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張美熙 “인민배우, 진달래꽃 같다”
  • 이성남 문화부차장대우 ()
  • 승인 199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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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제1회 남북영화제에 남한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고 귀국한 장미희씨 70년대 〈겨울여자〉와 80년대 〈깊고 푸른 밤〉에 이어 올해초〈불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흥행성공’ 영화의 화려한 주역인 그가 난생 처음으로 북한영화인을 만났다. 처음에는 ‘거부감 섞인 호기심’으로 북한영화인을 대했으나 6박7일간(10월9일부터 15일까지) 같이 생활하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식변화를 경험했다고 토로한다.

 

● 지금까지의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 북한배우들과는 심정적으로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들에 대한 인상은 어땠습니까?

 남북영화제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소위 ‘북한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개인적인 호기심, 기대감밖엔 없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호기심을 뛰어넘는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들이 주로 말하는 것은 ‘통일’이었고 홍영희, 오미란 두 여배우도 인사말에서 이 영화제가 “통일의 밑바탕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했지요. 그때까지 나에게는 ‘통일’이란 피부에 와닿지 않는 아주 객관적이고 먼 언어였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통일을 이야기할 때는 굉장히 감정적이었어요. 두 여배우 눈에서 눈물이 어른거리고 목소리가 떨리더군요. 두 사람은 전후 세대인데도 그랬어요. 사실 영화제에 참가할 때 우리 대표단의 기본 생각은 영화예술에 대한 공통의 세계를 찾고, 그것이 앞으로 같이 영화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를 원하는 정도였지요. 그러나 그쪽 사람들은 이 발걸음이 통일의 밑바탕이 돼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두 여배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본적으로 우리는 한민족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이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기대하지 못했던 결과예요. 이쪽 사람들은 약간의 긴장감, 약간의 거부감 비슷한 호기심을 갖고 저쪽을 보았는데 그들을 만나면서 민족 동질성을 찾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만일 다시 한번 만난다면 이제는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서로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긴장 상태에서 들었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수용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쪽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많은 걸 물었는데 나중에 생각하면 하나도 기억이 안나더군요. 그런데 그것은 그쪽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일례로 굉장히 배가 고팠대요. 계속 점심 · 저녁만찬으로 이어지는 미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녁에 숙소로 들어가면 배가 고파 라면을 먹었다고 그래요. 먹는 것이 먹는 게 아니고, 듣기는 듣되 제대로 기억이 안되는 상태였어요.

● 북한영화를 몇 편이나 보았으며 영화에 대한 인상은 어땠습니까?

 이번 영화제에서는 북한영화를 못봤습니다. 교민들을 위해 한국영화, 북한영화가 상영되는 가운데 남북한 영화인은 점심 · 저녁으로 이어지는 만찬에서 계속 만나고 있었죠. 우리는 만남이 중요했기 때문에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신상옥 감독이북한에서 찍은 〈돌아온 밀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좀 빈약하다고 느꼈습니다. 화면 촬영기법 내용 연기가 모두 빈약하다는 느낌이었어요.

● 북한 여배우 홍영희 · 오미란을 만나면서 같은 여배우로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두 여배우가 참 곱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이 입을 열어 무엇을 이야기하기 전부터 여러 가지 모습이 참 순박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요즈음 신문 · 텔레비전에 자주 나는 ‘북한주민의 눈물’이 그전에는 참 신기하고 생소했는데, 그들을 만나면서 이해가 됐어요. 그 체제가 오랫동안 주어왔던 정치적 메시지, 곧 ‘조국은 하나다’‘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열망으로 길들여진 사람들의 모습이었어요. ‘집단최면’‘집단중독’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런 가혹한 단어는 안 쓰고 싶어요. 왜냐하면 이쪽에서도 통일이라는 순수한 의미를 생각하면, 어떤 식의 통일인지, 어떤 방법이어야 하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가슴이 울렁거리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 한국 여배우와 북한 여배우가 상대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을 텐데요.

 한국 배우는 소위 세련을 내세워 굉장히 서구화됐다고 봅니다. 덜 세련됐다는 것은 촌티를 못벗어났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민족이 갖고 있어야 할 아름다움을 ‘촌티’라는 이름으로 눈감아버리고 치워버리지요. 북한배우들은 그런 세련됨 대신에 아주 소박한 아름다움, 고전적이면서도 다소곳하고 여성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미란씨한테 “당신은 진달래꽃 같다”고 했더니 “저는 봄꽃은 싫고 가을꽃이 좋아요”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다시 “내가 좋아하는 꽃은 코스모스인데 그러면 당신은 코스모스 같다”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배우 자체에 어떤 서정성이 깃들어 있는 듯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 체제 안에서 우상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인민배우이고 따라서 위에 올라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권위를 포함한 자존심이랄까, 기품이랄까, 그런 것들이 배어나왔습니다.

