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가 ‘신인사제도’ 회오리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5.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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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들 “경영혁신 위해” 적극 도입 움직임…노조측 “고용 불안 가중” 반발

능력과 적성에 따라 직책을 맡기고, 업적과 성과에 따라 보상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신인사 제도’가 새해 벽두부터 금융권 노사 관계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신한·보람 등 몇몇 후발 은행을 빼고는, 줄곧 실시가 보류되어 왔던 신인사 제도에 대해 최근 각 은행이 ‘적극도입’쪽으로 선회할 기미를 보이기 때문이다. 은행측은 기존 연공·서열 중심 인사제도로는 세계화 시대를 맞아 갈수록 높아지는 경쟁 파고를 넘을 수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반면 노조는 은행측이 도입하려는 새 제도가 고용 불안을 가중시키고 노동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한다.

 한국외환은행은 이 문제를 놓고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은행측이 마련한 인사제도 개편안을 노조측이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협상이 무산된 뒤 양측은 노사 공동안을 마련하기로 합의했으나, 그같은 합의가 실제로 실현될지에 대해서는 양측 모두 장담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은행 방하섭 노조위원장은 “조합 내부의 반발이 워낙 거세 논의 자체가진행되지 못하고 있다”라고 분위기를 전한다.

 국내 6대 시중 은행의 하나인 외환은행측이 직군 분류, 절대고과제 도입, 근무평가위원회 설치, 직위·직급 분리운용 체계 도입 등을 내용으로 한 인사제도 개편안을 마련한 것은 지난해 11월이다. 기존 고과 방식이나 직위·직급 체계로는 금융기관간 경쟁에서 이길 수 없고 직원들의 다양한 욕구도 충족시킬 수 없어, 결과적으로 은행측의 경영 혁신 노력에 장애물이 될 뿐 아니라 직원 사기도 떨어진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각 은행이 도입하려는 신인사 제도의 핵심은 직군별 인사관리이다. 이른바 ‘코스별 관리’로 불리는 이 제도는, 은행 구성원 가운데 다수를 이루는 일반 사무직원을 종합직과 사무직 두 코스로 나눠 배치한 뒤, 코스 성격에 맞게 직원 승격을 관리하고 보수도 차별화하는 것이 골자다. 사무직에 배치된 직원은 주로 입금·지급, 예금상담, 창구 서비스, 문서 관리 둥 일반 사무를 담당한다. 반면 종합직 직원은 경영 기획, 대출 심사, 고객 상담, 수출입 승인 등 판단·기획·지도 업무를 맡는다(아래 표 참조).

은행측 ‘코스별 관리'로 인사 적체 해소

 종합직 직원은 사무직 직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나은 대우를 받는다. 같은 급수일 경우 종합직 수당은 사무직 수당보다 더 높게 책정된다. 사무직 3급은 종합직 4급과 동급이다. 급수를 가지고 구조적 격차를 설정한 것이다. 외환은행의 인사제도 개편안에 따르면, 직군 분류 이전에 입사한 직원은 본인 희망에 따라 종합직이나 사무직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직군 분류가 끝나면 얘기는 달라진다. 사무직 직원이 종합직으로 옮기려면 직군 전환 시험을 봐야 하지만 종합직 직원은 시험 없이 사무직 전환이 가능하다.

 외환은행측은 코스별 관리가 이뤄지면, 해당직무에 적합한 연수를 실시하게 돼 업무 적응성을 높일 수 있고, 직원들도 적성에 맞는 업무를 선택해 업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 직군 분류를 토대로 필요한 인력수를 쉽게 파악할 수 있으므로, 적절한 채용 규모를 산출하여 그에 따라 인력배치 작업을 효율적으로 이뤄낼 수 있다고 본다.

코스별 관리는 절대 고과제와 짝을 이룬다. 절대 고과제란 쉽게 말해 근무 성적이나 업무 능력 따위를 점수로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은행측은 이 제도를 통해 온정주의적 인사 관행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이른바 ‘하는 일은 없고 밥그롯 수만 많은 직원'은 발을 못붙이게 한다는 것이다. 은행측에서 볼 때 신인사제도는 은행의 고질이라고 지적되어온 승진 적체 현상과 경영합리화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줄 열쇠가 되는 셈이다.

