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脫毆入亞’ 열풍 아시아 회군 깃발인가
  • 도쿄ㆍ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5.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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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말레이시아 총리 관련 서적 인기…‘신대동아공영권’ 주장도



 탈아입구(脫亞入毆). 지금으로부터 1백10년 전.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라는 계몽사상가가 부르짖은 이 한마디는 일본의 운명을 크게 바꿔놓았다.

 ‘우리는 아시아ㆍ동방의 악우들을 사절해야한다’. 다시 말해서 낙후된 조선ㆍ청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서구 열강과 사귀어야만 일본의 활로가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후쿠자와의 이같은 주장에 뿌리를 둔 탈아입구 정책은 그 뒤의 일본 역사를 재조명해볼 때 ‘탈아’는 물론 ‘입구’에도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탈아론에 따른 식민 정책은 결국 아시아ㆍ동방의 옛 악우들에게 뿌리 깊은 반일 감정만 남겼을 뿐이다.

 또한 입구론을 좇아 서구화에는 성공했지만 백인사회의 일원은 결코 되지 못했다. 일본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격화하고 있는 미국ㆍ유럽과의 무역 마찰이 좋은 예다.

미국 영향력 쇠퇴와 연관
 탈아입구 과정에서 ‘명예백인’ ‘바나나 인종’(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바나나처럼, 황색 인종이 백색 인종의 흉내를 어설프게 내려했다는 뜻)이라고 불려온 일본인들이 지금 ‘다시 아시아로 돌아가자’ 고 외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제일 큰 서점으로 알려진 도쿄 역 앞의 ‘야에스 북센터’. 이 서점의 1층 진열장에는 아시아로 회귀하기를 주장하는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와 관련한 책들이다. 우선 신대동아공영권을 구축하자고 공공연히 주장해온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의원과 마하티르 총리의 대담집 <N0라고 말할 수 있는 아시아>. 이어서 경제 평론가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와 마하티르 총리의 대담집 <아시아인과 일본인>. 그리고 마하티르 총리의 전기 <아시아 복권의 희망 마하티르>. 문자 그대로 마하티르 일색이다. 마하티르 총리가 이처럼 일본인들에게 환대받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아시아 제일의 친일 정치가라는 점이다. 마하티르 총리는 잘 알려진 대로 ‘룩 이스트(Look East)정책’의 제안자다. 즉 말레이시아등 동남아시아 나라들은 일본과 한국의 경제적 성공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룩 이스트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비공식으로 매년 수 차례씩 일본을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예로 90년 12월 ‘동아시아 경제회의 (EAEC)’ 구상을 발표하기 한달전에도 그는 도쿄를 방문해 일본 관계자들과의 구상을 협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하티르 총리의 친일적 태도는 <N0라고 말할 수 있는 아시아>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진출하여 정치 대국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더 이상 과거의 침략 행위를 사죄할 필요가 없다’ 고 일본을 부추겼다.

 그는 또 인권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강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데, 마하티르 총리의 이러한 ‘탈미(脫美)’주장은 일본인들의 입맛을 강하게 당기고 있다. 즉 그가 주장하는 탈미란 일본의 보수 우익 세력들이 말하는 탈구입아론과 비슷한 논리인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탈구입아론자로는 이 책의 대담자 이시하라 신타로 의원을 꼽을 수 있다. 그는 5년 전 출판한 <N0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대일 압력을 거세게 비판하면서, 대미 종속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아시아 지역에 일본을 맹주로 한 새로운 대동아공영권을 구축하자고 외쳤다.