●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번 영화제에서는 한국배우보다는 북한배우쪽으로 관심이 모아진 느낌입니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우리쪽에서는 기자들이 많이 참가했고 북한쪽에서는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또 뉴욕은 한국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는 도시니까 북한배우에 대한 관심이 높은 건 당연하다고 봐요. 우리가 만일 친북한 교포가 많은 소련이나 유고슬라비아에 갔다면 반대 현상이 일어났으리라고 봅니다.

● 이번 행사의 성과는 내년에 열리는 한국의 ‘대종상 영화제’와 북한의 ‘비동맹 영화제’에 서로 쌍방을 초청하기로 합의한 점입니다. 그러나 양쪽 정부의 허가가 우선돼야 하지 않습니까?

 민간차원에서 남북영화제를 추진한 것이고, 또 기대하지 않았던 합의사항을 갖고 왔으니 정부가 그것을 적극 후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남북한 인사들이 오가는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있으므로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북쪽 배우들도 힘써보겠다고 약속했고, 모두들 실현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헤어졌거든요. 상업적 성격이 아니고 순수한 영화교류 차원이므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후원해줄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국의 영화는 대자본과 상업주의에 의해 배우가 반생하고 작품이 제작되는 데 비해 북한의 영화정책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운영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를 떠나 연기자로서 한편 부럽다는 생각은 안들었습니까?

 체제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말았지요. 헐리우드, 프랑스영화 등 자본주의 영화는 자유경쟁체제 속에서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보장되죠. 그러나 사회주의체제에서는 예술영화라고 해도 어떤형태로든 기본 메시지가 영화 속에 깔려 있어요. 그쪽에서 추앙받는 인민배우도 촬영소에 전속되어 매일 출퇴근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촬영하는 체제입니다. 물론 배우에게 그만한 대우를 해주긴 하지만, 배우의 활동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창의력보다는 당을 위해 연기하는 것이지요. 당은 대중의 마음을 끌기 위해 영향력이 큰 영화매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인민배우제도를 만들어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주는 등 배우의 위치가 격상되긴 하겠지만, 전체 구조 속에서 그것을 파악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배우 수난시대’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많은 여배우들이 언론에 의해 피해를 입어왔습니다. 장미희씨도 “혹독한 군사문화에 의해 잔인하게 피해를 입은 경우”라고 말합니다. “그 보도는 부당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 아닐까요?

 누군가가, 가령 언론중재위원회가 결백을 입증해주고 또 몇몇 언론이 그 사실을 보도한다고 해서 그 수많은 신문 · 잡지들이 일일이 그 사실을 시인할까요. 그 가능성을 저는 의심해요. 그런 것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어요. 기본적으로 이 사회가 사람과 사람간의 사랑이라든가, 인권이라든가, 생명에 대한 진정한 존엄성 등과 같은 가치를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이것은 여배우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야 누구나 호기심을 가질 수 있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고, 좋아할 수 있는 배우니까, 또 대중문화의 속성이 그런 거니까 하고 접어둘 수도 있어요. 앞으로 세월이 지나면 점차로 나아지겠지요.

● 어떻게 하면 연예기사 풍토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보십니까?

 연예기자의 의식도 높아져야 하겠지만 그 이전에 연예인에 대한 대중의 시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연예인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이유없이 사생활이라든가, 나름대로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 뭔가가 있어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나의 일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의 연기력이 나빠지는 것도 아니고…. 예를 들어 신부님에게는 신부님이 가질 수 있는 상식선 안에서 질문을 하지만 연예인에게는 그런 울타리가 없습니다. 10대의 선망의 대상, 그런 시각에서 연예인을 대하죠. 그러니 그 사람의 일에, 연기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가 누구랑 커피마시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또 화가나 음악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을 지성인으로 보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어느 가수나 어느 배우를 좋아한다고 하면 얕잡아보곤 합니다. “아휴! 왜 그런 사람을 좋아해” 하는 식이죠.

● 자기 자신의 연기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사실 어떤 평론가도 배우의 연기에 대해 평가해주지 않는 게 우리 영화계 현실입니다. 저는 스스로 제 연기를 3기로 나눕니다. 제1기는 〈춘향전〉부터 〈적도의 꽃〉까지, 제2기는 〈깊고 푸른 밤〉부터 〈황진이〉까지, 제3기는 이제부터 시작된다고 봅니다. 김호선감독의 〈사의 찬미〉촬영을 11월부터 시작할 예정인데, 지금 생각은 많지만 아직 정리가 안되었어요. 제1기 때는 욕심, 인기 등을 염두에 두고 자기가 독보적 존재라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면, 제2기에 들어서서는 도교에 관심이 있어서 도교의 리듬, 심성을 연기에 반영했습니다. 버리는 데, 여백을 만드는데 애를 쓰면서 ‘백지가 되도록’ 연기했죠. 제1기의 ‘보여주는 것’과 제2기의 ‘여백을 남기는 것’ 두 가지를 하나로 만들어 제3기를 창조해야 하는데 지금은 골치가 아파요.

