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당 ‘신장개업’ YS 1인 체제로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5.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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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조직책이 새로 임명된 민자당 지역구에서는 지구당 개편을 위한 임시대회가 잇달아 열렸다. 그 자리에서 연출된 풍경은 어디나 똑같았다. 대의원들의 만장일치로 추대된 임시 의장은 개회를 선언한뒤 궐석중인 지구당위원장 후보에 아무개씨가 단독 출마했음을 알린다. 그러면 대의원 중 한사람이 벌떡 일어나 “아무개씨는 학식과 덕망을 겸비해 우리 지구당위원장을 맡을 적격의 인물로 사료되오니 현명하신 대의원들께서 만장일치로 추대해 주실 것을 제안한다”고 말한다. 대의원들은 즉각 환호와 박수로 그 후보를 지구당위원장으로 선출한다. 단상에는 후보 당선을 축하하러온 ‘각계 저명 인사’와 지역 유지들이 점잖은 얼굴로 앉아 있다. 임시 대회가 열리기 벌써 며칠 전에 언론에는 이미 아무개씨가 지구당위원장에 임명됐다는 보도가 나온 터이다. 중앙당에서 이미 결정하고도 지구당위원장은 대의원이 선출한다는 당헌 규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각본을 짜 연출하는 어색한 장면이다.  

 비단 여당뿐만이 아니다. 야당 지구당 개편 대회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벌어진다. 지구당 대의원들은 거수기 노릇만 할 뿐이다. 이것이 우리 정당의 현실이며, 우리 정치 문화의 현주소이다.

 집권 여당인 민자당이 대변신을 꾀하고 있다. 검토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획기적이다. 아예 당명을 바꾸고 주요 당직자와 시·도 지부장, 공직선거 출마 후보자, 지구당위원장 경선까지도 검토하고 있다. 당장 2월7일로 예정돼 있는 전당대회 때와 6월 지방자치 선거 전에 모두 실시할 수는 없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전면 경선 체제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민자당의 변신은 정계에 일파만파의 변화를 몰고올 조짐이다.

 사실 민자당에 불어닥칠 변화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90년 2월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자당은 김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한 그날부터 사실상 용도폐기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3당 합당 당시의 골간 그대로 구여권 인사들인 민정계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민자당에 김 대통령이 기대할 것은 없었다. 문민 대통령임을 자부하면서 구악 일소를 주창하고 나선 김 대통령에게는 민자당 자체가 개혁할 대상이었다. 따라서 김대통령 취임 초기에는 민주계 일각에서 인위적인 정계개편 필요성을 주장하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김대통령은 당의 변화를 급격히 시도하지는 않았다. 김종필 대표 체제를 유지하면서 민주계 사무총장들을 통해 간접으로 관리해 왔다. 그 결과 당은 무력감에 시달려야 했고, 당 내부의 태생적 갈등은 계속 분출돼 왔다.

‘김영삼당' 건설을 위한 통합정치

 지난 2년 동안 민자당을 방치해 오다시피 한 김대통령이 민자당에 메스를 들이대게 된 것은, 이제 당의 진로에 대한 김 대통령의 생각이 정리했음을 뜻한다. 올해부터 3년 내리 선거를 치르게 되는 정치의 계절이 시작되는 것도 당 활성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는 배경이 된다. 선거는 당이 치르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지난 연말부터 정치권의 통합을 강조했다. 연두 기자회견 때는 “정치가 백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최대한 흡수하고 통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이런 생각이 실제로 반영된 것이 지난번 개각으로, 소외됐던 민정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고 민주계를 2선으로 후퇴시켰다. 이번 당 개편에서도 김대통령은 이를 그대로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를 묻지 않고 폭넓게 끌어안고 가겠다는 것이다. 다만 그 통합에는 단서가 붙는다. 당과 대통령에 대해 일체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3당 합당의 마지막 당사자인 김종필 대표를 2선으로 퇴진시키는 역을 민정계에게 맡긴 듯하다. 현재 김대표의 퇴진에 대해 비교적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민정계이다. 특히 김윤환 정무장관은 김대표 퇴진의 총대를 멘 듯한 모습이다. 김대통령은 당의 다수인 민정계가 ‘김영삼당’ 건설에 앞장서라고 주문하고 있으며, 그 시도가 현재까지는 상당히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김대통령이 말하는 통합에는 양면의 얼굴이 있다. 통합 대상자에게는 미소짓는 모습이지만, 그렇지 못한 쪽에서 보면 저승사자의 얼굴이다. 구 여권 인사의 선택적 통합을 통한 김영삼당 건설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축출을 부를 가능성이 높다. 총선 전에 지구당위원장들에 대한 대폭적인 물갈이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여권 핵심부에서는 이미 ‘도저히 당을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 이름이 흘러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민주계 한 인사는 “선택적 통합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매우 비참한 모습으로 당에서 나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3김시대 청산 의도…정계재편 촉매 될 듯

 민자당의 변신은 앞으로 정국 구도에 큰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민자당이 전면적인 경선 체제를 도입한다면 민주당도 따라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럴 경우 정계에서 은퇴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 완전한 당권 장악을 위해 동교동계와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이기택대표 진영에서는 민자당이 경선제를 도입하는 것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이다. 이대표 진영의 한 인사는 “이는 마치 배를 띄우려는데 때맞춰 순풍이 부는 격”이라고 표현한다. 이대표 진영에서는 전당대회 조기 개최 협상이 결렬될 경우 대표를 포함한 주요 당직과 지구당위원장의 전면적인 경선카드를 들고 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럴 경우 당대표로 마땅히 내세울 주자가 없는 동교동계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지게 된다. 경선을 거부하거나 김이사장이 경선에 영향을 미칠 경우 당은 깨질 수밖에 없다. 민자당의 변화는 민주당의 분당을 재촉하는 촉매가 될 수도 있다.

