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염없이 울 날 기다리며
  • 편집국 ()
  • 승인 199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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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게재/文益煥 ‘옥중편지’

“95년 통일은 민족양심의 주장”

다음 글은 문익환 목사가 10월20일 형집행정지로 1년 6개월만에 석방되기 사흘 전인 17일, 전주 예수병원에 이감돼 있으면서 구술한 내용을 셋째아들 盛瑾씨가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는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있는 요즈음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어머니를 땅에 묻고 나서 나는

 얼마 안되는 수염이지만

 자라는 대로 내버려두고 싶어졌습니다.

 어머니 무덤 잔디를 매만지듯

 수염이라도 만지작거려야 하겠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몸에 돋은 건데

 어디라고 칼을 대겠습니까

 한올 한올 어머니의 숨결인데

 이 손에 온기가 남아 있는 한

 볼품없는 수염이나마 쓰다듬으며

 어머니 보고 싶은 마음 달랠 겁니다.

 남누리 북누리 한누리되는 날은

 지금보다는 길었을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난 하염없이 하염없이 울 겁니다

 

 혼수상태에서도 통일을 되뇌다가 가신 아버님을 경원선이 굽어보이는 소요산 중턱에 묻어드린 것이 1985년이 막을 내리는 그믐날이었습니다. 그 뒤로 어머님은 5년을 통일을 빌면서 사시다가 통일이 다 되게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눈을 감으신 것이 지난 9월18일이었습니다.

 거의 한 세기에 걸친 민족수난사요 가족수난사인 어머님을 아버님 옆에 모시고 한 봉분을 만들고, 그 위에 잔디를 입히고 나서 저는 슬퍼할 수가 없어졌습니다. 통일에 대한 어머니의 확신이 손바닥으로 나의 수염을 쓰다듬는 감촉만큼이나 확실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통일을 원하시던 아버님 어머님이 통일을 못보시고 돌아가셨다는 일 같은 건 극히 사소한 일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남누리 북누리 한누리되는 날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에 나는 하염없이 울 것만 같습니다. 그 울음도 물론 슬픈 울음이 아니라 기쁜 울음일 겁니다.

 95년까지 어머님이 살아주시기를 바란 나의 마음은 물론 욕심이었습니다. 그러나 95년까지는 통일을 보아야겠다는 것은 욕심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분단 50년을 넘기는 민족적 치욕을 벗으려는 너무나 당당한 민족양심의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멋대로 그어놓은 금을 얼마나 못났으면 50년 세월이 흐르도록 못지우다니, 이건 지하에 가서 선열들을 뵐 면목이 없는 일이요 자손 만대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입니다.

 95년까지 통일을 이룩하자는 것만은 우리가 북에 동조하는 일이 아니라 북이 우리에게 동조하는 일입니다. 95년을 통일의 禧年으로 설정하고 기도하며 추진하기로 한 것은, 88년 스위스 리온에서 모였던 남북 기독교 지도자회의에서 남쪽 기독교 지도자들이 제안하고 북쪽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에 동조하여 합의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기독교 민간단체의 건의를 북쪽은 받아들여 95년을 통일의 해로 공식 설정하기에 이른 겁니다. 이에 문익환이도 한몫 했습니다.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적 치욕입니다.” 이 말을 남쪽에서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북쪽에서는 반색을 하면서 95년까지는 통일을 이룩하자는 결의를 굳히고 기회있을 때마다 재천명하여 이를 공식화했습니다.

 그러면 95년까지 통일은 가능한가. 그것은 분명 가능한 일입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말입니다. 남과 북의 현체제를 평화공존시키면서, 다시 말하면 남과 북의 자치정부가 국방 · 외교까지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하면서(대영연방처럼) 통합정부를 세워 진정한 통일작업을 추진하도록 하고 유엔에만은 한 나라로 가입하는 정도의 통일이라면 95년까지 기다릴 것도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분단 50년을 넘기는 민족적 치욕만은 벗어던져야 합니다.

 지금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 상극 ·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로운 새질서 모색에 여념이 없습니다. 아시아도 결코 예외는 아닙니다. 이 중대한 전환기에 북쪽은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서둘러 남쪽에 대해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하고 있고, 남쪽은 소련 · 중국과 국교를 맺어 북쪽에 대해서 정치 · 외교 경제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아시아의 새질서가 7천만 한민족의 권익보다는 강대국들의 권익 위주로 모색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금세기 초에 우리가 걸었던 비극적인 전철을 다시 밟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통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겁니다. 남과 북의 당국자들은 아무리 늦어도 95까지는 초보단계이기는 할망정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공동목표를 설정하고 대승적인 입장에서 통일에 전력투구해주기를 바라는 심정 간절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는 ‘체제연합 통일방안’을 후퇴시키고 총선거를 통한 ‘1민족 1국가 1체제 통일안’을 제시하여 통일을 20~30년 뒤에나 가능한 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 제안을 하면서 유엔 동시가입을 주장하는 일은 항구분단을 획책한다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한 일입니다. 가뜩이나 불신의 눈으로 남을 보고 있는 북의 견지에서 이 주장이 어떻게 보일 것이냐는 것쯤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 아닐까요. 안타까울 뿐입니다.   더군다나 유엔 가입에 관한 남과 북의 주장은 결코 절충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데도 각자의 주장만 관철하려는 걸 보면서 나부터도 유엔동시가입을 주장하는 남쪽의 저의에  의구심이 이는 걸 막을 길이 없습니다. 북쪽의 의구심을 풀면서 유엔에 동시가입하는 길은 이런 것이겠지요. “유엔에 한 나라로 가입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동시가입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조건을 앞으로 5년 동안 공동노력으로 창출해내면 안될까요?”

