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 · 김복남] 바다에 떨친 꿈
  • 글 조용준 특파원 ()
  • 승인 199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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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기가 막 끝난 9월의 따가운 햇살 아래 아프리카 서부 가나의 테마 항구는 크고 작은 배로 붐비고 있다. 통관절차를 기다리는 배는 조바심치듯 뱃고동을 울려대고, 통관을 끝낸 배에서는 하역작업이 분주하다.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웃음소리와 아우성. 그 북적거림 속에 고기잡이를 마치고 한달여만에 돌아와 육지에 몸풀 때를 기다리는 참치잡이 어선 3척이 있다.

 어지러운 갑판 위의 한국인 선장과 현지인 선원들은 다소 피로한 기색이지만 만선의 느긋함 때문인지 여유가 느껴진다. 하역작업이 시작되자 냉동실에 저장되어 있던 팔뚝만한 참치가 크레인으로 운반선에 옮겨진다. 배 한척에 실린 참치는 대략 1만6천달러어치. 땀으로 윤기를 더하는 인부들의 검은근육, 참치 비린내, 둔탁한 엔진 소리, 갈매기 울음, 한국인 책임자들의 고함소리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반백의 노신사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신화 창조한 바다의 사나이

 아프코(AFKO · 아프리카-코리아)회장 金福男. 올해 56세. 맨손으로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수산왕의 신화를 쌓아올린 인물이다. 그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선원들과 일일이 이야기를 나누고 하역작업을 점검하느라 바지에 튄 오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김회장은 두시간에 걸친 하역작업이 끝나자 아프코그룹 본사로 향한다. 선박 19척에 한국인 2백여명, 현지인 1천여명이 일하는 거대기업이다. 대대로 이어진 빈곤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이만한 회사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이 나라 최대의 기업은 미국인 합작회사인 알코 알루미늄 공장. 그 바로 옆에 한국인 혼자서 일으켜세운 아프리카 굴지의 기업이 보란듯이 서있는 것이다.

 아프코 본사 앞마당. 각지에서 모여든 생선도매상 아낙들이 그를 알아보고 하얀 이를 드러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자식 이름을 김회장의 성을 따 ‘Kim’으로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조르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그는 인기가 높다.

 3층 집무실에 올라가기 전 그는 부품창고 냉동창고 의무실 은행 등을 한바퀴 돌아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창고 구석에서 일손을 놓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현지인 직원이 눈에 띄자 당장 의무실에 가서 진단을 받으라고 재촉한다.

 3층의 넓은 복도는 서울올림픽 포스터 등 각종화보로 잔뜩 치장돼 있어 한국의 대형 선박회사 건물에 와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사무실에 들어선 김회장은 밀린 서류를 들춰보기 시작한다.

 1시간 가량 사무를 보는 동안 현지인 이사 2명을 방으로 불러 업무지시를 내리고 수시로 한국인 간부들을 전화로 불러내 일의 진척 상황을 보고받는다. 무전기에서 하역 현장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흘러나와 사무실은 마치 군부대 상황실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김회장은 잠시 일손을 놓고 “뒤돌아보면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알 순 없지만 ‘무엇 하나 남기자’는 신념으로 딴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습니다”라는 말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테마항 앞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선박들에 시선을 던진다.

 거친 땅, 검은 대륙에서 20여년을 버텨온 그의 인생역정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속초에서 태어나 해군 하사관으로 제대한 ‘바다 사나이’ 김복남이 아프리카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69년 11월, 원양사업에 두각을 나타냈던 주식회사 동화의 가나 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이다.

 그는 비행기를 마다고 6개월간의 고된 항해 끝에 가나에 도착했다. 선원들의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인생 항로는 어쩌면 불가항력에 의해 바뀌었는지 모른다. 가나 주재원 근무를 시작한 지 몇년 되지 않아 석유파동이 닥치자 동화는 가나에서 철수했다.

 김복남은 2대의 선박을 처분하는 책임을 맡아 가나에 발이 묶였다. 이를 계기로 김복남은 동화를 그만두고 가나에서 사업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외교관 출신 덴마크인과 한국인 한사람, 이렇게 셋이서 수산업 합작회사를 차렸다. 덴마크인이 전체 지분의 50%를, 그리고 한국인 두사람이 나머지를 나누어 갖기로 했다. 바다를 제일 잘 아는 그는 고기잡이 등 선박 운영을 맡았다.

