 서두는 다음과 같았다. 그 문답의 언어적 특징은 간결함에 있다.
변호사 : 피고인은 공산주의자 입니까?
피고인 : 아닙니다
변호사 : 그럼 왜 이런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까?
피고인 : 모릅니다.
  그 문답 속에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제도의 무의미를 겨누는 칼 끝이 숨어 있다.
  문민화했다는 세상 속에서 그는 회갑을 맞이했지만, 문민화한 세상 속에서도 그의 일은 끝도 없이 남아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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