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의 전쟁’ 비웃는 야쿠자 주식회사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4.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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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토벌작전’ 피해 합법화 위장 … 자금 압박으로 일부 대원 이탈

선진국 가운데 치안 상태가 가장 안정된 나라로 알려진 일본에 기이한 ‘공룡 조직’이 자리잡고 있다. 이른바 야쿠자라 불리는 세계 최대의 조직 폭력단이 그것이다. 현재 총 조직원 8만9천여 명에 3천5백여 개의 군소 조직, 연간 수입액 1조3천억엔(한화 약 10조2천억원)이나 되는 큰 살림을 꾸리는 야쿠자는 오늘날 일본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동안 야쿠자는, 자신들의 역사·전통·정신을 자랑하며 활동해 왔다. 일본 국민 중에는 야쿠자의 ‘팬’들도 많다. 전세계를 통틀어 범죄 조직과 국민의 관계가 이처럼 특수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

 야쿠자는 자신들의 역사를 3백년이라고 자랑한다. 160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수백년에 걸친 내전을 끝내고 일본을 처음 통일했을 때, 직업적 전쟁꾼(사무라이)으로 살던 낭인 약 50만명이 하루아침에 ‘실직’ 당하면서 야쿠자의 시초를 이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학자들은 백년 역사를 정설로 내세운다. 현대적 의미의 야쿠자 시초는 18세기 중세 일본의 전통적 도박꾼인 바쿠토와 행상인인 데키야였다. 이 두 집단의 구성원들은 주로 천민 계급이나 범죄자 등 사회에서 소외받고 탈락한 자들로 채워졌다.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 젊은 왕 메이지(明治)에게 굴복하면서 야쿠자 세계는 큰 변화를 겪는다.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이 현대화의 길을 걷게 되자, 바쿠토와 데키야 두 무리가 이에 편승해 도시 공사판과 선착장 등에서 인부 모집 사업(인력 매매)에 개입한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에도 가담
 이후 일본이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되면서 야쿠자는 정치권과 긴밀하게 결합했다. 그 시초는 1881년 규슈 지역 출신 도야마 마루치라는 인물이 야쿠자 결사인 현양사를 창설하면서 비롯됐다. 현양사 조직원들은 일본 군국주의 팽창에 선봉대 역을 자임했다. 1895년 육군성의 지시를 받은 현양사 야쿠자 10여 명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함으로써 조선 침략의 길을 텄고, 다른 대원들은 간첩 임무를 띠고 중국·만주 등지로 파견됐다. 식민 정책의 대가로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한국·만주·중국의 농지개혁(토지 조사 사업)을 통한 이권이었다.

 일본 군국주의 치하에서 제철을 만난 야쿠자들은 일본 국내의 재정 기반 확장도 서둘렀다. 조선·중국 등 식민지에서 약탈한 식량·물품을 집중적으로 하역하던 고베 항구를 장악해 오늘날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으로 성장한 야무구치구미(山口組·조직원 3만6천명)도 이때 탄생했다.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망하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야쿠자 세계는 또 한번 변화를 겪는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젊은 세대 중 새로운 유형인 구렌다이(깡패)가 대거 야쿠자 외곽 조직에 들어온 것이다. 또 일제 치하에서 징용·징병으로 끌려왔다가 눌러앉은 한국계(당시 약 60만명) 중에서도 일본의 민족 차별 정책 때문에 야쿠자에 가입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미군 점령 기간에 야쿠자는 급속히 세력을 확장할 기반을 마련했다. 당시 미군 당국은 소련 봉쇄와 일본에서의 공산주의 활동 방지를 최우선 정책 목표로 삼았는데, 이를 위해 야쿠자가 자주 동원됐다. 이들은 파업 분쇄, 공산당 행사장 습격 등의 대가로 전후 암시장 및 경제 성장기의 일본 사회에서 이권 사업에 구석구석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 야쿠자의 세력 판도는 바로 이 시기에 짜여졌다. 일찍이 고베 항구를 거점으로 성장한 야마구치구미는 오사카·교토 등 관서 지방의 최대 조직으로 성장해 나갔다. 또 도쿄·요코하마 등 관동 지방에서는 스미요시렌고, 이나가와가이 등이 군소 조직을 규합하면서 확고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이들이 벌이는 수익 사업은 ‘돈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야쿠자가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광범위하다. 전통적인 수법인 보호비 명목의 유흥업소 갈취는 물론, 길가에서 벌이는 투전에서부터 수백억엔이 오가는 대규모 카드게임, 슬롯 머신, 파친코에 이르기까지 사기 도박업은 모두가 단골 수입원이다. 70년대 이후에는 프로권투·프로야구·스모·레슬링에도 손을 뻗쳤다. 뿐만 아니라 5백여 개에 이르는 탤런트 대행업(프로덕션)과 투전 회사, 영화사들도 이들의 세력권 아래 있다.