 5년이 너무 짧다고 생각되어 10년으로 제안할 수도 있겠지요. 5년까지 갈 거야 없지 않겠느냐 싶으면 3년 안에 하자고 제안할 수도 있겠지요. 정치적인 협상이란 이렇게 쌍방의 제안을 접근시켜나가면서 절충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길이 분명히 있는데도 자기 주장만 관철하려는 것은 통일의지가 과연 있는 거냐고 의심받기에 족한 자세라고 해야하지 않을까요.

 이 점에 있어서 경직되기로는 북쪽도 하나 나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어차피 통일을 95년으로 잡고 있다면 유엔에 한 나라로 가입하는 일도 95년으로 잡았던 거죠. “그렇다면 그전의 과도기적 조처로 유엔 동시가입에 동의해줄테니까 그 대신 95년에는 한 나라로 유엔에 가입하는 일에 동의해달라”고 할 수 있을텐데, 단일의석 가입만을 관철하려는 것은 ‘주고받는’ 정치적인 협상의 길을 떠나 ‘전부가 아니면 공’을 주장하며 상대방의 항복을 요구하는 억지가 되는 것 아닐까요.

 팀스피리트 · 한미 합동군사훈련만 해도 그렇습니다. 나는 작년 평양에 가서 팀스피리트 훈련이야 하건 말건 무시해버려라, 그러면 팀스피리트 훈련은 실제로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팀스피리트 훈련은 이미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팀스피리트 훈련이 소련의 핵공격에 대비한 방어적 성격을 띤 군사훈련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소련의 핵 공격 위협이 실질적으로 완전 해소된 오늘, 팀스피리트 군사훈련은 미국의 군수업체밖에는 아무에게도 의미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하지 못하는 북쪽의 태도는 너무 명분론에 매여 있다는 평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통일의 걸림돌이 되는 팀 스피리트 훈련을 철회하지 않는 남쪽의 고집 또한 의심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지만 안할 수 없습니다. 나를 포함한 다섯 사람, 소위 방북인사들의 문제를 풀지 않고는 민족문제가 하나도 제대로 풀릴 수 없는 ‘고’(무속에서 무당이 풀어야 하는 맺힌 매듭을 뜻하는 순우리말)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3월20일 나는 두 가지 과제를 가슴에 안고 평양으로 떠났습니다. 그 하나는 분단의 장벽을 뚫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제는 이미 성취된 과제입니다. 남과 북의 고위급회담 대표들이 판문점을 거쳐 오고가게 되었습니다. 남쪽 축구팀이 평양경기를 마치고 판문점을 거쳐 내려왔습니다. 이제 곧 북쪽 축구팀이 왔다 갈 것입니다. 남쪽의 음악인들이 갔다가 올 것입니다. 왜 남들은 오가도 되는데 우리만이 안되느냐는 문제를 제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기쁠 뿐입니다. 그리고 이 내왕이 다시 막히지 않기를 빌 뿐입니다. 그리고 이 내왕을 보면서 완전한 통일에까지 이르게 되도록 더욱 더 몸을 던져 노력할 것을 다짐할 뿐입니다.

 둘째 과제는 남과 북의 꼬인 문제들을 풀기위해 북쪽의 통일의지를 타진하고 남북의 통일방안에 합의점을 찾아낼 수 없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방북이 또 하나 꼬임을 보태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건 정말 안타까운 일인 동시에 좀 억울하기조차 한 일입니다. 남북의 꼬인 매듭을 풀기 전에 우리의 매듭을 우선 풀어야겠다는 것이 북쪽의 후퇴할 수 없는 주장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구속에 구애되지 말고 민족의 꼬인 고들을 하나하나 적극적으로 풀어줄 것을 북쪽에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북쪽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건 이해 못할 일은 아닙니다. 자기들의 국가주석을 만나고 간 사람을 역적 괴수를 만나고 왔다는 죄목으로 다스리는 일은 그쪽의 국가 주석을 역적 괴수로 모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지겠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일 때문에 어느쪽에도 불명예가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쌍방에게 다 명예롭게 고가 풀려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유죄선고를 받아 징역을 산다는 일이 북쪽에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지만, 그것이 남쪽에는 불명예가 되지 않는가. 유감천만이게도 그것이 남쪽에게는 더 큰 불명예가 되었습니다. 7 · 7선언을 한 대통령의 명예에 그것은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절절한 소망은 우리의 방북이 남북당국에 꼭 같이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방식으로 해결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맺힌 고에서 시작되어 모든 고가 하나하나 남북 쌍방에 명예롭게 풀려나가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꼬인 고를 푸는 일은 무당들의 임무가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이 땅의 모든 정치인의 원형인 단군이 당골, 곧 무당이라는 것은 아주 큰 뜻이 있어 보입니다. 맺힌 고를 푸는 일은 무당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역사가 기다리는, 아니 이 역사가 만들어내야 하는 정치인은 우리의 문제를 포함해서 모든 꼬인 고를 푸는 일만을 임무로 띠고 온 몸으로 신들려 살아가는 무당-정치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 무당-정치인만이 평화적인 민족통일의 과업을 민중과 함께 민중의 한풀이로 이룩해낼 것입니다.

턱수염을 만지며

하염없이 울 날을 기다리면서

통일염원 46년 10월17일 전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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