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는 여당을 걱정한다
  • 최일남 (소설가 본지칼럼니스트) ()
  • 승인 199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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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를 우리 정치에 국한시켜 생각할 때, ‘표본실의 정치’를 구경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들리는(憑依妄想) 수가 가끔 있다. 아니다. 죽은 표본 아닌 산 현실을 통해 기기묘묘한 생김새를 목격하는 셈이다. ‘땃벌떼’나 ‘사사오입’으로 표징되는 더럽고 서러웠던 정국이라든가, 삼선개헌→유신→10 · 26→12 · 12→5 · 18 따위 정치를 ‘마루타’처럼 생체실험한 내력을 진단하고 나열할 시간이 지금은 없다. 다만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드문 種이나 類를 직시하도록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가운데 ‘공안정국’을 거쳐 ‘단식정국’에 이르렀다고 인식하면 되거니와 오늘의 주요 관심사가 거기에만 그쳐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허약한 여당’ 바로잡기도 새 과제로 등장했다.

 

유권자에게 씌우는 엉뚱한 덤터기와 피해

 이것은 희한한 경험이다. 그리고 허풍을 훨씬 넘는 사실이다. 항상 일사불란하게 표출되는 줄 알았던 여당의 목소리가 ‘각개약진’의 양상을 지나 지리멸렬에 가깝고, 3인3색의 과두사령탑이 피차 동문서답으로 대응하는 현실은 생소하다. 그만큼 여당구조에 대한 안목이 경직된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지난 국회의 날치기에서 확인했듯이 그러다가도 일단 표대결이 벌어지면 20~30개 법안쫌 한 두름으로 엮어 통과시킬 만한 순발력과 저력이 있으니 염려말라는 대답이 돌아올 법도 하다. 그렇기는 하겠지만, 거대여당의 저런 ‘기름과 물’은 한국 정치사에 또 하나의 이상한 표본을 첨가하면서 다음에 열거하는 몇가지 부정적 덤터기를 유권자들에게 씌울 공산을 무시하기 어렵다.

 ① 중심이 없는 내분이 불러들일지도 모를 싹쓸이파의 등장이다. - 동서 해빙의 도도한 물결이나 냉전논리의 무산이 한반도에서만은 여전히 또아리를 트는 상황을 고려할 때 그것은 덧없는 몽상일까. 없는 표본을 일쑤 조작해낸 역기능의 정치적 체질이 아직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태의 연장선상에서 그만한 가상은 나온다.

 ② 행정의 독주와 오만을 낳는다. - 이미 그런 싹은 커가고 있다. 그나마의 정치력이 핵심을 못잡고 흔들리는 마당에서 당정협의는 있으나마나이며, 행정력은 정치를 깔보고 무시하면서 대뜸 우위에 서기 쉽다. 盧泰愚 대통령의 ‘범죄와 폭력에 대한 선전포고’도 그런 각도에서 파악할 수 있다. 정치에서 잃은 신뢰를 공권력 강화로 탕감받으려는 의도와 의지를 드러냈다고 관측하는 것인데, 행정수반으로서의 대통령이 가장 가시적인 실적을 올릴 수 있는 것이 이 부분이기 때문이다. 더 근원적인 정치적 책임이나 여당의 위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능과 위치를 접어둔 채, 왜 대통령의 常數를 상식적인 수준에서 행사하느냐는 불만도 여기서 나온다.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은 직권남용 처벌조항을 삭제한 개정법안을 슬그머니 내놓았다. 삼청교육대의 악몽을 연상시키는 발상도 되살아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시위와 노동운동 억제를 겨냥한 강력조치가 곧 전쟁 선포의 사실상의 대상이라는 것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대통령 자신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현존하는 정치 실종과 무관하지 않다.

 ③ 5공세력의 틈입과 부상 길을 터주었다. - 안 그래도 5공비리는 너무 일찍 문을 닫고 없었던 일로 돌려놓았다. 29억원을 횡령하고 15억원을 탈세했대서 가둔 사람을 풀어주는가 하면 잡아들이고, 그런가 했더니 또다시 보석으로 풀어주는 판에 무엇을 더 말하랴만, 그들이 득세하는 판국이 재현되었을 경우의 역사적 비리를 아프게 실감하는 사람은 여당 안에도 많을 터이다. 백담사는 엘바섬이 아니며 될 수도 없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떠나 파리로 입성하는 3주일 동안,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에서,‘황제 폐하, 퐁텐블로에 도착하시다’로 시시각각 논조를 바꾼 <모니퇴르>같은 신문도, 모르면 모를까 한국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신음소리도 내고 고민하는 모습도 보여주면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인위적 합당의 無謀性과 不毛性이다. 이 점은 차라리 교훈적이다. 정당창출이라든가 혼합에 있어서의 무원칙이나 공약파기가 얼마나 심한 후유증을 앓게 하는가를 가르쳐주었다는 뜻에서 그렇다. 자체내 분란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국정을 터덕거리게 하여 선의의 국민에게 엉뚱한 피해를 준 허물은 부도덕하다.

 그러니까 여당은 언제나 정치적 포만감에 자족하고, 고생을 모르고 자란 부자집 도련님마냥 양지만을 지향하며 위에서 깔아준 레일을 걸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래야 그들 자신과 바깥에서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의 속이 오히려 편하다는 지적은 잘못 익숙해진 이분법의 발로일 터여서 자제하는 게 옳다. 그보다는 오히려 지금같은 구도를 유리잔 속의 파문으로 어물쩍 넘기지 말고 아프면 신음소리를 내면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솔직하게 까발리는 편이 낫다. 그리하여 정파연합의 새 모델을 탈각의 고통을 딛고 모색하는 것이다.

 야당이 강해야 여당이 강해진다는 말을 흔히 들었다. 그런데 요새는 이것이 거꾸로 된 괴상한 세월이다. 골고루 맛보고 체험하는 정치판도 앞에 헷갈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입 가진 사람마다 정치인에게 삿대질을 하고 정치에 실망한 지 오래다. 현대자동차보다 못하기는커녕 세발 자전거만도 못하다는 욕이 쏟아질 기세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정치는 모든 일의 시작이자 끝인 것을. 좋든 싫든 이 바닥 사람들의 총체적 자화상인 것을. 도망갈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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