 

“사람 잃은 것이 가장 큰 손해”


 배 3척으로 시작한 이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덴마크인은 투자금액의 절반을 챙기고 손을 떼었다. 한국인 동업자와도 갈라섰다. 아프리카에서 들이킨 두번째 고배였다.

 그는 1976년 아프코수산회사를 차리고 재기를 꾀했다. 해군 장교와 하사관 출신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현재의 한국인 간부진은 이때 모인 사람들이다.

 행운의 여신은 김복남의 편이 되는 듯했다. 가나 앞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생선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매달 매출액이 2~3배씩 늘었다. 출어기간이 짧아지면서 기름값은 적게 들고 고기는 많이 잡히는 곱절 장사가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82년 자체 선박수리소가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제 막 일어서려는 아프코에는 막대한 피해였다. 회사 장래를 비관한 몇몇 직원들이 떠나갔다. “가장 큰 피해는 제 곁에서 사람들이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김회장은 당시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이국땅의 낯설음은 둘째치고라도 통신시설과 전기 · 수도 사정 등이 변변치 못한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벌인다는 것은 사막 한가운데 갇혀 있는 것처럼 답답할 때가 많다. 화재사건 이후 김회장의 사업은 불어났지만 선박 고장이 잦아 애를 먹었다. 김회장은 부족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 손수 자신의 차를 몰고 옆나라 코트디부아르까지 달려가곤 했다.

 언젠가 별빛에만 의지한 채 사바나를 가로지르는 시골길을 달리던 자동차가 수렁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게 된 일이 있었다. 그때 숲속에서 한 원주민이 밀림에서 쓰는 긴 칼을 들고 나타났다. 배짱 하나로 살아온 그였지만 깊숙한 밀림 속에서는 식인 풍습이 여전히 이어진다는 소문을 듣고 있던 터라 소름이 오싹했다. 김회장은 두려움을 간신히 참으며 원주민에게 달려가 “차가 이 모양이니 당신 동네로 가서 하룻밤 자야겠다”라고 선수를 쳤다.


 운이 좋아서였는지, 그 사나이는 엉겁결에 자기 동네로 김회장을 안내했다. 그는 촌장과 어울려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무사히 하룻밤을 지냈다.

 돌아오는 길은 무척 고되었다. 짐차를 겨우 얻어타고 무거운 부품을 품에 안은 채 털털거리는 시골길을 달려와야 했다. 흔한 음료수 한잔, 빵 한조각 쉽게 입에 넣을 수 없었다. 그때의 경험이 뼈에 사무쳤는지 아프코그룹의 대형창고 3동에는 2년치 분량의 선박부품 등 한국에서 들여온 각종 부품이 가득 쌓여 있다

 

농민후계자 양성하고 사원주택도 건설

 일부 비판의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 지역사회에서 그의 입지는 확고한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흔히 그를 ‘주인님’(Master)이라 부르지만, 이러한 호칭이 까닭없이 나오는 것은 아닌 듯싶다. 그가 8년 전부터 운영하는 4백만평의 아프코새마을농장에는 이미 3백명이 넘는 농민후계자들이 교육을 마치고 각지로 퍼져 농업 일선에서 뛰고 있다. 사원주택 건설도 내집 마련이 힘든 직원들에게는 값진 선물이다. 길에 가던 경관들도 그의 감청색 벤츠 승용차를 알아보고 손을 흔든다.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곳에 처음 와서 사귀었던 말단 정부관리나 회사 간부들이이제는 고위관리 또는 기업체의 장이 되었다. 가나 굴지의 기업을 일으킬 수 있었던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현지인이건 한국인이건 가리지 않고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생활 신조 덕택에 그는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정변에도 자신과 회사를 지킬 수 있었다.

 18년째 가나 한인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의 집 거실은 교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는 깊은 밤이나 돼야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때부터 그는 라스팔마스 로스앤젤레스 서울 부산 등 6곳에 퍼져 있는 지사들과 국제전화를 시작한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이나 하듯이 수화기에 대고 큰소리로 업무지시를 내린다. 그때마다 놀란 동네 개들이 짖어댄다. 1시간 가량 이어지던 통화가 끝나고 테마항 한구석에 있는 김회장의 2층집에도 달빛과 함께 고요함이 내려앉는다. 아프리카땅에 9개의 회사를 거느린 그에게 하루는 언제나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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