● 좋아하는 연기자는 누구입니까?

 국내 배우로는 전무송씨입니다. 같이 연기하면서 참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두들 ‘자기를 위하여’ 경쟁을 벌이는 연기 풍토에서 전무송씨는 ‘상대를 위하여’ 연기하는 배우입니다. 물론 그것은 자기를 더 크게 만들기 위한 방법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배우는 참 드물죠. 외국 배우로는 베네사 레드 그레이브와 피터 오툴입니다. 두사람 다 영국배우입니다. 영국식 연기는 우아하고 연극 연기 같고 전통적 연기라고 할까요.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미국식 연기와는 달리 영국식 연기는 ‘보는 맛’이 있어 이들을 좋아해요.

● 여러 감독과 작품을 했는데 특히 어느 감독을 좋아합니까?

 돌아가신 하길종 감독입니다. 〈속 별들의 고향〉을 같이 찍었는데 그분은 그 시대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작품에 그 사람의 변함없는 메시지가 있었고, 또 아주 오래전 작품인데도 영화적 감각이 지금 보아도 좋습니다.

● 20대에 버림받은 ‘청순가련형’역을 많이 맡으셨는데 실제 모습은 밝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삶을 보려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어떤 면이 그런 연기를 가능하게 했다고 봅니까?

 제가 명지대학에서 강의할 때도 학생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그런 정서, 그런 심성, 그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 연기를 잘도 해낸다고 생각하기 쉽죠. 영화 이론에는 ‘정서적 기억’이란 것이 있습니다. 전혀 관계없는 경험이 그런 연기를 만들어내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연기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아이가 그 상황을 알기 때문에 우는 게 아니죠. “너 이따 때려준다” 해도 울고, “너 울어, 이따 사탕줄께” 해도 웁니다. 영화에서 필요한 것은 그 아이의 감정상태를 뽑아내는 것입니다. 20세에 제가 알고 있던 가장 큰 슬픔은 입시에 낙방한 절망감이었죠. 그 절망을 상기하고 울었습니나. 그런데 이제 겨우 20세 먹은 사람에게 30세의 슬픔, 40세 넘은 ‘한’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눈으로 보는 게 그 당시 연예기자의 한계가 아니었나 여겨집니다. “청승맞게 잘도 한다” 하고 의심쩍은 눈으로 보지만 20세 먹은 아이가 그런 무슨 엄청난 슬픔을 알겠습니까.

● 연기자로서 자신의 강점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관찰하는 버릇입니다. 머리털이 빠질 정도로 관찰을 많이 하고 사고를 많이 하는데, 그런 버릇이 연기의 밑바탕이 되지 않나 싶어요. 어느 수준 이상의 배우들은 기본 테크닉에 있어 연기력은 대개 비슷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주 뛰어난 배우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데는 상상력이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제 경우에는 상상력이 많은 편입니다. 무당 ‘을화’라고 하면 눈앞에 어울지는 모습이 있고, ‘윤심덕’하면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이 눈앞에 꽉찹니다. 그런 환상을 실제 연기에 활용하곤 합니다.

● 텔레비전 드라마 〈역사는 흐른다〉에서의 장미희씨 연기에 대한 반응이 아주 좋더군요. 텔레비전 연기와 영화 연기와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소리에 많이 의존하는 텔레비전 연기는 자연스러움에 바탕을 두죠. 물흘러가듯 자연스럽고 순하고 부드럽고 오래 가고, 이렇게 흘러가다가 어느날 갑자기 소용돌이치기도 하고, 자꾸 익숙해져야하는 게 텔레비전의 속성이에요. 이에 반해 영화 연기는 압축된 농도가 있어야 됩니다.

● 결혼에 대한 계획은?

 안하는 건 아니예요. 못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할 상대가 없다는게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빨리 해야 될텐네… 적어도 내년까지는… 꼭 말하자면 남편은 나와 다른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밖에 나가도, 집에 들어와도 영화일의 연속이란 것은 나를 미치게 할 것 같아요. 집안이 곧 ‘바깥일’의 준비 작업장이 되고 모든 일이 집안에서도 행해진다면 집이라는 게 일터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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