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거대한소년’이창호
  • 류재용 (소설가) ()
  • 승인 199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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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오락 좋아하는 15세 ‘천재棋士’…올해만 타이틀 2개 획득

천재이야기를 많이 듣고 읽어보았지만 직접 만나볼 기회를 얻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학교성적이 좀 괜찮은 편인 소년들이 항용 그러하듯, 어린시절 나도 수재가 아닐까 하는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가 자신에게 실망하고 꿈에서 깨어나 철두철미 보통사람임을 깨닫게 된 지금의 나에게 천재는 남다른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기원 4층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李昌鎬군은 이미 어느 월간지 여기자와 인터뷰를하고 있었다. 마악 시작했노라고 했다. 5시에는 또 다른 잡지기자와 인터뷰약속이 되어 있다는 귀띔에 나는 조그만 실망과 회의를 가슴에 안았다. 보물이되 이미 세상에 너무도 잘 알려진 보물을 많은 구경꾼들 틈에 섞여서서 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창호군에 대한 첫 인상은 사진에서 보았을 때보다 숙성하다는 것이었다.

 “국수위 쟁취를 축하해요.”

 열여섯살, 만으로 열다섯살밖에 안된 소년이었지만 최고위 · 국수위 등 권위있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니 존대를 해야 마땅했다.

 “언제부터 바둑공부를 시작했나요?”

 이창호군의 두툼한 입술이 한동안 움직인 뒤에야 아주 작은 말소리가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국민학교 일학년, 만 일곱살 때…”“어느 국민학교지요?”“…전주교육대학부속국민학교…”

 일곱살적에, 바둑을 좋아하시는 할아버지(아마추어 5급 정도)가 친구분과 두시는 바둑을 어깨너머로 구경하면서 배우기 시작한 창호군의 바둑실력은 시작한 지 1년만에 아마추어 2단이 되는 놀라운 향상을 보였다. 깜짝 놀란 할아버지는 손자를 전주 출신 프로기사인 전영선씨(6단)에게 데리고가 사사를 부탁했다. 이창호군이 전영선6단에게서 지도를 받으며 대국한 횟수는 오백판이나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영선6단은 창호군의 비범한 자질을 발견하고는 당대 일인자인 曺薰鉉9단의 내제자가 되도록 알선해주었다. 내제자란 스승의 집에서 기거하며 가르침을 받는 제자를 말한다. 조훈현9단과의 시험대국을 거쳐 조9단의 내제자가 된 것이 국민학교 3학년인 만9세 때였고, 조9단 문하에서 수업한 지 2년만인 국민학교 5학년 11세에 프로입단이라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다. 그뒤로도 눈부신 발전을 계속해 89년에는 최연소 4단이 되었고, ‘최다대국’‘최다승’‘최연소타이틀획득’등 기록수립을 거쳐 올해 들어 이윽고 최고위전(부산일보 · 2월)과 국수전(동아일보 · 10월) 타이틀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자신의 스승이며 세계 최고수준의 기사인 조훈현9단에게서 따낸 것들이었다. 이제 이창호군은 한국바둑계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천재성의 발휘없이는 도달하기 불가능한 성과이다. 그러나 만 15세의 소년이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자질을 계발하고 그것을 십분 동원해 목표에 집중적으로 쏟아붓는 일을 해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과정을 얼마쯤 거쳤더라도 나는 이창호군에게서 ‘주어진천재’‘타고난 천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창호군의 외모는 내가 그리고 있던 모습과는 달랐다. 선명하고 날카로운 선,빛나는 눈, 표정에 번득번득 드러나보이는 재기, 폭발성…. 이창호군의 외모에서 풍겨오는 인상은 나의 그런 선입견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이창호군의 외모는 귀염성이 있고 잘 생겼다고 말할 수는 있었지만, 선명하고 날카롭다기보다는 무던한 쪽이었다. 팍팍 발산하기보다는 진득하니 간직하고 있는 유형으로 보였다. 천재형이 아니라 노력형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기야 천재형 외모가 따로 있고 노력형 외모가 따로 있겠는가.

 기사들 사이에 이창호군은 ‘애늙은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창호군의 기풍은 ‘능구렁이바둑’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소년답지 않게 신중하고 침착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능지수 1백39에다가 1년 전에 자신이 둔 바둑을 한 수도 틀림없이 바둑판 위에 재생시켜놓는 뛰어난 기억력임에도 바둑을 둘때면 주어진 시간을 남김없이 소비하면서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는 ‘돌다리 두들겨보며 건너가기’형 기사라는 것이다.

 

어머니 그리울 적마다 바둑공부 열중

 키 1백69cm에 몸무게 60kg의 듬직한 체구도 어른스러움을 더해준다.

 창호군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내 수줍어하는 기색이었다. 여드름이 함박 돋은 얼굴은 앳되고 순진해보였다.

 “취미가 뭐지요?”“…탁구, 전자오락, 홍콩무술영화 관람 정도예요.”

 “음악 좋아해요?”“…조용필씨와 이선희씨의 노래…”

 “여자친구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남자친구는 많아요?”“…한국기원에서 바둑연구생으로 사귄 친구 두엇 정도…”

 고향 국민학교에서는 겨우 3학년을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왔고 서울서 다닌 이대부속국민학교와 충암중학교에도 친하게 사귄 친구가 없다고 했다. 바둑공부 때문이었다. 지금 재학중인 충암중학교에서는 천재소년기사에게 특별한 대접을 해 오전수업만 받고는 하교하도록 조처해주었다. 한국기원에서 대국과 바둑서적읽기 등으로 오후 시간을 보내고, 8시경 조훈현9단 댁 2층에 있는 자기방으로 돌아가 자정 또는 이튿날 1~2시경까지 일본기사들의 명국기보를 復棋하는 등 혼자 바둑수업을 한 뒤 잠자리에 든다. 아침 기상시간은 7시. ‘작은어머니’(조훈현9단 부인)가 식사시중을 들어주며, 조훈현9단에게는 한달에 한번쯤 복기지도를 받는다. 스승도 작은어머니도 이창호군의 사생활에 되도록 간섭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한달에 한두번 올라오시지만, 어머니는 방학 때나 잠깐 고향에 다니러가서 뵙고 온다. 이창호군은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바둑공부에 열중하고 거기서 위로를 얻는 외로운 생활에 익숙해져왔다. 그러한 생활이 이창호군을 내향적으로 만들었고 조숙하도록 만들었을까.

 이창호군은 수줍어하면서도 인터뷰하는 기자들의 의중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여유있고 의젓해보이기도 한다. 아니, 능란한 면마저 보인다.

 “날마다 인터뷰하나요?”

 “국수전타이틀을 딴 뒤루…”

 이창호군의 작년 한해 수입이 7천만원, 국수가 된 후의 상금이 1천3백만원이라는 사실과 함께 나는 문득 걱정스러워짐을 느낀다. 한참 자라나는 어린 천재기사에게 돈과 명예와 인기가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되지는 않을까.

 “적수는 누구지요?”“…유창혁4단…”

 학교와 기원연수생 선배인 유창혁4단에게 통산 4승6패, 작년부터 1승5패로 뒤지고 있다고 한다. 이창호군에게 있어 유창혁4단이야말로 소금과 빛 같은 귀한 존재라고 생각해보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의 포부는 무엇이에요?”“…한국 최고기사가 되어 스승님 은혜에 보답하고, 가깝게는 내년에 있을 후지쓰배 바둑대회에서 우승하는…”

 다음 차례 인터뷰 기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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