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 50년은 ‘작명의 역사’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5.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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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분당·통합·해산으로 ‘당명은 단명'…공화·신민당만 10년 넘겨

지난해 12월18일 열린 아·태재단 후원회원의 밤 행사 때 일어난 일이다. 당권 경쟁과 DJ정계 복귀설로 민주당이 한창 어수선할 때라서 언론과 정치권은 김대중이사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김이사장의 인사말 어느 대목에서 좌중이 한번 술렁거리더니 그때부터 김이사장의입술을 가슴 졸이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김이사장이 민주당을 언급할 때마다 “우리 신민당당은…”이라고 당명을 바꿔 말했기 때문이다. 단상 아래에는 민주당 국회의원 대다수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인사말이 끝나서야 사회자가 김이사장에게 실수를 지적했다. 그러자 김이사장의 대응이 재치 만점이었다. “아, 민자당을 공화당이라고 바꿔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야 뭐…”라며 슬쩍 얼버무리고 넘어간 것이다. 순간 잔뜩 긴장했던 좌중에서 는 폭소가 터졌고 김이사장의 실수는 애교로 둔갑했다.

 자신의 소속 정당 이름을 바꿔 말한 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DJ이고 JP이다. 이들은 YS와 함께 30여 년간 한국 정치를 주물러온 정치사의 산증인들이다. 이들이 자기 손으로 만든 정당만 해도 여럿이다. 정당사를 추적해 보면 이른바 ‘정치 9단’ 들이 이러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 어느 정도 납득된다.

명멸한 정당 수 헤아리기 불가능

 올해는 광복 50주년이다. 그렇다면 반세기 동안 정치사에 등장했다가 사라져간 정당은 도대체 몇 개나 될까. 정확하게 그 수를 헤아릴 수 있는 이는 정계에건 학제에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펴낸 <대한민국 정당사>만이 48년 건국 이후 정당사에 대해 비교적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 분야에 관한 이렇다 할 연구서도 나오지 않는 실정이다. 연구한다손 치더라도 인물이나 계보를 따라가야지 정당의 흐름을 좇다보면 미로에 빠져 낭패보기 십상이다.

 두세 개 정당사를 연구해서 수백년 정치사를 한눈에 꿸 수 있는 구미에 견주면, 한국 정치의 50년 역사는 지나치게 복잡하다. 우리 헌정사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정당은 63년 5월 창당해 80년 10월 신군부에 의해 사라진 민주공화당이다.

하지만 가장 수명이 긴 공화당도 성년식은 치르지 못했다. 지금까지 알려지기로는 박정희 당시 혁명위원회 의장은 김종필과 김재춘에게 따로 정당을 만들 뜻을 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종필은 의원 중심이 아닌 사무국 중심의 민주공화당을 만들었고, 김재춘은 구 한국민주당계·민주계 등 야권과 자유당계 등 여권을 망라해 자유민주당을 만들었다. 즉 김종필은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이름을 합성했으며, 김재춘은 자유당의 ‘자유’와 야권의 ‘민주’를 짜맞추기한 것이다. 그리고 민주공화당이 집권당으로 탄생함에 따라 자유민주당은 야당이 되었다. 민주공화당 창당은 김종필이 62년 초부터 충무로 비밀 아지트에서 사조직을 구성해 추진했기 때문에 많은 일화를 남겼다. 집권 여당 창당설은 나중에 동양화학주식회사라는 위장 회사 형식으로 알려진 김씨의 사조직이 김재춘의 반발에 부딪치면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재야와 학생들 사이에서 김종필에 대한 기대가 없지 않았다. 더구나 김종필이 지주와 자본가 계급에 뿌리를 대고 있는 보수 야당과는 전혀 다른 자유주의 성향의 정당을 만들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펴져 있었다.