 이들 흥행업 외에 마약 판매가 야쿠자의 가장 큰 수입원으로 꼽힌다. 각 야쿠자 조직 보스들은 마약 판매를 규율로 금지하고 있다고 항변하지만 경찰에 적발되는 마약 사범은 대부분 야쿠자들이다.

 야쿠자는 일본 전역에 합법적인 회사를 2천6백여 개나 확보하고 있다. 큰 회사는 건설업체로 지하철·공항 등 대규모 공공건설 사업 입찰에까지 참여하고 있다.

 야쿠자 세계에서 두목(오야붕)과 부하(고붕)의 관계는 절대적 상명하복이다. 오야붕이 ‘까마귀는 희다’고 하면 고붕은 그렇게 알고 전파해야한다. 이것을 거부하면 파문이나 단지(손가락 절단) 같은 혹독한 보복이 따른다. 이런 엄격한 규율속에서 모든 조직은 상부(본부)에 연간 재정보고서를 제출하고, 매일 수백만엔을 송금해야 한다.

 크고 작은 야쿠자 조직의 대립 투쟁이 끊이지 않고, 그 결과 영향력 있는 조직이 전국을 권역별로 나눠 세력을 독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재정 확보의 용이함과 무관하지 않다.이처럼 큰 조직과 돈벌이의 상관 관계를 알아차린 야쿠자세계에서는 군소 조직들이 앞다투어 고붕이 되기로 맹세하고 큰 조직에 흡수됐던 것이다.

 그 결과 현재 야마구치구미(5대목 와타나베 요시노리)와 스미요시가이(회장 스미요시), 이나가와가이(이사장 재일교포 조춘수) 조직이 전체 야쿠자의 과반수가 넘는 5만여 명을 장악하고 있다.

한국 · 태국 등 주변국으로 진출하기도
 일본 국민과 사직 당국이 이같은 야쿠자의 ‘무법 천지’에 관용적인 것은 아니다. 일본 경찰은 64년(도쿄올림픽 무렵)과 74년에 대대적인 야쿠자 정상작전(두목급 체포 작전)을 펼쳤고 수시로 자금원 봉쇄 조처를 취했다. 그러나 대부분 위법행위가 말단 조직원들에 의해 행해졌기 때문에 두목급들은 수감된 지 몇년 지나지 않아 다시 야쿠자 세계로 복귀했다.

 이같은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92년 3월1일부터 ‘폭력단원에 대한 부당 행위 방지 등에 관한 법률’(단속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경찰이 전국 7대 야쿠자 조직을 지정 폭력단으로 정해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위법 사항이 있을 때는 즉각 사무실을 폐쇄하고 체포하는 등 강력한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한 대책법이다. 그러자 주요 야쿠자 조직 간부들은 인권 변호사들을 초빙해 위헌 소송을 내고, 상당수 조직을 합법적 주식회사 또는 우익 단체로 등록하는 방법으로 맞섰다.

 야마구치구미의 경우 총두목인 와타나베 요시노리의 지시로 위계 질서에 따라 매겨진 조직 간부 1백60여 명의 직책을 전부 기업체 대표, 임원, 부장, 고문 같은 직급으로 바꿨다.

 ‘신입사원 모집’이라는 광고를 내, 절차를 거쳐 다시 채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회사원 직책을 쓰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손쉬운 자금원을 확보하기 위해 필리핀·태국·대만·한국 등 주변국 진출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년 야쿠자 사상 겪어보지 못했던 강력한 단속법 앞에 야쿠자 세계도 서서히 동요를 보이는 것으로 확인된다. 수많은 말단행동 대원들이 압박을 이기지 못해 조직을 탈퇴하는가하면, 일부 야쿠자들은 자금확보가 여의치 않자 기업인·금융인·경찰과 경쟁 조직 간부를 상대로 무차별 총격전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지난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 동안 14명이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일본 열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이 총격전을 놓고 경찰과 야쿠자 간부의 시각은 이렇게 나뉜다.

 “폭력단의 단말마적 행위이다. 줄기찬 단속을 계속해 범죄 조직의 뿌리를 뽑을 것이다.”(오사카 경찰부 폭력단 대책과장).

 “일본이 존재하는 한 야쿠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새 옷으로 갈아 입을 뿐이다.”(야마구치구미 5대목 사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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