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사회, 성차별 심해진다
  • 김상현 기자 ()
  • 승인 1994.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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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의 대량 보급과 함께 정보화 시대로 돌입했다는 것은 ‘근육’이 중요했던 시대가 종결됐음을 뜻한다. 근육의 효용성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된 시대는 사회 활동을 하고 있거나 새로 시작하려는 여성에게 장밋빛 꿈을 키워준다. 여성은 더 이상 남성과 체력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된다. 컴퓨터를 잘 활용할 줄만 알면 남성과 당당히 경쟁할 수 있으며, 오히려 여성이 우위에서는 사회가 올지도 모른다. 많은 미래 학자들이 2000년대를 ‘여성의 시대’로 예측하는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명애씨(33·서울시 방배동)는 며칠 전 2년 남짓 해오던 재택 근무를 포기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전산학을 공부하고 한 중소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에 취직했던 이씨는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5년 동안 직장에서 쌓아온 컴퓨터 기술을 썩히기가 너무 아까워 집에서 일을 해왔다. 주로 경리·재고 관리·판매에 관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씨는 재택 근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한다. “집안 일이며 아이 돌보는 일이 고스란히 내 몫으로 남은 상황에서 가욋일을 한다는 게 무리일 줄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어려울 줄은 몰랐다. 프로그램 짜는 일은 적어도 몇 시간씩 집중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집안 일은 그렇다 쳐도 아이를 몇 시간씩 버려 둘 수는 없었다.”

컴퓨터는 남성 전유물 … 정보 불평등 조장
흔히 정보화 사회의 수준을 재는 잣대로 등장하는 PC 통신도 이 예측에 의문을 던진다. 이미 가입자 수가 50만명을 넘었지만 이 가운데 여성 가입자는 전체의 10~15% 정도밖에 안된다. 김옥순씨(38·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는 “PC 통신에서 보듯이 컴퓨터가 남성의 전유물처럼 인식되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정보를 얻거나 제공하는 기회의 불평등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른 남녀간·계층간 불평등은 엄청날 것이다”라고 말한다.

PC 통신 이용자의 대다수는 정보 습득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정보가 곧 재화인 정보화 사회에서 이같은 정보의 편중은 산업사회 이전에 나타났던 교육 불평등보다 더욱 심하게 남녀 차별을 일으킬 수 있다는 얘기다.

컴퓨터가 양육과 일을 겸해야 하는 여성의 가사 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준다는 예측 또한 국내에서는 섣부르다는 반박에 직면한다. 여성의 여가시간이 많아지고, 취업 기회가 늘어난다는 전망 또한 마찬가지이다.

조혜정 교수(연세대·사회학)는 <정보사회연구>(90년 봄호)에 발표한 논문 ‘정보자본주의와 여성’에서 ‘정보 사회에 대한 그동안의 논의는 대부분 낙관적 기대와 동경 일변도로 진행돼 왔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한 논의는 과학 기술에 대한 사회적이고 총체적인 논의를 생략한 채 개별 과학 기술의 특성과 유용성만을 논의하는 쪽으로 몰고 가는 폐단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두렵고 낯선 ‘기계’
특히 거센 비판을 받는 부분은 정보화 사회가 남녀 간의 성차별을 개선하리라는 예측이다. 현재의 사회 체제상 정보에 접근하거나 정보를 얻는 데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성차별적 특성을 지나친 채 단편적 기술에 의지해 현상을 단순화했다는 지적이다. 대다수 주부에게 컴퓨터는 여전히 두렵고 낯선 ‘기계’일 뿐이다. 아이들 교육에 꼭 필요하대서 사주기는 했지만, 어떻게 켜고 끄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컴퓨터=교육용, 컴퓨터=기계라는 잘못된 인식을 먼저 바꾸지 않는 한 바람직한 정보화는 요원하다고 한국정보문화원 백석기 실장은 말한다.