 실제로 국내 시중 은행들의 만성적인 승진 적체 현상은 거의 치유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다. 최근 각 은행이 명예퇴직제·파트타임제를 도입해 인원감축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한 결과 하급 행원 수는 크게 줄었으나 고위 직급 행원 수는 반대로 늘어나는 현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해 11월 나온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의 자료로도 확인된다. 조흥은행의 경우 80년 1백92명이던 3급 과장 수는 지난해 10월 4백81명으로 늘었다. 반면 한때 3천명 가까이 됐던 6급 여성 행원수는 지난해 10월 1천8백여 명으로 줄었다. 머리는 커지고 몸집은 작아지는 이른바 ‘고위직급화’로 만성적인 승진 적체 현상에 시달리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은행이 당면한 문제점의 상당 부분이 바로 전통적인 연공·서열 중심 인사제도에서 비롯했다고 파악한다. 노동경제연구원 안회탁 연구위원(경영학 박사)은 “국내 기업, 그 중에서도 은행의 인사제도는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성과 없는 기업은 도태하기 마련인데도 그 성과를 정확히 평가해 인사에 반영하지 않아 왔다. 그 결과가 승진 적체라는 더 큰 부담으로 은행측에 돌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근본적인 치유책은 능력 평가를 위주로 한 새 인사제도를 도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은행 노조의 시각은 사측과 크게 다르다. 노조측은 “은행 신인사제의 핵심인 코스별 관리는 직무가 다른 행원들간의 경쟁심만 부추겨 근로자를 분할 지배하는 수단이 될 가능성이 많을 뿐 아니라, 남녀고용평등법이 금지한 성차별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같은 주장이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도 엿보인다. 은행으로서는 맨 처음 신인사 제도를 도입한 신한은행이 본보기다. 82년 창립한 후발 은행이면서도 현재 국내 7대 시중 은행 대열에 당당히 진입한 신한은행이 코스별 관리제를 도입한 때는 93년이다. 새 제도를 도입하면서 은행측이 내세운 기본 취지는 직원들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시켜 능률을 올린다는 것이었다.

 이 은행 인사부 김종원 대리는 “직원들도 이러한 취지에 적극 동의해 신인사제가 노사 합의 속에 시행했으며 지금도 순조롭게 운영되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한다.

노조측 “성차별 은폐 수단으로 악용된다”

 하지만 코스별 관리제는 시행한 지 1년 만에 직원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10월 말 실시된 이 은행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코스별 관리를 비롯한 ‘신인사 제도의 전면 개편’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가 위원장으로 당선된 것이다. 노조측은 코스별관리제가 당초 사용자측이 내세운 취지와는 다르게 운영됐다고 생각한다. 이 은행 윤부영노조위원장은 “일반직(종합직) 행원은 연고지에 관계 없이 근무하고 사무직은 연고지에 근무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사측은 연고지와 관계 없이 배치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자기네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을 지방으로 보냈고. 일부 사무직 행원을 자리가 없다는 구실로 아무 연고도 없는 지점으로 쫓아버린 경우도 있다”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노조측은 코스별 관리가 남녀 직원 성차별을 교묘히 은폐하는 수단으로 쓰였다고 믿고 있다. 직군 선택 과정에서 여자 행원에게는 사무직을, 남자 행원에게는 종합직을 선택하도록 은행측이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윤위원장은 “지점장들은 여행원들이 일반직을 선택하면 ‘언제 지방 발령이 날지 모르는데 그래도 종합직을 하겠느냐’고 으름장을 놓았다. 반면 남자 행원에 대해서는 ‘남자가 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일하는 사무직을 택하느냐’면서 사무직 선택을 가로 막았다”라고 말한다.

 조흥·제일·서울신탁·한일·상업 등 국내의 주요 시중은행 노조는 지난해 12월 신인사제의 문제점을 집중 부각하는 대토론회를 여는 등 최근 들어 공동보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은행에 갓 들어온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신인사제의 합리적 측면을 이해하고 환영하는 기색도 있어 은행측은 여전히 이 제도를 설득력이 큰 경영 혁신방안으로 여긴다.

 ‘인간 중심 경영’이 경쟁력을 약화시켜도 안되겠지만 기업이 경쟁력 강화를 위해 내부를 비인간화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세계화의 또 다른 어려움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

朴晟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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