 그는 마하티르 총리와 대담하면서도 ‘아시아공영권’ ‘엔 경제권’ 이란 형용어로 자신의 구상을 재강조했다. 마하티르 총리도, 일본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아시아의 리더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맞장구쳤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 ‘탈구입아’ 인가. <아사히 신문>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 편집위원에 의하면, 일본의 탈구입아론과 같은 신아시아주의는 현재 이시하라 의원과 같은 보수 우익 세력이 정치적 의미에서 주장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재인식 및 부활, 일ㆍ중ㆍ한 제휴론, 경제계가 주장하는 일ㆍ중 공동의장제에 의한 일본의 재아시아화, 그리고 지역 안정론에 입각한 외교ㆍ안보 측면이라는 세 갈래 움직임에서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이같은 신아시아주의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물론 냉전 종식과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방위당국자들은 미국이 아ㆍ태지역 군사력 삭감 계획을 발표하자 일ㆍ미안보조약의 의의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적이 있다. 가상적 소련의 위협을 전제로 한 일ㆍ미안보조약의 전략적 근거를 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위한 지역 안정론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들은 일본을 맹주로 한 대동아공영권과 일ㆍ미안보조약의 통합에 의해 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평론가 오바에 겐이치는 마하티르 총리와의 대담집 <아시아인과 일본인>에서 일본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미국이 아니라 아시아 지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일본의 최근 무역구조를 실례로 제시하고, 일본의 아시아지역 수출입 총액(93년 2천1백49억달러)이 대미 수출입총액(93년 1천6백6억달러)을 훨씬 앞서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경제 측면에서의 탈구입아론은 대미무역 마찰 격화와 유럽연합(EU)결성에 따라 큰 발언권을 획득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은 이토 쥰지(伊藤淳二) 가네보 회장의 ‘일중ㆍ한 제휴론’ 과 고바야시 요타로(小林陽太郞)후지 제록스 사장의 ‘일본의 재아시아화’이다. 일본이 경제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지역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물론 일본이 경제적 이유에서 ‘입아’를 외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77년 마닐라에서 발표된 ‘후쿠다 독트린’, 80년 오히라 총리의 ‘환태평양 연대 구상’이 그 좋은 예이다. 일본은 이때부터 경제 협력과 지역 협력체 구상을 적극 모색해 왔다.

지역 분단ㆍ경제 패권주의 위험성 내포
 일본은 또한 아시아 경영을 위해 정부개발원조(ODA)의 60% 이상을 이 지역에 퍼부어 왔고, 특히 아세안 5개국에 총액의 약 30%를 집중투자해 왔다. 또 일본 외교 당국은 ‘아시아 중시외교’를 명분으로 삼아 아키히토 일왕의 첫 방문지로 동남아시아를 선정하는 등 이른바 ‘왕실 외교’를 통해 이 지역의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리기위해 총력을 기울여 왔다

 이렇게 보면 일본에서 대두하고 있는 탈구론은 본질적으로 미국 종속을 벗어나겠다는 ‘탈미론(脫美論)’에 가깝다. 그러나 입아론적 측면에서 보면 중국이라는 또 다른 변수가 그들의 신아시아주의를 부추기고 있는 요인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대두 내지는 잠재적 위협이 그들의 입아를 부추기고 있는 또 다른 명분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보수 우익 세력은 중국의 경제 발전과 군사력 증강에 강한 위기 의식을 갖고 있다. 특히 중국의 항공모함 건조 계획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중국의 해양 제패에 따른 중국적 세계질서(Chinese World Order)’의 도래를 경고한다. 때문에 말레이시아를 비롯해 아세안 몇나라가 일본의 입아정책에 적극 찬동하고 있는 것은 비단 경제적 이유 때문은 아니다. 일본을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해 보겠다는 안보 측면도 일본에 기울기를 부채질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다.

 그러나 미국을 등지고 ‘아시아ㆍ동방의 악우’들과 다시 손잡겠다는 일본의 탈구입아 정책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정책인가. 도쿄 외국어대학의 나카지마 미네오(中鳴嶺堆)교수는 지금 이 지역에 두 개의 아시아주의가 대립하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마하티르 총리나 이광요 전 싱가포르총리가 주장하는 폐쇄적 아시아주의이고, 또 하나는 대만 이등휘 총통의 개방적 아시아주의다.

 그는 전자가 주장하는 ‘아시아인의 가치관에 의한 아시아의 단결’ 에는 심정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안전보장상의 전략이 결여된 사고라고 단정한다. 즉 미국이 마하티르 총리의 ‘동아시아경제회의’구상을 이슬람ㆍ유교 문화권의 반발형태로 간주하고 있어 자칫하면 문명 충돌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아사히 신문>의 후나바시 요이치 편집위원도 일본의 신아시아주의에는 두 개의 함정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일본의 아시아화가 아시아 지역을 통합하기는 커녕 정치ㆍ경제적으로 이 지역을 분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일본의 입아가 ‘경제적 정아(征亞)’로 이어질 위험성이다.

 때문에 최근 일본 언론에는 미국과 사이좋게 아시아를 경영해야 한다는 ‘반미입아(伴美入亞)’라는 색다른 용어가 등장해 눈길을 끌고있다. 그러나 탈미입아이든 반미입아이든 문제는 누구를 위한 아시아화인가 하는 점이다. 전처럼 ‘아시아ㆍ동방의 악우’를 괴롭히는 것이라면 일본은 또다시 탈구에도 입아에도 실패할 것이다. ■
도쿄ㆍ禁明錫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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