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땅에 우뚝 세운 ‘자존심’의 첨탑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5.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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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비전 시티’ 설계자 민경식씨 ‘작품 승리’ 안팎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의 질문은 ‘쪽집게’라는 별명 그대로 날카로웠다. ‘비전 2020’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그는 재료와 돔에 관하여 집요하게 물었다. “케이블 돔(기둥 없이 지붕을 설치하는 방식)이 가능한가?”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염두에 둔 듯했다.

 지난해 12월27일, 말레이시아 총리 집무실에서 갖기로 된 비전 시티 설계 브리핑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국의 젊은 건축가 민경식씨(38)는 세 겹의 부담을 이겨내야 했다. 첫째는 민경식이라는 건축가의 자존심이었고, 둘째는 그가 속해 있는 ‘공간’이라는 설계집단, 마지막으로는 한국 건축이라는 짐이 그것이었다. 만일 총리 브리핑에서 통과하지 못하면 세 겹의 희망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셈이었다.

 당시 현지에는 일본 회사들이 퍼뜨린 흑색 선전이 나돌았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은 물론이고 현대건설이 건설한 페낭대교에 크랙(금)이 생겼으며, 남산 외인아파트도 무너질 우려가 있어 폭파한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그러나 한 시간에 걸친 브리핑은 대성공이었다. (주)대우와 함께 비전 시티를 시공할 말레이시아 회사인 RHB의 회장은 “총리가 나를 따로 불러, 자신(총리)을 실망시키지 않아서 고맙다고 말했다”고 전해왔다.

 민경식씨는 물론이고 ‘공간’이라는 설계사무소는 말레이시아에서 인지도가 높지 않다. 국제무대는 아직 한국 건축가를 위한 자리를 선뜻 내놓지 않고 있다. 그런데, 세계적 건축가들이 몰려들고 있는 동남아시아 시장의 중심인 콸라룸푸르가 한국의 젊은 건축가의 디자인에 후한 점수를 준 까닭은 무엇일까.

 

“건설회사와 함께 진출한 것이 주효”

 민경식씨는 우선 그 공로를 (주)대우측에 돌린다. 그동안 한국 건설회사는 한국 건축가를 무시했다. 건축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우측의 정보 제공과 배려가 없었다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씨는 대우측으로부터 비전 시티 계획을 알았고, 대우측의 지원 아래 전적으로 설계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비전 시티 프로젝트가 한국 건설회사와 한국 건축가가 함께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좋은 모델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93년 당시 아시안게임 유치를 구상하고 있던 태국 정부를 상대로 체육 시설 설계를 제안하기 위해 방콕에 들렀던 민씨는 말레이시아를 방문해 대우 현지 지사를 찾았다. 그에게는 비전 시티와 유사한 프로젝트에 설계자로 접근했다가 말레이시아 건축주로부터 “한국이 어떻게 그런 설계를 할 수 있느냐”는 말로 무시를 당한 경험이 있었다(그 설계는 미국 회사가 맡았다). 그런 그에게 비전 시티 프로젝트는 귀가 번쩍 트이는 것이었다.

 비전 시티는 마하티르 총리가 주도하는 ‘비전 2020’의 일환으로 콸라룸푸르 중심가를 재개발하는 사업이다. 당초에는 말레이시아 토지개발공사가 사업을 주관하다가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투자 회사와 설계안을 동시에 공모했다. RHB와 손잡은 (주)대우는 공간 소장인 민경식씨의 설계 제의를 받아들였다. 93년 9월 말레이시아 공기업부에서는 6~7개 회사의 안이 각축을 벌였는데 민씨의 안이 가장 좋은 반응을 얻었다. 94년 6월 말레이시아 정부는 국무회의를 통해 대우와 RHB, 그리고 민씨의 설계안을 최종 승인했다.

 그러나 그 직후에 문제가 발생했다. 한국 건축가가 총리 브리핑을 통과할 수 있겠느냐고 RHB가 제동을 걸어온 것이다. (주)대우 건설부문의 장영수 회장이 “공간은 할 수 있다”고 맞서 결국 비전 시티 프로젝트 중 일부(쇼핑 몰)를 미국 설계회사에 맡긴다는 조건으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미국 회사는 도중에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설계 자체가 민씨 것보다 떨어졌던 것이다.

 1만4천평 대지 위에 연면적 10만5천평에 달하는 복합 건물인 비전 시티는 오피스 빌딩(지상 30층, 35층) 세 동과 호텔(지상 34층) 아파트(지상 40층)를 비롯해 상가 · 백화점 · 놀이시설 등이 들어간다. 비전 시티는 98년에 완공되는데 3억5천만달러에 달하는 공사비가 소요된다. 설계비는 2천만달러로 외국의 유명 설계사무소 수준과 같다.

 서울대학교에서 조경학을 전공한 민경식씨는 김수근씨가 60년에 창립한 ‘공간’에 입사해 뒤늦게 본격적인 건축 수업을 받았다. 공간은 올림픽 주경기장을 비롯, 이란의 엑바탄 및 알보즈 주거단지, 수단의 영빈관 등을 설계하면서 독특한 건축 조형과 공간 개념으로 한국 현대 건축을 이끌어왔다. 86년 김수근씨가 타계한 뒤로 그의 제자들이 (주)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대표 장세양)를 설립해 현재 아시아 지역 진출을 적극 시도하고 있다.

 78년 공간에 입사한 민씨는 84년 공간 뉴욕지사장으로 미국에 건너가 86~90년 미국 유수의 건축설계사무소인 S.O.M.에서 일하다가 한국을 기지로 삼아 세계로 진출하자고 결심하고 90년 귀국했다.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주)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 소장(파트너)으로 있으면서 그는 서울 여의도 자동차보험 사옥, 건국대 이과대학, 용추골 휴게소, 광주은행 본점 사옥을 설계했고 지난해에는 청와대 부속 청사 현상 설계에 당선하기도 했다. 그의 건축은 비전 시티에 잘 드러나 있듯이 미래지향적이다. 당연히 멀티미디어에 관심이 많다. 사업과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건축에 대한 욕구도 달라진다는 맥락에서 멀티미디어 시대의 건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건축물이 미술이나 공연처럼 감상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민경식씨는 한국 건축이 해외로 진출하는 첫 번째 길은 작품성이고, 둘째는 적극적인 시장 개척이라고 말한다. 한국 건축 디자인의 해외 진출은 곧 한국 문화의 수출이라고 확신하는 그는 “문화 수출이 모든 수출의 첨병”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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