‘컴퓨터=교육용’이라는 인식은 특히 주부들의 머리 속에 강하게 박혀 있다. 아이가 컴퓨터를 싸안고 방안에서 나오지 않아도 대다수 주부들은 혼자 공부하는 것이려니 여기고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방안에 틀어박히는 아이의 80% 이상이 게임에 빠져 있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음란 디스켓을 몰래 보게 되는 ‘반교육적’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컴퓨터=기계’라는 인식의 뿌리 또한 매우 깊고 완강하다. 그것은 컴퓨터를 사실상 처음 배우게 되는 국민학교에서 시작된다. 국민학교 1학년에 다니는 아들을 둔 안소애씨(35·한국여성정보인협회)는 지난 스승의 날 1일 교사로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쳤을 때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한다. 안씨는 이 날 한국증권전산, KDI 전산실 등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컴퓨터를 신체 각 부위에 견주어 가며 아이들이 지루해 하지 않도록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남자아이 25명은 대부분 무척 즐거운 표정으로 그의 설명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눈치였다. 이들 중 15명은 이미 조금이라도 컴퓨터를 다루어본 적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에 비해 여자아이들의 반응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여자 아이 25명 가운데 관심을 보인 아이는 서너 명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아이들은 몸을 비비꼬면서 지루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들이었다”고 안씨는 놀라워했다.

백석기 실장은 이에 대해 “컴퓨터=기계라는 인식과, 기계 만지는 일은 남자들의 몫이라는 인식이 어릴 때부터 형성된 탓이다. 그것을 바꾸지 않는 한 여자가 컴퓨터에게 느끼는 거리감과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부모들이 딸에게 컴퓨터를 사주는 일이 드문 현실의 이면에는 ‘컴퓨터는 곧 기계이고, 따라서 남자들의 물건’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사정도 결코 다르지 않다.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부설 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국민학교 1학년생들은 남녀간의 차이 없이 컴퓨터 프로그램에 흥미를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6학년에 가면 관심 있는 남자아이의 수가 여자아이보다 두 배로 늘고, 그로부터 3년 뒤에는 관심 있는 학생의 80%가 남자라고 한다.

여성적인 오락 게임 거의 없어
그렇다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컴퓨터 교육 방식이 특별히 남녀를 구분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컴퓨터를 다른 과목 가르치듯 획일적이고 개별적으로 가르친다는 점이다. 여자아이들이 컴퓨터와 일렬로 배치돼 혼자 문제를 풀어가는 상황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 결과에서 제기되었다.

아이들이 컴퓨터와 친숙하게 되는 가장 큰 계기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게임도 마찬가지이다. 게임용 소프트웨어는 매달 20~25개씩 쏟아져 나오고 현재 유통되는 것만 2천여 가지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가운데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놀 만한 제품은 전혀 없다시피 하다. 총을 쏘고, 칼이나 폭탄을 던지고, 적을 뒤쫓아가거나 찾아내어 죽이는 식의,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해온 게임을 단순히 확장·변형하여 프로그램화한 것이 대다수 컴퓨터 게임의 내용이다. 이러한 현실은 여자아이들이 컴퓨터에 친근감을 느낄 기회를 원칙적으로 박탈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반대 논리도 성립한다. 컴퓨터 게임에 대한 여자아이의 수요가 남자아이의 그것보다 현격히 낮아서 여자용 게임 소프트웨어가 공급되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는 얘기이다.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이 일본의 컴퓨터 게임 개발 업체인 닌텐도사로부터 의뢰 받아 연구·발표한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연구 주제는 ‘왜 여자아이들이 컴퓨터 오락을 좋아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이었다. 이에 대해 MIT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남녀간의 선천적 속성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남자는 본능적으로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높고 모험을 즐기는 반면, 여자는 안정적이고 낯익고 예측 가능한 것을 좋아하며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속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 비현실적이고 변화 무쌍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컴퓨터 오락에 여자아이들이 거부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는 결론이었다.

김명관 교수(서울보건전문대·전산정보처리학)는 “대학 신입생이나 2학년생에게 물어보면 70% 이상이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남학생은 거의 자기 것인 반면 여학생은 그렇지 않다. 집에 있는 컴퓨터는 남동생이나 오빠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라고 사정을 말했다. 전산정보처리학과로 좁혀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컴퓨터 ‘고급’ 사용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과 전체에서 10%를 넘지 못하는데, 여학생은 그 10% 중에서도 1~2%밖에 안된다고 한다. “가끔 눈에 띄는 여학생들도 컴퓨터 전반에 대해서가 아니라 한두 학과에 특화된 습득력만 뛰어난 경우가 많다”는 것이 김교수의 설명이다.

