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지갑 들고 기진한 예비후보들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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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제 합의’ 믿고 미리 뛰었다가 낭패 … 실무작업 해온 내무부 등도 맥풀려

지방자치제 실시가 계속 지연될 경우 가장 덤터기를 쓰는 쪽은 누구인가? 그 답은 야권이 아니라, 정부산하의 내무부와 각 시 · 도라는 역설적인 사실에 일단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무부는 85년 4월 구성된 지자제실무작업단을 다음해 7월에 이사관(2급)을 단장으로 하는 ‘지방자치실시기획단’으로 확대 · 개편하여 지자제 실시에 적극 대비해왔다. 내무부뿐만 아니라 각 시 · 도 또한 올해 6월말까지는 지방의회가 구성되어야 한다는 ‘4당 합의’에 따라 지난 3월말까지 실무적인 준비를 서둘러왔다.

 내무부와 각 시 · 도의 준비상황에 대해 지방자치실시기획단장인 曺海寧씨는 “법령 정비, 지방의회 의사당과 운영예산 확보, 지방재정력 확충 등 단기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것은 3일말까지 모두 끝냈다”고 말하고 있다. 3월까지 실무적인 준비가 모두 끝남에 따라 지자제는 서울시의 한 관계자 말마따나 “정치권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 후 지자제 실시가 유아무야되면서 지방의회 의사당으로 쓰기 위해 임대 · 신축한 건물이 유휴시설로 방치되고 준비작업에 참여해왔던 전국의 1천여 전담공무원도 거의 일손을 놓게 되었다. 거기다 지방의회 선거비용으로 책정된 추경예산 6백억원의 전용마저 불가능하게 되어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사장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피해자들로 지방의회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겨냥해왔던 ‘예비후보자’들을 빠뜨릴 수 없다. 지난해 5월 4당중진회의에서 대략의 일정이 합의되면서 불기 시작한 지자제 선거열풍은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한 연말경 극에 달했다. 이 열기는 3당합당이후 지자제 실시가 무망해진 올 상반기까지도 극성을 부렸다. 그동안 예비후보들이 쏟아부은 열의와 투자는 증권 열기를 웃돌았다.

 경남 양산군에서 군의회에 출마하려던 尹勝子씨(여 · 53 · 농장식당 경영)의 경우를 보자. 10년 전 평통자문위원을 지낸 바 있는 윤씨는 평소 정치에 뜻을 두고 있던 터라 지방의회 선거가 있을거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곧 출마의사를 굳혔다. 그 해 여름 한국여성개발원이 주최한 연수에 참석하고 난 후부터는 동네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조사나 단체여행, 경로잔치는 말할 것도 없고 간단한 축구시합 하나만 열려도 ‘지원요청’이 쇄도했다. “남들이 다 한다길래” 군내의 각 가정에 자신의 이름을 박은 부채와 성냥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자제 실시가 자꾸 연기되자 돈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중도에 그만둘 수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를 계속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윤씨는 난처해졌다.

 “너무 오래 기다려서 목이 늘어날 지경이다. 출마희망자 가운데서도 여성들이 재력이 달려 버티기가 더 힘든 것 같다”고 그녀는 최근 심경을 말한다.

 정도는 덜할지 모르나 서울시 중구에서 출마를 준비하던 安承重씨(42 · 민자당 중구지 구당 부위원장)도 정신적으로, 금전적으로 피곤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83년 지자제가 곧 실시될거라는 판단 하에 일찌감치 출마의사를 굳혔던 그는 무려 8년여를 기다림 속에 살다 이제는 힘이 고갈돼버렸다.

 결국은 재력 튼튼한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냐고들 말한다. 민주대학의 張喆勳 연구위원(36)은 예비후보들을 △현역의원과 줄을 대고 있는 부류 △해당 지역에서 기반을 닦아온 30대 초반의 재력가 △출마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눈치작전’을 벌이고 있는 중장년의 재력가 등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이 가운데 둘째, 셋째 유형이 가장 당선가능성이 높으리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말을 바꾸면, 지방의회선거가 ‘지구전’이 되면서 누가 ‘총알’이 많으냐에 따라 대세가 판가름 날 것이란 얘기다.

 

재벌그룹도 발빠르게 움직이다 주춤

 이들 예비후보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지방의원 후보자들을 연수시켜온 단체들이다. 대표적인 단체가 민주대학, 한양대 지방자치연구소와 한국여성정치문화연구소, 한국여성개발원의 지도자연수부 등이다. 이 단체들은 모두 89년 이후 각 1 · 2회씩 출마자를 위한 연수과정을 운영했고 성황리에 마쳤다.

 하지만 최근 지자제 선거열기가 사그러들면서 이 기관들은 연수과정을 계속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다. 작년 9월과 올해 4월, 두차례에 걸쳐 연수를 실시했던 한국여성개발원측의 한 담당자는 “지금처럼 지자제가 미뤄지면 연수를 계속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지자제의 실시가 경영환경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고 발빠르게 움직여온 재벌그룹도 피해자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 연말을 전후해서 재벌기업들은 지자제가 시장판도와 수요구조를 변화시키리라는 판단 아래, 지방 사업장을 강화하고 투자규모를 늘리는 것을 골자로 한 이른바 ‘지방화 전략’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민첩하게 움직인 기업은 정보력과 조직력이 가장 앞서 있다고 인정받는 ㅅ그룹. 이 그룹은 작년 6월 이후 대구에 창업투자사를 설립하고 강원도 평창에다 대규모 위락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땅을 사들였다. 전주지역에 특정종교 연수원을 지어 기증한 것도 지역주민에 대한 ‘선심공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다. 현재는 ㅅ그룹의 위락시설 건립계획이 잠정 중단된 것을 비롯해서 많은 기업들의 지방화 전략의욕이 움츠러 들었다.

 그러나 정치권이 당리당략적 이유로 지자제에 관한 食言을 일삼는 동안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다름아닌 국민이다. 예비후보나 연수단체, 재벌기업들은 지자제의 부수적인효과를 노려 발빠르게 ‘투자’했을 뿐이다. 같은 세금을 내면서도 중앙집권적 행정체계 때문에 불이익을 당해온 다수 국민이 지방자치제 실시 지연의 가장 큰 피해자인 셈이다. 국민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당한 불이익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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