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발 저린 재벌 “사생활 공개 싫다”
  • 김선엽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0.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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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소설’ 출간 작가에 대한 압력으로 잡음

우리사회에서 재벌기업은 아직도 무소불위의 존재인가. 또 재벌기업의 총수와 그 가족의 생활상은 얘기될 수 없는 성역인가.

최근 이같은 물음을 되뇌게 하는 작은 사건들이 출판계에서 일어났다. 그 주인공은 지난달 ≪유리성≫이라는 기업소설을 출간한 작가 오정인씨(43)와 지난 7월 사회평론집 ≪멍청한 정치 넋빠진 경제≫를 내놓은 유영준씨(55). 두사람은 모두 작품내용 중 일부가 관련기업의 이미지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인해 해당기업으로부터 강도 높은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오정인씨는 지난 20일 치안본부 민원실에 신변보호요청서를 접수시켰고 유영준씨는 9월25일 전무이사로 근무하던 대우전자에 사표를 냈다.

오정인씨는 “해당기업으로부터 출간방해는 물론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의 협박까지 받았다”고 주장했다. 오씨가 치안본부민원실에 제출한 신변보호요청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방송극작가로서 최근 기업소설 ≪유리성≫을 탈고, ≪세계여성≫ 11월호에 인터뷰 내용과 소설 중 일부가 발췌돼 실렸습니다. 그때부터 삼성그룹쪽에서 과민반응을 일으켜 잡지의 신문광고에서 제 인터뷰 기사의 제목을 빼라는 등 음성적인 압력이 들어왔고…중략…11월17일 오후5시 캐피탈호텔 일식집에서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 자리에 나온 사람은 <중앙일보>이사와 삼성그룹의 부장, 중간에서 연결해 준 사람, 저 네 사람이었습니다. …중략…2시간여의 얘기 끝에도 제가 그들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자 그들은 제게 노골적으로 공갈 · 협박을 했습니다. …중략…차를 운전할 때도 수상한 자가 항상 따라다니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으며 저의 집 전화는 이미 보름쯤 전부터 도청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어 불안을 떨칠 수 없습니다. …중략…삼성계열 법인회사인 한국안전시스템의 위장된 청원경찰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돈으로 폭력배를 쉽게 살 수도 있겠지요. …중략…불안에 떨고 있는 저를 꼭 보호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삼성 “협박한 사실 전혀 없다”

오씨는 또 삼성측이 교보문고 등 총판에도 이미 손을 써놓아 계약을 맺는 데 애를 먹었으며 지는 11월26일 밤에야 겨우 기습적으로 몇 군데 서점에 책을 돌릴 수 있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왜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느냐”하고 반문하면서 오씨는 책을 시중에 깔기 직전인 26일까지도 삼성측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고 주장했다. 오씨는 ≪유리성≫을 출간하기 전인 올 봄, 비슷한 소재로 모여성지에 연재하기 위해 쓴 원고 6백매가 사장된 것도 “삼성쪽의 장난이 아닌가”의심한다고 했다(해당 여성지쪽에서는 부인하고 있다). 오씨는 정은사란 출판사를 차려 소설을 출간한 것도 바로 이런 피해의식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뿐만 아니라 “≪세계여성≫에 요약된 소설 내용이 실린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막기 위해 삼성계열의 광고회사 직원들이 편집국을 방문했으나 담당기자가 대지(잡지제작과정 중 인쇄들어가기 전의 상태)를 숨겨 이들을 따돌렸다”“≪세계여성≫ 11월호를 삼성측에서 대거 사들였다”는 등의 얘기도 전해들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삼성측은 피해망상증, 노이로제, 문학가로서의 자질 등의 단어를 거론하며 오씨의 주장에 대해 한마디로 기가막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삼성관계자는 오히려 무고죄로 고소할 생각까지 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번 만난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중앙일보>쪽에서 만날 자리를 마련할 테니 같이 만나보자고 해서 나간 것이지 우리가 먼저 제의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사람의 연락처도 모르고 있던 터라 기사가 실렸던 ≪세계여성≫에 연락해 약속을 했을 정도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주로 듣는 입장이었고 상대편이 오히려 더 많은 얘기를 했다 물론 그때 우리쪽 사람이 정중하게 부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애당초 삼성과는 무관한 내용이므로 그룹차원에서는 신경쓰지 않겠다는 게 우리의 입장이었다.”또 회유 미행 협박 등의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안전시스템이 할 일이 없어서 그 여자를 쫓아다녔겠냐. 출간을 방해하거나 여성지를 대량으로 사들인 적도 없으며 계열내 광고회사 일은 아는 바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책방에 나가봤느냐. 아마 그책이 나와있을 것”이라면서 “우리가 손을 썼다면 어떻게 책이 진열됐겠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삼성측은 오씨가 평소 이맹희씨를 모델로 소설을 쓰겠다고 발설하고 다닌 점, 소설에 등장하는 재벌총수와 장남이 한 여자를 놓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부분이 못내 불쾌하다는 눈치를 보였다.

<중앙일보> 이사도 오씨와 만난 사실을 시인했다. 그는 “만약 책이 나오면 우리도 법적인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를 했을 뿐 돈 얘기나 다른 말을 한 적은 없다. 또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미행하고 도청하느냐. 그 사람 좀 이상한 거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어 “문제의 여성지를 한권 구해보니 논픽션이라고 돼 있어 삼성이 아닌 <중앙일보> 입장에서 만났을 뿐”이라고 못박았다.

