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롭게 물러간다는 것
  • 박권상 (주필) ()
  • 승인 1990.12.0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70년대 중엽 나는 4년간 런던에서 일하면서 꼭 한번 마거릿 대처 여사와 가까이서 환담한 일이 있었다. 공식기자회견이나 단독인터뷰 같은, 그런 딱딱한 만남이 아니라 10여명의 외국인 기자들과 비공식으로 격의없이 간담하는 자리였다. 두시간 남짓한 담소였는데, 세상 돌아가는 뉴스를 다룬 것이 아니라, 옷차림 헤어스타일 취미생활이라든가, 남편 섬기고 아이들 기르고 장보는 이야기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는 옥색을 좋아했다. 피아노곡은 쇼팽을, 관현악은 베토벤을, 술은 코안트로를, 스포츠는 테니스를, 계절은 신록이 우거지는 늦봄을 좋아한다는 것. 여성해방운동을 오히려 비웃고 바쁜 공직생활 속에서도 아침식사만은 반드시 손수 지어 남편을 섬기는 ‘양처형’, 자상하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깔끔하고 규모있는, 너무나 평범한 알뜰주부형이었다.

그러나 일단 정치로 화제를 옮기자 그의 목소리는 한결 높아졌고 단호하고 근엄하고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프라우다〉가 명명한 ‘鐵의 女人’이었다.

 

정치인이 갖춰야 할 자질은 ‘용기와 인내’

“대처 여사, 오늘날 정치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한두가지 지적하신다면”이라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용기를 제일 중요시해요. 정치란 결국 타협입니다. 그러나 타협도 멈추어야 할 선이 분명히 있습니다. 원칙까지 타협하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두 번째로 절실한 자질은 인내심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린 다음 관련된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합니다. 나는 어제 1시간30분이나 전화통에 매달렸습니다. 내가 준비하려는 것이 옳다는 것을 동료 몇 사람에게 납득시켜야 했습니다.”

76년, 아직 대처 여사가 야당 당수로 있을 때 직접 들은 이야기다. 그는 그 전 해 여성으로 첫 당수가 되었고 79년 총선거에서 유럽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보수적인 영국사회에서, 더구나 보수적인 보수당의 당수가 되어 다우닝가 10번지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 잡화상의 딸이 대영제국의 재상이 되다니.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이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常軌逸脫이 얼마나 갈 것인가 하는 냉소적인 시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 번 연거푸 총선거에서 이겨 11년6개월이란 장기집권의 이적을 세웠다. 이적의 비결은 다름아닌 ‘대처리즘’으로 불린 원칙의 고수에서 보여준 용기와 결단력이었다.

대처리즘, 대처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정책이나 강령의 차원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흐름과 태도를 바꿔놓은 생활철학이었다. 제2차대전 후 서구사회를 지배해온 복지사회와 거기서 연유한 안이한 생활태도에 정면으로 도전, 누구나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으로, 근면으로 만이 잘살 수 있다는 개인주의적 노선이었다. 母性國家의 보금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고 일 안하는 사람이 득을 보는 그런 사회주의의 병폐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용기를 요하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사람의 삶이 보장된 체제에서 잔인한 ‘적자생존’의 낡은 원칙에 대한 지지를 소리 높혀 국민에게 호소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구체적으로는 노조의 횡포를 불식시켰다. 1984년 일어난 탄광노조의 파업은 장장 11개월에 뻗쳐, 그로 말미암은 경제적 손실은 무려 80억달러. 그러나 정부(탄광산업은 모두 국영이므로 사용주)는 끝내 부당한 요구를 거부, 마침내 노조 스스로 손을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국 노조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아널드 토인비는 “국가 안의 국가”라고 개탄하였고, 영국을 다스리는 것은 의회가 아니라 노조라는 현실, 이 현실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국영기업을 대담하게 민영화하고 국영주택을 개인에게 불하하는가 하면, 방만한 경영으로 수지가 안맞는 국영기업에는 일체 국고보조를 끊어 적자생존의 원칙을 관철시켰다.

 

“어느 누구도 영국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일 수 없다.”

이 모두, 전후 40년간 복지사회·혼합경제의 테두리 안에 좌우가 합의한 체제에서 벗어나, 고집스런 우파정책으로 국론을 분열시켰고 ‘부익부 빈익빈’의 부작용을 일으켰으나 대처주의는 ‘영국병’을 치유하고 영국경제를 중흥의 길로 인도하였다.

마치 드골이 집권 11년(58~69년) 동안 빈사 직전의 프랑스에 소생과 영광의 터전을 마련했으나 국민투표에 지자 국민의 뜻에 따라 용퇴하였듯이, 대처 역시 그가 쌓아올린 찬란한 지적과는 관계없이 국민과 당의 지지에 균열이 생겨 힘의 한계를 느끼자 서슴지 않고 대권을 내던졌다. 역시 정치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덕목은 용기, 아마도 진퇴의 시기를 판단하고 특히 명예롭게 물러갈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75년 노동당 소속 총리 해럴드 윌슨이 갑자기 대권을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아직 임기가 3년이나 남았었는데…. 그나마 남달리 권력욕이 강한 고집불통의 지도자였고 74년 선거에 이긴 후 인플레이션을 잡고 노사관계를 호전시켜 정치적 안정을 이룬 가운데 발표된 그의 사임은 ‘청천벽력’으로 받아들여졌고, 계속 일하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어느 누구도 영국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일 수 없다.”

멋있는 말, 멋있는 퇴진이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