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不況과의 월남전
  • 샌프란시스코·남유철 기자 ()
  • 승인 1992.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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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최악 경기침체 2년째…세계경기회복에 먹구름

 관광과 낭만의 도시 샌프란시스코에도 미국 경기침체의 한파는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고급 패션가인 필모어에서 꽤 알려진 중국음식점 ‘第一湖南’의 지배인은 “정확히 얼마나 손님이 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기침체로 매출이 상당히 줄었다”고 울상을 지어 보였다. ‘저팬타운’의 인기있는 한 가라오케 바도 손님으로 붐벼야 할 금요일 저녁 텅 비어 있었다.

 하루 평균 2천6백명이 일자리를 잃는 불황의 수렁 속에서 미국인들이 외식과 소비를 삼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두 해가 넘도록 지루하게 계속되는 ‘전후최악’이라는 미국의 경기침체. 미국인들은 ‘나도 언제 실직할지 모른다’는 심리적 위기감에 이제는 지친듯이 보인다. 도대체 경제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거리에서 만나는 보통 미국인들이 요즘 한결같이 던지는 질문이다.

 미국에서는 보통 6개월 이상 경제성장률이 하강할 때 경기침체(Recession)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현재의 경기침체가 시작된 것은 정확히 90년7월. 그 이후 끊임없이 회복전망들이 나왔으나, 정작 경기가 반등되고 있다는 결정적 경제지표는 아직 없다.

 지난해 4/4 분기 미국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겨우 0.3% 에 그치는 초약세였다.(도표 참조)

내수는 계속 줄고 공장재고는 계속 늘어나는 가운데 전문가들의 올 1/4 분기 전망은 역시 어둡기만 하다.

지난해 4/4분기 경제성장 0.3%
 경제지표만으로는 누구도 미국 경기의 전망을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 올해들어 미국의 경기는 “또 다른 침체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지, 초약세 회복의 느린 과정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시카고 상업은행 노던 트러스트의 주임 경제학자 로버트 디더릭씨는 말한다.

 “설사 경기가 회복국면에 들어섰다 해도 2~3년에 걸친 아주 더딘 회복이 될 것”이라는 게 미국 언론에 자주 인용되는 디더릭씨의 전망이다.

 작년 한해에만도 미국 전역에서 실직을 경험한 사람은 2천 5백만명. 미국 전체 노동인력의 20%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IBM이나 제록스 같은 견실한 기업들에까지 감원열풍이 불어닥친 지금, 얼마까지만 해도 인기절정을 구가했던 부시 대통령은 11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취임 이후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걸프전 승리 당시 80%를 넘는 지지도를 기록했던 부시의 인기는 최근 40%까지 떨어졌다. ‘경제정책 부재’라는 신랄한 여론의 비난 속에서 궁지에 몰린 부시 대통령은 1월 28일 이례적으로 의회 연두교서에서 세금감면과 국방비 삭감을 골자로 하는 경기 부양책을 발표했으나 여론의 반응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카페에서 우연히 자리를 함께한 케빈 바치라는 30대 간판업자는 “도대체 무엇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길래 경기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냐”고 부시의 경기 부양책에 일침을 놓았다.

 미국의 유력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도 최근호 사설에서 일시적인 불황 타개책보다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 강한 미국경제 재건을 위한 ‘경제 비전’을 제시하라고 되받아쳤다.

 점점 거세지는 실업의 돌풍이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는 가운데 부시 행정부가 해결해야 할 시급한 당면과제는 당장의 인기회복을 위한 고용의 증대. “실직자에게 세금공제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뉴스위크의 한 기자는 최근의 TV대담프로에서 꼬집었다.