 그 때 <한국일보>가 집권 세력이 없는 자의 정당인 ‘노농당’을 만들 것이라는 보도를 했다. 기존 정당의 성격과 구별되는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시 신당 추진 세력의 원칙에서 보면 꽤 설득력이 있는 얘기였다. 분화가 덜된 당시 사회 형편에서 지주와 자본가를 제외하면 남는 것은 노동자와 농민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사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우선 민정 이양이 아직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던 상황에서 집권 세력이 사회주의 냄새가 나는 노동당을 창당하리라는 기사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 기사로 말미암아 <한국일보>는 자진 휴간했고, 사주인 장기영씨는 구속됐다.

 공화당말고 한국 정당사에서 10년을 넘긴 정당은, 67년 2월 11일 창당해서 80년 10월 신군부에 의해 간판을 내린 신민당뿐이다. 3공화국 들어서 민주당·민정당·민중당·신한당 등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야권이, 67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드디어 대통합을 이루어낸 것이다. 당시 야당은 박순천이 이끌던 민중당과 윤보선이 이끌던 신한당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었는데, 각각 머리 글자 한자씩을 따서 신민당을 만든 것이다.

 지금도 야당사에서 ‘신민당’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우선 현재 정국을 주도하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신민당을 통해 정치 지도자로 자리를 굳혔다. 야권 인사들에게 신민당이라는 당명은 일종의 정통 야당의 법통을 이어받는 개념으로 해석된다. 그도 그럴 것이 가파른 현대사를 헤쳐오면서 헤쳐모여를 반복했던 야당 인맥이 비로소 신민당에 다 모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민당은 78년 12월 12일 실시한 제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81명을 공천해 61명을 당선시켰고, 전체 유효 투표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보다 1.1%를 앞질렀다. 비록 선거제도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선거에서 이기고도 의석 수에서 졌지만, 야당이 여당을 앞지른 것은 한국 헌정사에서 초유의 사건이었다.

신군부 “야당 이름에 신민당은 안된다”

 신민당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는 81년 신군부가 정치 재개를 허용할 때에도 잘 드러났다. 5공화국을 출범시킨 집권 세력이 정당을 만들면서 착안한 점은, 어떤 정당이건 신민당을 연상시키는 이름을 짓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름이 여당은 민주정의당이었고, 야당은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이었다. 그러나 야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은 정치 규제에 묶인 당 인사들로부터 ‘1중대·2중대’라는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다.

 84년 정치 규제에서 풀려난 야권은 신민당이름을 그대로 쓰지 못하고, 편법으로 신한민주당이라는 당명을 사용해 정통 야당의 기치를 세웠다. 결국 85년 2.12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은 돌풍을 일으켰고, 민한당과 국민당은 보잘것없는 야당으로 전락했다. 이런 역사가 말해주듯이 야당의 당명으로 가장 선호되어온 것이 신민당이다. 이후에도 평화민주당을 이끌던 김대중 총재가 일부 재야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당명을 신민당으로 개칭했고, 요즘에는 김동길·박찬종 의원이 합당하여 다시 신민당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한편 정치인들이 당명과 관련해 기억하는 일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건은 아마도 87년 6월 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발생한 ‘김병조 파동’일 것이다. 당시 민정당의 연사로 초청된 코미디언 김병조씨는 대본에 따라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당이고, 통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정당이다”라고 말했다.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을 언론에서는 민주당이라고 불렀지만, 여권에서는 짐짓 통민당이라고 깎아내리던 상황을 코미디로 엮은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김병조씨는 1년이 넘도록 은인자중해야 했다.

 요즘 민자당이 당 이름을 공개 모집하여 정치권에 화제를 뿌리고 있다. 하기야 애초에 민자당은 보수대연합의 내각제를 염두에 두고 일보의 자민당 모델을 베낀 협의가 짙다. 이름도 일본의 자민당을 피하다 보니까 민자당이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어떻든 민자당의 신장 개업으로 가뜩이나 계통이 복잡한 한국 정당사는 또 하나의 이름을 추가하게 되는 셈이다. ■ 吳民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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