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젓가락과 통상압력
  • 최일남 (소설가 · 본지칼럼니스트) ()
  • 승인 1990.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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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최소단위까지 젓가락으로 집어 올릴 수 있는 동작을 일본인이 계속하는 한, 표면상 아무리 서양화된다 하더라도 일본의 뛰어난 특성은 그다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바이얼린의 거장 메뉴인이 3년전 일본서 한 말이다.

같은 “젓가락 문화권”에 드는 한국에 왔을 때도 그가 비슷한 칭찬을 했을지 어떨지는 상상하기 어려우나, 아직도 젓가락질이 서툴러 해삼을 집어먹는 데 열이면 열 번번이 실패하는 나로서는 겸연쩍은 대목이다.

어떻든 그 나무젓가락마저 우리는 지금 수입해다 쓴다. 그것도 한 번 쓰고 버리기엔 아까운 대나무제가 대부분이고, 헐값으로 밀려오는 다른 동남아산 죽제품까지 합치면 이만저만한 규모가 아니다. 담양 죽세공들이 비명을 지를 법하며, 이런 현실을 두고 ‘파죽지세’의 침략이란 표제를 단 지난 여름의《시사저널》을 기억속에서 뒤적여, 제목 한번 쌈박하게 뽑았었다고 감탄할 여유가 없다.

內政學論 의 체감온도상승을 유감으로 생각

그러나 지난 주 내한한 솔로몬 미국무부 東亞太담당 차관보가 ‘과소비 추방운동’에 불만을 표시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무역마찰의 불똥이나 물결이 이제는 남의 집 문지방을 넘는 순간임을 실감한다. 그러고 보면 미국측은 일본의 ‘너무나 일본적인’ 식행활 패턴을 걸고 넘어진 적도 있다. 경제적으론 초선진국의 위세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먹는 걸 보면 여전히 비서구적이라는 지적끝에 食單을 바꿔야 한다는 볼멘소리를 어느 당국자가 토로했다. 이쯤 되면 “남의 초상에 斷指”하는 선의의 간섭과는 물론 거리가 멀다. “남의 親忌도 우길 만한”몰염치가 경제의 냉혹한 논리를 타고 행세하는 판이랄 수 있다.

아이들의 땅뺏기 놀이와는 다르므로 팔았으면 사기도 해야한다. 그래서 한국은 시장을 거의 개방했으며 끌어안고 있는 오프 리미트 지역은 한 뼘 정도밖에 안 남았다. 그것은 농산물개방으로 요약되는데, 그걸 여는 시간도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은 드물다. 피차 다급하기는 마찬가지거니와, 이때 긴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상대방의 생활방식이나 의식구조를 트집잡거나 건드리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레그 주한미국대사는 최근의 어느 집회에서, 한국에 수입된 미국상품이 차별대우를 받는 것에 반대할 뿐 과소비 억제운동 등에 반대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관여할 바 못된다고도 지적했다. 그말을 믿고 싶지만 역시 연설은 연설이라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다. 무차별 공세로 치닫는 통상압력과 그 속에서 묻어나온 고압적인 자세를 무수히 경험한 처지로는, 내정 學論의 체감온도 상승을 유감스럽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국 상품에 의한 ‘植民床’이 될게 뻔하기 때문

굳이 이해를 구할 것도 없이, 과소비 추방운동은 그 자체의 의미에 국한하지 않는다. 하물며 대미 통상 차원만으로 묶을 일도 아니다. 한국사회의 본질적인 빈부갈등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다고 보아야 한다. 못가진 자의 상대적 열패감은 갈수록 부풀어 정치불안으로 뻗치고, 그 와중에서 생성되게 마련인 도덕적 타락은 아노미性 “막 가는 主義”의 조짐도 확산시킨다. “우리 농산물 먹기 운동”은 양상이 더욱 심각하다. 농민의 사활이 걸려 있다기보다는 빈사상태의 농촌을 그나마 순식간에 거덜낼 공산이 크고, 소비자의 밥상은 밥상대로 외국 산품에 의한 “植民床”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만의 하나, 미국의 날씨나 작황에 신경 쓰지 않으면 안되는 비참한 몰골을 피해보자는 절박한 뜻도 거기엔 포함되어 있다.

물론 미국이 여기까지 “배려”할 필요는 없으며 그럴 형편도 아니다. 그레그 대사가 언급한대로 두 나라가 관계를 맺었던 당시와는 세계가 엄청나게 달라졌으며, “상대방이 언제나 자기 편이라고 당연시하는 건” 위험하다. 마지막엔 역시 실용주의의 안목으로 돌아서는 그의 솔직함이 차라리 당당하다. 그렇다면 말 잘듣는 한국의 고위관료들만 보지 말고 국민들의 성숙해진 운동 역량을 괄목상대해야 한다. 아닌게 아니라 이 사회엔 “관제 민의”와 관주도의 운동이 흔했다. 요새도 그런 경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 한편으로 이 바닥 구석 구석에 태동하여 꽤 뿌리가 튼튼해진 대소 민간조직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소비자단체나 인권기구도 여럿 있고, 나름대로 사회적 모순 개선에 시간과 노력을 바치려는 연대가 활성화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운동을 노상 관과 결부시키는 것은 고정관념의 한계를 벗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 쉽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舊錄이 깊고 여러 가지 도움을 많이 받은 나라와 피차 장삿속으로 서먹해진 건 섭섭한 일이다. 격렬한 감정으로 대응해서 될 사안도 아니다. 다만 덜썩 부피가 커진 한국의 덩치를 의식한다면 그에 걸맞게 자란 자존심값도 계산에 넣어야한다. 동서양의 차이는 거기에도 있는 것이므로, 이쪽과 접촉할 때는 그것도 치부책의 “비고란”에 기입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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