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밤중에 행진하라
  • 안병찬 (편집국장) ()
  • 승인 199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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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집행은 흐르는 물과 같아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힘으로 시냇물의 흐름을 막으면 반드시 피해가 생긴다.

 흐르는 물의 이치가 어디 법에만 해당하는 것인가. 흐르는 물 같은 순리가 소용됨을 우리는 삶의 도처에서 경험한다.

 흐르는 물을 거역하자면 억지를 부려야 한다. 억지를 뒷받침하는 것은 힘이요 완력이다.

 힘을 가진 존재로는 군대를 당할 것이 없다. 경찰도 힘을 가졌지만 군대의 그것에 훨씬 미치지 못함은 물론이다. 군대는 분열행진을 통해서도 위용을 뽐내고 완력을 과시한다. 그런데 군대의 분열행진 가운데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이 하나 있어 뇌리에 뚜렷하게 찍혀 있다.

 82년 7월14일 프랑스 최대의 국경일(혁명기념일)을 누비는 군사퍼레이드는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나 오밤중에 거행되었다. 변화는 삶의 법칙이라고 했다. 변화는 삶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 프랑스 군대의 상상외의 행동은 보기 좋았다.

 

국민 위해 거듭나는 군대되려면 상상력 발휘해야

 그날 파리의 밤 9시44분은 황혼무렵이었다. 파리군관구 사령관을 대동한 대통령의 사열차가 샹젤리제 가도에 도열한 각군 부대 앞을 서서히 지나갈 때 저녁노을이 무대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밤 10시15분 사열차가 에트왈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방첨탑에 도착하자 파리이공과대학(에콜 폴리테크니크) 사관생도가 ‘고수부대’와 더불어 선도하는 분열이 개시되었다.

 벌써 땅거미가 지고 샹젤리제의 휘황한 불빛이 자연스럽게 조명하는 가운데 2만 병력은 사열대를 향해 2km를 줄지어 행군해나갔다. 1분에 80보씩 완보하는 외인부대의 특색있는 행진에 뒤이어 엘리제궁 소속 기마부대인 ‘공화국근위대’가 나폴레옹군복을 입고 5백필의 말을 소란하게 휘몰아갔다.

 오밤중의 분열행진은 세상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샹젤리제는 그대로 하나의 무대가 됐고 프랑스 군대는 보무당당, 살기등등하게 행군하는 대신 매우 감각적으로, 부드럽고 우아하게 연기를 했다. 그날 분열이 끝난 시간은 밤 11시15분.

 연전에, 그러니까 6공정부가 출발하고 얼마 안된 어느날 국방부당국자가 걸어온 전화를 받은 일이 있다.

 아무개 장군이 이른바 ‘독대’를 하고 싶어한다는 전갈이었다. 장군과는 만날 마음이 없어 마다했지만, ‘충언’을 꼭 듣고 싶어 그러노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어째서 장군의 대담자로 뽑혔는지 지금도 확실히는 모르겠다. 아마도 군복을 벗고 정치가로 전신한 민정당 대통령 후보를 상대로 공개토론을 했을 때, 그가 체육부장관 시절 집무실 캐비닛 속에 장군정장(그것은 준장 소장 중장 대장복이었다고 한다)을 애지중지하며 보관해놓았던 사실을 들추며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 아닐까 미루어 생각해볼 뿐이다.   아무튼 별 두개를 단 장군과 단독대화를 하게됐다. 장군은 국민을 위해 군이 거듭 태어날 방책따위를 물어왔다. 그날 장군에게 한가지 예로 들려준 얘기가 82년 7월14일 프랑스 군대가 보여준‘오밤중 행진’이다. 필자는 한국군도 오밤중에 행진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라고 주문하면서 귀따가운말을 했었다.

 그런 단독대화의 경험이 있던 터여서 지난 국군의 날 분열행진 때 군이 시청앞 사열대에 시민대표를 초청하여 서게 한 일을 내심으로 환영했다. ‘가식적인 전시용’이라고 흉보는 사람도 없지 않았고 뒤늦었다는 느낌이야 들었지만 필자는 샹젤리제의 행군을 생각하며 서울시청 분수대 앞의 행군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21일 저백, 《시사저널》이 창간1주년을 기념하여 초청한 자크 시라크 파리시장에게 필자는 상식을 뒤집은 군사행진, 미테랑대통령이 그가 지니고 있는 시인적 상상력을 발휘한 결과였다는 오밤중 행진에 관해 물어볼 기회를 가졌다. 그렇지만 시라크 시장은기억을 더듬다가 미테랑씨가 정권출범을 기념하여 통상적인 아침행진 대신 오밤중 행군을 택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당시 시라크를 지지하는 야당 신문 〈피가로〉조차 “심야의 광휘 속에 예능적 ‘기’와 ‘미’를 표현한 프랑스군 초상화”라고 심야공연에 탄사를 보내었건만 시라크 시장이 특별히 마음에 두지 않았다니 다소 실망스럽기도 했다.

 

‘대범죄 전쟁선언’ 같은 힘의 논리로는 안된다

 그 대신 시라크씨는 ‘민생 치안문제’에 관해 이렇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파리시도 치안상태가 엉망이다. 불행하게도 경찰은 시장 소관이 아닌 내무장관 소관이라 나는 자주 장관한테 치안상태를 불평한다. 치안문란행위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일반범죄인데 이것은 경찰인원을 늘리는 길밖에 대책이 없다. 경찰이 늘어나면 그것만으로도 일반범죄의 80%를 예방할 수 있다. 또 하나는 군중시위이다. 그것은 전문적인 기동경찰력으로 대처할 일이다. 그러나 경찰의 물리적 힘에 의존하는 일은 좋지 않다.”

 그는 경찰의 완력에 의존하는 대응은 실효에 의문이 있어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경찰이 힘을 최대로 발휘해야 하는 ‘대범죄 전쟁선언’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것으로 될까.

 힘을 동원한 엄단이나 1회성 일제단속으로는 범죄심리의 면역성만 높이기 십상이다. 경찰청이 생긴다 해도 정치바람을 타지 않을 중립성이 보장되지 못하면 무엇하나. 흐르는 물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범죄와 싸우는 데 오밤중의 행진과 같은 상상력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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