 김대통령은 민자당 개편에 앞서 야당의 이런 복잡한 사정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김대통령은 민자당 개편을 통해 김종필 민자당 대표와 김대중 이사장의 정치적 영향력을 감소시켜 3김 시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1김 시대를 열어가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자당의 대수술과 함께 또다시 고개를 들고있는 것이 정계 개편설이다. 민자당의 신당 출범이 궁극적으로는 정계 개편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민자당 내에서는 민주당이 결국 분당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멀지 않아 여당이 정치 파트너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는 것이다. 특히 민자당이 지방선거에서 패할 경우 민주당 내의 일부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강한 흡인력을 발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계 개편의 또 다른 변수는 결국 당에서 축출될 것이 분명한 통합 제외 그룹이다. 이들은 김영삼당이 갈 방향을 잘 알고 있다. 당장 전당대회 때나 지방자치 선거 전에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총선 전에는 당을 박차고 나갈 것이 거의 틀림없다. 그렇게 된다면, 여당의 일부 세력이 떨어져 나오고 야당의 일부 세력이 여권에 합류하는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정치적 색깔에 따른 이합집산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폭이 큰 정계 개편은 한참 뒤에나 가능한, 그것도 여러 정치 상황이 맞물려야만 현실화할 수 있는 구도이다.

 최근 정가 일각에서는 ‘소폭 정계 개편’이라는 낯선 용어가 등장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보궐선거나 조직책 개편 때마다 일부 재야 인사 영입이 끊임없이 있어 왔다. 그것은 극히 개인적이고 제한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김대통령 친정 체제가 강화된 신당에는 대규모 부대가 조직적으로 합류할 가능성이 있다. 소규모 정계개편이란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지난 10월께부터 과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일부 운동권 출신 인사와 문화예술가, 변호사, 학계 인사들이 “21세기를 내다보는 정치 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강한 정치적 지향과 방향성을 지닌 시민운동 단체를 준비하는 모임을 가져왔다. 그들은 대부분 친YS 성향 인사들로서 대통령 선거에 직·간접으로 참여했거나, 비판적 지지를 보낸 인물들이다.

 이 그룹들은 김 대통령의 초기 개혁 구상이 많이 퇴색했다는 비판 아래 아예 양김 이후 한국 정치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신당 창당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민자당 개혁과 관련해 이들은 ‘신당의 개혁 성격이 확실하다면 거기에 합류해야 하지 않느냐’는 쪽과 ‘양김 이후를 대비하는 정치 세력을 만들자’는 쪽으로 의견이 나뉘고 있다 한다. 이들과 김대통령의 관계를 감안할 때, 앞으로 민자당의 개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이 그룹들이 신당에 참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지금 민자당이 모색하고 있는 변화는 우리 정당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정말 우리 정치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릴 것이라고 기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지난해 정치관계법 개정 때처럼 변화의 주체인 민자당은 철저하게 배제된 채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다. 중진 의원들만 개인 위상의 변화 가능성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민자당 의원들은 당의 이름을 바꾼다는 사실도 신문을 보고서야 알 정도였다. 전당대회준비위원회에 속한 의원들을 빼놓고는 당에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 당헌· 당규집을 들여다 보는 사람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일부 의원은 “당의 운명을 외부에서 결정하는 게 세계화냐”고 되묻기도 한다. 이미 청와대와 외부 학자 그룹이 민자당 개편에 대한 해답을 만들어놓고 한 가지씩 언론에 흘리고 있는데 괜히 당개혁을 논의한다며 헛심 뺄일 있느냐는 소리도 당내에서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당 소외된 개혁” “1회용” 부정적 시각도

 민자당 개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부정적인 시선은, 철저하게 지방자치 선거에 대비해 기획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1회용이라는 얘기이다. 사실 이번에 민자당이 검토하고 있는 사안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번 정치관계법개정 때 이미 한번씩은 거론됐던 사안들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공론화조차 되지 않았었다.

 현재 지방자치 선거를 앞두고 여권 내부에서조차도 심각한 상황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지경이다. 김대통령의 텃밭인 부산·경남을 빼놓고는 어디 한 군데 안심할 데가 없다는 것이다. 민자당의 한 의원은 “정말 쇼라도 한번 해야할 상황”이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특히 민자당이 추진하고있는 경선은 한바탕 쇼로 끝날 가능성이 있다. 비교적 상부의 개입과 관리가 가능한 상층부 일부 자리만 경선하게 될 것이란 얘기이다. 정작 국민에게 뿌리를 내릴 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해 필수인 지구위원장들의 경선은 영구 검토 과제로 남을 공산이 크다.

 현재 여권과 야권에서는 매우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양김씨가 그들의 대리인과 마찰을 빚고 있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세계화를 명분으로 당의 변화를 주문해 김종필 민자당 대표를 거의 밀어낸 상황이다. 김대중 이사장은, 언젠가는 거세되지 않을까 우려하며 지방자치 선거 전에 당권을 보장하라는 민주당 이기택 대표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김대통령의 민자당 개편은 이런 상황에서 정국 주도권을 쥐기 위한 측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민자당 개편이 양김 갈등 구조 속에서의 주도권 쟁탈과 이를 위한 인적 청산필요성 때문에 결정됐다는 것이다. 민자당 개편의 또 다른 배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자치 선거가 끝나고 양김씨에 대한 도전 세력이 거세되면 민자당의 개혁논의가 자연스럽게 중단될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신 민자호는 이런 저런 정치적 배경 속에서 지금 막 출범하려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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