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도덕의 다원성 위한 참고서
  • 김은실 (이화여대 강사·인류학) ()
  • 승인 1994.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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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섹스 포르노 에로티즘:쾌락의 악몽을 넘어서〉

우리 사회에서 학문의 주제로, 그리고 한국 사회 문화를 분석하는 비판적 담론으로 성을 논의하는 본격적인 시도는 페미니즘을 제외하고는 거의 볼 수 없다. 한국의 사회 규범에서 성을 논하는 사람들을 주변화시키는 문화 권력이 학문과 사유 과정에 검열 장치로 작동하는 결과이기도 하고, 또 이를 담론화할 수 있는 학문과 문화 엘리트의 체험, 그리고 언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성은 역사적으로 구성된 산물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를 급진적 문화 이론가·활동가라고 분류하는 ‘현실문화연구’ 기획팀은 성을 정치와 학문적 주제로 담론화하기 위해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섹슈얼리티〉(제프리 윅스 지음. 서몽진·채규형 옮김)는 번역서이고, 〈섹스 포르노 에로티즘:쾌락의 악몽을 넘어서〉(현실문화연구 엮음)는, 그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 사회의 성현실에 관해 최초로 본격 연구한” 비판적 연구서이다. 이들이 제기한 문제(이성애적 성, 성인 중심적 성, 생식 중심적 성 이데올로기의 비판)와 그에 대한 분석 방법론은 충분히 급진적이고 정치적이다.

 이들이 말하는 성 담론에 관한 사회학적 논의, 성 담론의 역사성과 물질성 분석은 번역본인 제프리 윅스의 짧은 입문서에 간결하고 분명하게 시도되어 있다. 윅스의 책은, 서구에서 성은 생물학적이고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관념과 욕망과 의미가 적재되어 있는 사회적·역사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성이 어떻게 성 과학에 의해 하나의 진래·권력과 관계를 맺게 되는지, 그리고 국가가 어떻게 성에 대한 설명 체계를 제공하고 규제하는지를 간략하게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이 책은 성 담론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관념들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성 욕구에 대한 자유와 선택의 문제를, 그것을 충족시키는 사회 정책과 어떻게 관련시켜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성 도덕의 다원성 모색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윅스의 책은 우리 사회의 성과 관련된 도덕적 다원주의를 논의해 나가는 데 중요한 참고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문화연구팀이 한국 사회의 성 현실을 분석했다는 〈섹스 포르노…〉는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 혼란스럽다. 그들의 문제 의식이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그 정당성과 전위성을 확보한다 하더라도, 한국 사회의 성 이데올로기와 성 제도를 분석하고 기술하는 그들의 방법은 분명하게 독해되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여성으로 보이는 몇몇 페미니스트 저자의 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가부장적 이성애를 비판하고 편협한 페미니스트를 비판하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 남성 이성애자의 글이라는 것이 암묵적으로 드러나 있다.


담론 밖에 존재하는 성은 없다.
 이 책에서 한국의 성 담론에 대해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은 10대 청소년을 둘러싼 성 담론을 분석하는 이지연의 글과 성희롱이라는 상황을 둘러싸고 남녀의 체험이 다르게 구성되는 우리의 가부장적 성 규범 상황을 드러내는 이성은의 글, 남성의 정력에 관해 쓴 채규형의 글이다. 이지연과 이성은의 글은 다른 저자들의 메타 언어에 비해 구체적이고 경험적이다. 이 논문들을 그런 대로 독해할 수 있는 것은, 글의 소재가 한국의 성이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저자들이 말하는 권력으로서의 성 담론이 구체적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사회 관계의 장치를 어떻게 구성해내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 담론의 물질성과 역사성을 맥락화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해체되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담론 밖에 존재하는 성이란, 인간이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살고 있는 한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서 구성되는 악몽으로서의 쾌락인 성의 담론을 해체한 후, 그들이 말하는 개인적 쾌락의 전복성이 어떤 형태의 담론으로 급진 정치의 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인가. 〈섹스 포르노 에로티즘〉에서 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남근적 권력의 냄새를 맡는다.   ■
金恩實 (이화여대 강사·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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