 미국의 현재 실업률은 7.1%. 통계만으로도 85년 이후 최악의 실업률이다.(도표 참조) 뉴욕의 비영리 경제조사기관인 컨퍼런스 보드에 의하면 작년 한해 평균 네 가구 중 한 가구에서 실직자가 나왔다고 한다. 일자리 찾기를 아예 포기한 사람들이 미 연방 노동성이 집계하는 실업률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제의 실업상황은 더 심각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번 경기침체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고있는 계층은 이례적으로 화이트 칼라들. 샌프란시스코에서 소위 ‘여피’라고 불리는 젊은 전문직업인들이 많이 사는 퍼시픽 하이츠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교포 폴 김씨에 의하면 “어제 해고당했다”고 말하는 손님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폴 김씨 자신도 최근 20~40%까지 매출액이 줄어 종업원 한 명을 해고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친구들이 실직하는 것을 보면 웬지 불안해지고, 외식하는 것에도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폴 김씨의 가게를 찾은 낸시라고만 밝힌 한 30대 손님의 고백이다.

재정적자에 단기특효약 없어
 실제 이처럼 위축된 소비자 심리는 경제기표로 볼 때도 금년들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소비자의 경제전반에 대한 심리적 신뢰도를 나타내는 소비자 신뢰지수는 1월 들어 2.1 포인트가 하락했다. 소비자 지출이 국민총생산의 3분의2를 차지하는 미국경제에서 소비자 신뢰지수의 하락은 경기회복이 아직도 먼 고지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비관과 절망 그리고 실직의 공포에 휩싸인 미국 국민들에게 최근들어 나타나는 유일한 경기소생의 희망은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는 주택경기. 계속되는 금리인하로 74년 3월 이후 최저로 떨어진 주택융자 이자율(30년 고정이자 기준 8.5%)과 부시의 첫 주택 구입자에 대한 5천 달러 세금공제 혜택은 서서히 부동산 경기에 불을 붙이고 있다.

 캘리포니아 부동산중개업자협회에 따르면 12월 샌프란시스코와 주변 지역의 주택매매실적은 90년도 동기 대비 19.1%가 늘었다고 한다. 11월의 2.4% 증가에 비하면 큰 폭의 상승이다.

 “매매 경기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것만은 틀림 없다”라고 샌프란시스코의 키노트프로퍼티 부동산중개회사의 공인중개사인 필리스 올러리씨는 말한다.

 주택경기의 활황은 미국 경제에서는 전통적으로 경기회복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경제를 침체로 몰고온 근본 원인인 재정적자와 기업 및 소비자의 과다한 부채에는 단기적 특효약이 있을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일시적 반등으로 끝날 우려를 안고 있는 주택경기의 활성이 중병인 미국경제를 침체의 늪에서 끌어내기는 역부족일 것이라고 비관적인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러나 디더릭씨는 “주택경기 회복이 단기적으로는 경기회복을 주도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생산성 높고 수출 늘어 한가닥 희망
 경기란 침체하고 반등하는 주기를 갖는다. 그러나 지금 미국 경기침체는 정부의 재정적자와 기업의 과다한 부채로 인한 투자감소라는, 장기간의 치유를 요하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 금리를 낮추고 세수를 줄이면 자연 재정이 압박을 받아 공공부문에 대한 지출이 감소하게 되고, 공공투자 감소는 또다른 경기둔화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 이데올로기의 상극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은 미국. 공산주의와의 싸움을 서방진영의 승리로 이끌고도 경제라는 적과의 집안 싸움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현실에 놓여 있다.

 부시 대통령의 호언처럼 미국은 경기침체라는 적과의 싸움도 승리로 이끌 수 있는가. 디더릭씨는 미국이 안고 있는 수많은 경제문제에도 불구, 세계경제에서 4분의 1이라는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미국의 경제력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아직은 너무 이른 발상이라고 주장한다.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생산성은 일본보다도 아직 높은 우위를 유지하고 있고(도표 참조) 무역적자도 87년 1천6백억 달러에서 작년 7백20억 달러로 크게 줄었다. 미국 공업제품의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도 87년의14%에서 작년엔 18%로 증가했다.

 미국경제에 과연 봄은 올 것인가. 미국 경제 회복을 위한 경기부양 방법론에 관한 논쟁은 미국 경제학자들의 몫인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적 경기침체가 미국 경제의 회복 없이 회복하기 힘들다고 할 때,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인 미국의 경기침체가 강 건너 불 구경이 될 수만은 없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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