컴퓨터와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남녀간 인지 성향의 차이는 또 있다. 여성이 주체적 인간 관계를 통해 자아정체성을 확립하는 반면 남성은 타인과 거리를 둠으로써 ‘위치적’ 정체성을 갖게 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컴퓨터를 대하는 태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여자아이들이 일반적으로 구체적 작업에 몰두하는 반면 남자아이들은 이보다 도전적이고 이론적인 부분에 몰두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조혜정 교수는 말한다. 여자아이들이 부적합한 것을 가려내고 실제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것을 즐기는 반면 남자아이들은 실제 상황과는 거리가 먼 변수를 조작하기를 즐긴다는 것이다.

정보 분야 진출 여성, 단순직 근무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줄 것은 오직 기술밖에 없습니다’라는 광고 문구가 당당하게 등장하리만큼 한국은 과학 기술의 진보에 압도적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전형적인 ‘남성 중심의 정보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한백연구재단 이은숙 연구원은 “현재 상태로는 미래사회가 여성들의 사회가 되리라는 아무런 징표도 없다”라고 말한다. 47%에 이르는 한국의 취업 여성은 대부분 1차산업과 가내공업·자영업 종사자이며, 그 나머지 직장 여성의 90%를 차지하는 핑크칼라 역시 컴퓨터가 등장한 뒤 급속히 사라지는 추세이다. 여성들은 인내심이 많고 손놀림이 빠르다는 이유로 단말기 앞에서 반복적 조작을 하는 노동력으로 환영받는다. 따라서 컴퓨터·정보 서비스 분야에 대한 여성 진출이 는다 해도 대부분 단순 정보 입력 부문에 그칠 공산이 크다.

‘명예 남성’의 범주에 드는 예외적 여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남자 동료들과 똑같이 일에 몰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들은 잦은 초과 근무나 밤샘도 감수해야 한다. 컴퓨터 관련 업종이 지닌 경쟁적이고 확장주의적인 성격 때문이다. 이것은 첨단 기술 분야에 대거 진출하여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여성이 꿈꾸는 근무 조건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결혼·출산과 함께 여성들이 이·퇴직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안소애 씨는 그러한 맥락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짤 때 여성은 센스 있고 세밀하며 꼼꼼하지만 프로그램 전체 구조를 그리거나 기획하는 면에서는 남성에게 뒤진다’는 일반적 평가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5년, 10년씩 프로그램 짜는 일만 해온 남자들과, 잦은 이·퇴직으로 그만큼 경험을 쌓을 수 없는 여자들을 수평 비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남녀간의 성별 격차와 위계 서열화는 정보화 사회에서도 여전히 온존하며, 현재와 같은 정보 편중이 지속되는 한 기존의 성별 격차는 오히려 더욱 두드러지리라는 것이다. 김옥순 씨는 이에 대해 “한국이라는 산업 사회가 지녔던 가부장제적 남녀 불평등 구조 위에 급속히 발전하는 과학 기술만이 덧씌워진 결과”라고 진단한다. 정보화 사회의 환상만 있을 뿐 현실 사회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는 것이다. 김씨가 그에 따른 대안으로 가장 강조하는 것은 ‘교육 개혁’이다. “2000년대를 앞둔 정보화 사회에서 아이들은 이미 21세기를 향해 가고 있는데, 이들을 가르치는 방식은 여전히 대량 생산 체제에 맞춘 산업사회의 획일적 교육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개개인의 다양한 능력을 살려주는 컴퓨터 교육을 모색해야 한다.” 컴퓨터 게임용 소프트웨어 내용을 바꾸고 오락 기능을 교육에 적극 도입해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즐겁게 하는 공부)화 하려는 노력 또한 매우 중요하다.

멀티 미디어, 초고속 정보통신망, 전자공동체 등으로 묘사되는 정보 사회는 아직 진행중이다. ‘정보화’사회라고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흔히 거론하는 대로, 정보 사회는 과거 어떤 사회 체제보다 여성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컴퓨터를 말이나 몸짓으로도 쉽게 다룰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하는 상황에서, 여성이 기계 조작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도 곧 사라질 것이다. 여러 컴퓨터 기업이 최근 추진하기 시작한 ‘홈 PC', 즉 가족용 PC 사업은 주부가 정보에 접근할 기회를 획기적으로 늘려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꿈의 시대’를 받치고 있는 이 사회 체제와,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과학 기술의 진보를 미처 따라잡지 못한다는 데 있다. 과학 기술 개발과 함께 그러한 문화 지체 현상에 대한 분석과 성찰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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