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家長의 권위가 뭐길래”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2.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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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시청자들 ‘희귀 가장’보며 새로운 型 모색

“대발이 아버지는 인간문화재 아닙니까”. 매주 토·일요일 저녁이면 시청자들을 텔레비전 앞에 붙박아놓는 MBC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김수현 극본)의 연출가 박철씨는 이 주말연속극이 폭발적인 반향을 몰고오는 여러 요인들을 나름대로 풀이하면서 위와 같이 말했다. 이때의 인간문화재란 곧 사라져버리고 말, 그래서 더 돋보이는 “비현실적 존재”라는 의미를 풍긴다.

 3월 초에 30회를 맞게 되는 <사랑이 뭐길래>는, 이른바 ‘사랑이 뭐길래 현상’을 불러일으키면서 요즘 보기 드문 ‘국민적 화제’로 떠올라 있다. 수돗물 사용량이 줄어들고, 전화통화량도 감소하는가 하면 주말 약속을 피하는 경향이 생겨났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 코믹 터치의 홈드라마가 갈수록 높아지고 단단해지는 세대와 계층간, 그리고 부부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가족박물관’에 전시될 ‘마지막 가장’
 이 드라마가 시청률을 ‘위험수위’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이유들은 많다. 우선 드라마 내적으로는, 다양한 연령층의 인물들이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개성들은 서로 대비되는 성격들과 만나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들은 저마다 입맛에 맞는 인물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 김수현씨 특유의 발랄하고 감각적인 대사처리와 속도감 있는 장면 구성, 다소의 과장과 비현실성에 바탕한 코믹한 상황이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붙들어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뭐길래>의 기둥은 이사장(이순재) 여순자(김혜자) 부부와 박이사(김세윤) 한심애(윤여정) 부부로 보인다. 이 두 부부의 의식구조와 집안의 풍경은 우리 사회 모든 가정과 어느만큼씩은 닮아 있다. 권위와 지배욕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속내는 깊은 이사장과, 남편의 ‘피지배자’로 살며 “산다는 게 그런 거지”를 중얼거리는 순자는 우리 사회 중간층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반면 여성에 대한 이해심이 남다른 박이사와, 남편의 ‘이해심’이란 사탕발림으로 시부모를 모셔온 심애는 일견 ‘민주적인’ 가정의 모습을 환기시킨다. 이외에도 대발이와 지은이, 박이사 어머니와 두 이모, 대발이 여동생과 지은이의 두 동생들이 엮어가는 일상들도 느슨하지 않다.

 “전통적 가치관과 서구식 합리주의가 혼재하면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 가정의 혼돈된 모습을 대비, 극단화시킴으로써 시청자들로 하여금 대리만족과 동일시란 만족을 준다.” 방송평론가 김성희씨(한양여전 교수·드라마)는 이 연속극의 성공요인을 이같이 분석하면서 “그러나 이 드라마는 희극성이 강조된 나머지 비판적인 풍자성은 미약하다. 따라서 사회교육적 기능에 있어서는 역기능이 있다”고 말한다.

 드라마의 밖, 즉 시청자들이 짚어내는 이 드라마의 재미는 무엇일까. <사랑이 뭐길래>가 시청자들의 현실과 만나는 접점은 결혼(생활)이다. 결혼은 가정을 이룬 기성세대는 물론이고 결혼을 앞둔, 혹은 결혼을 기피하는 신세대들에게도 적지 않은 관심사이다. 이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가 문제인 것이다. 이사장과 박이사, 여고 동창생인 순자와 심애, 그리고 대발이와 지은이의 관계망은 ‘거울 역할’을 하면서 시청자들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건드린다.

 그 중에서도 기성세대들은 특히 이사장 형 가장에 눈길을 오래 둔다. 왜냐하면 이사장과 같은 스타일의 남편·아버지·사돈은 이제 곧 박제가 되어 ‘가족박물관’에 전시될 ‘마지막 가부장’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가장을 보며 50대 이상의 부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추할 것이고, 40대 가장은 자신의 아버지대까지 누리던 저 잃어버린 권좌를 새삼 그리워할 것이며, 30대들은 이사장과 같은 가장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하며 ‘용돈을 주는 아내’의 눈치를 살필 것이다. ‘최불암시리즈’에서 여지없이 확인되고 있듯이 부권 혹은 남성다움의 상실감을 이사장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심리로도 보인다.

 실로 이사장 형 가장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그런 아버지하고는 같이 살 수 없을 것이다”(20대 초반의 사무직 여성) “검약한 생활은 좋지만 너무 보수적이다”(여대생) “박이사와 대발이의 중간형과 결혼하겠다”(20대 초반 여성) “실종된 부권을 이사장에게서 찾는 것은 남성들의 착각이다. 그것은 남성이기주의의 발로이다”(30대 중반의 전문직 기혼여성) “이사장에게 정의로운 면도 있다”(40대 중반의 주부) “이사장은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경제권을 빌미로 가족을 지배하는 것이다”(40대 주부). 여성들은 거의 다 이사장 스타일에 반기를 든다. 그렇다고 해서 박이사에게도 박수만 보내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李사장, 현실은 朴이사”
 남성들은 이사장편이다. “이사장과 같은 남편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20대 후반의 기혼남성) “젊은 남편 중에 이사장 같은 유형은 없지만 이사장 스타일이 없어지면 안된다. 합리적 생각을 강하게 추진하는 힘이 필요하다”(30대 중반의 기혼남성) “박이사가 아내에게 존댓말 쓰는 모습은 역겨울 때가 있다. 이사장이 호통칠 때가 썩 보기 좋다”(50대 초반의 가장). 그러나 거개의 남성들은 “마음은 이사장이지만 현실은 박이사”이다.

 이사장은 가고 박이사의 시대가 올 것이지만, 그렇다고 박이사 스타일의 가장에 대해 전적으로 찬성표를 던질 수도 없다. “이사장형이 전통적 가장의 전형은 아니다. 우리의 전통적 부인들도 이사장 아내처럼 위축되어 살지 않았다.” 한국의 가족을 연구해온 이광규 교수(서울대·인류학)는 위와 같이 말하면서 “가족과 가정에 대한 의식의 대전환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가장의 직장 전념화 경향’과 ‘아내의 가사 전담화 경향’으로 특징지워지는 산업사회의 도시 가정은, 바로 한세대 전인 전통적인 농경사회에 비해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서로 뒤바뀐 것이다. 이교수는 “이사장과 같은 가장은 남성들에게 향수의 대상은 될 지언정 실현 불가능한 마지막 가장”이라고 말한다. 농촌과 도시의 인구비율은 지난 30여년 사이에 7 : 3에서 1.5 : 8.5로 급격하게 달라졌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가족형태는 거기에 적응하느라 놀라운 속도로 변모해왔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달라질 것이다.

 그 숨가쁜 과정 속에서 가족의 구성원들은 바람직한 모델을 모색할 겨를도 없이 갈등만을 누적시켜온 셈이 되고 말았다. 이교수는 “특히 남성들의 의식혁명이 있어야 한다”면서 “핵가족이 외형적으로는 단순한 것 같지만 대가족 당시의 여러 역할이 집중된 것이므로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이교수가 제안하는 현대적인 가장은 ‘봉사하는 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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