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유년’에서 ‘역사’로
  • 편집국 ()
  • 승인 1990.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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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창작집 《사냥》 펴낸 이병천씨

판소리에 비유한다면 작가 이병천씨(35)의 소설이 풍기는 분위기는 서편제에 가깝다. 성장기의 가족사를 다룬 소설은 정밀하면서도 애잔하다. 이때 그의 문체는 판소리 서편제의 그것처럼 섬세하게 떨린다.

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그 이듬해 경향신문에 소설이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80년대를 지나오며 주목받는 작가 목록에 줄곧 기록돼왔다. 그러나 워낙 과작이어서 요즘 젊은 작가치고는 드물게 10년만에야 첫 창작집을 선보였다. 그의 과작은 80년5월을 그 현장이 아닌 전주에서 지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데, 이는 주눅들림이기보다는 그의 진지함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는 “광주를 단편소설로 쓴다면야 당장 10편이라도 쓸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진지함이 겨냥하는 주제들은 이데올로기의 ‘가축몰이’가 아닌 ‘획일과 획책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사냥》(민음사 펴냄)은 당대의 정치 사회적 이슈와의 정면대결보다는 유년체험을 반추하는 세계가 주조를 이룬다. 가령 피폐화되고 있는 오늘의 농촌현실을 다룬 〈빛나는 졸업장〉이나 〈농약꽃〉에서도 지독하게 가난했던 유년 시절의 되새김질이 두드러진다. 가난 속에서 죽어간 여동생을 그린 〈애기똥풀〉 외삼촌의 정신이상을 관찰하는 〈더듬이의 혼〉 성장소설인 〈단도의 집〉 등은 상대적으로 어머니의 역할과 형제들 사이의 관계가 강조되는 父性 부재 시대의 판화들이다. 이 소설들은 ‘너무 사소설적’이란 비판을 듣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엉엉 울면서 써야했던” 지난날의 한 반성이고 정리였다.

이에 비해 파르티잔과 토벌대에 의한 유린당한 한 여인의 ‘특수한 보상심리’를 그린 〈가위〉나 각종 사냥법이 채집되어 있는, 그 많은 사냥법이 파르티잔의 사냥과 연결되는 〈사냥〉 그리고 파르티잔의 가족을 다룬 〈아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등은 전라북도의 산하 어디에나 지금도 선연하게 남아 있는 6·25의 상흔을 천착하고 있다. 이 부류의 소설은 고 박봉우 시인과의 휴전선 기행을 소설화한 〈휴전선〉에서 현재화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휴전선은 미신이며 괴물”이라고 말한다.

〈발굴〉〈빛나는 졸업장〉 그리고 〈꼬레 한국〉이 그가 당대의 현실을 읽어낸 소설들인데 각각 광주문제 농촌현실 외세문제 등을 소재로 하면서도 작가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넉넉하게 감싸안는다. 물론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주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이미 많은 작가들이 통과한 길이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이 전혀 진부하게 읽히지 않는 그의 작가적 능력이다. 이데올로기의 정직성, 조급성 그리고 소모성에서 한걸음 벗어나 ‘충분한 발효’를 거치기 때문이다.

데뷔 직후부터 장편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전북지역에 널려져 있는 전쟁과 분단의 넋을 노령산맥과 연결하는 작품을 시작할 참이다. 지리한 ‘남부군’을 살려내기 위해 내변산 계곡에서 ‘작전’을 벌이다 몰살당한 ‘야산대’ 이야기를 줄거리로 삼을 작정이다. 당대의 명창 · 이론가로 활약하다가 월북한 박동실과 임방울의 삶과 예술을 조감하는 장면도 쓸 생각이다. 이 두 소설은 《사냥》이 보여준 탁월한 문체가 판소리 동편제의 남성적 힘과 결합되는 새로움을 보여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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