오정인씨의 신변보호요청서를 접수한 치안본부 민원실 관계자는 “신변보호란 요인들에게 피해가 예상되는 경우에나 가능한 것”이라면서 “그러나 일반 개인에게도 명백한 위험이 있다고 인정되면 범죄차원에서 조사해 적절한 조처를 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오정인씨에게는 “진정건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고 신변에 위협이 없도록 관할경찰국장에게 지시하였다”는 치안본부장 명의의 답신이 도착해 있는 상태. ≪유리성≫은 지금까지 별탈없이 서점에 진열되어 있다.

 

금전 공세로 연재 중단시키기도

유영준씨의 경우는 양상이 좀 다르다. ‘TV 손자병법’ 등을 쓰면서 방송작가로 활동해온 오씨와는 달리 유영준씨는 상공부 대우실업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대우전자에 몸담았던 비전술인. 그런 그가 매일경제신문사에서 ≪멍청한 정치 넋빠진 경제≫를 출판하게 된 것은 <매일경제신문> 배병휴 편집국장과의 개인적 친분 때문이었다. <매일경제신문> 출판국의 유병필 부국장은 “유영준씨가 상공부 전자공업과장으로 있던 시절 배국장이 상공부 출입기자였기 때문에 그때 두사람이 알게 됐고 유씨가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틈틈이 적어놓은 것을 출판하고 싶다고 해 배국장이 다리 역할을 한 것 뿐”이라고 경위를 밝혔다. 그는 ≪멍청한…≫에 대해 “유씨는 엔지니어 출신인데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열심히 썼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멍청한…≫가 세상에 선을 보인지 얼마 안돼 유씨는 포철과 관련된 내용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정치와 경제분야에 대해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비판을 가한 이 책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2백66쪽 한면. 그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내수요를 핍박하게 해놓고 부탁이 있어야만 조금씩 할당을 해주곤 하였다. 국영기업이면서 독점기업인 포철은 자기의 차관자금에 해당하는 금액은 외화획득에 의하여 상환, 보국한다는 괴이한 경제논리를 펴고 있다. 얼핏 들으면 무척 애국하는 언동으로 들리나 실은 그 반대이다. …중략…어불성설인 궤변으로 국민과 정부를 우롱하고 있다. 국가기간산업에서 나오는 전략적인 상품을 싸게 수출하다 보니 원화절상 압력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왜 그리 깨닫지 못하는지 한심하기 짝이없다. 이러한 포철의 운영방법은 해외압력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좋은 예로 보인다.”

이 책을 입수해 내용을 확인한 포철측은 법적 소송까지 고려했으나 사태확산을 우려한 나머지 포기하고 대우와 매일경제신문사에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측에게는 “그렇게 매도하는 내용을 쓸 수가 있느냐”면서 책 내용의 정정과 본인의 사과를 요구했고 매일경제신문사측에도 내용을 고치도록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유씨는 지난 3월 동경사무소 책임자로 발령받아 근무중이었는데 9월말 본사로부터 전갈을 받고 귀국, 소신을 굽히기 싫어 사표를 던진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유씨는 앞으로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지방에 가 있다는데 유씨의 부인은 “포철관련 부분을 삭제해달라는 요구가 있었을 뿐 그밖의 다른 압력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런 일 때문에 스스로 사표까지 낼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질문엔 “(포철이)워낙 막강한 곳이라 그 누구도 손을 못대고 있는데 (남편은 문제의 부분을)꼭 고쳐야 할 병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책에서)과감히 언급했고 그것이 사실인데 그 부분을 들어내라고 했으므로 그만 둔 것”이라고 답했다. 이같은 우여곡절 속에서 ≪멍청한…≫는 원래 내용대로 판매되고 있는데 기대만큼 판매가 호조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게 출판사측의 전언이다.

기업이나 총수 및 가족과 관련된 글을 썼다가 곤욕을 당한 경우는 또 있다. 가장 비근한 예가 작년 11월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백시종씨(46)의 ≪돈황제≫. 재벌그룹을 모델로 한 ≪돈황제≫가 세인의 관심을 끈 것은 작가 백시종씨의 전력 때문이었다. 백씨는 이미 같은 해 봄 비슷한 내용의 소설 ≪옆으로 걷는 황제≫를 여성지 ≪여원≫에 연재하다 중단당한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난해 4월 퇴사할 때까지 10년간 현대그룹 홍보실에 몸담았던 현대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백씨가 어느날 갑자기 권고사직의 형태로 회사를 나와야 했던 이유를 둘러싸고 온갖 설이 난무했으며 그후 여성지에 게재된 소설도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현재 원주인 한 기도원에 머물고 있는 백씨는 “정규인사에서 부장으로 승진한 바로 다음날 최고 오너가 불러 사표를 권고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이어 “현대측에서 ≪여원≫에 엄청난 금액을 주고 연재를 중단시켰으며 ≪돈황제≫ 출간을 준비하던 출판사에도 거액을 제시하면서 회유했다고 들었다. 익명의 협박전화를 내게 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돈황제≫가 대형서점에 배포되는 통로는 물론, 주요 일간지에의 광고 및 기사게재가 철저히 봉쇄됐다고 한다. 유일하게 백씨의 책 광고를 받아주었던 모 일간지도 결국 돌아섰는데 현대그룹의 광고를 얻지 못하던 그 신문에 이후 현대의 광고가 게재되더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황제≫가 10만부 이상 팔렸다고 밝힌 그는 “올해도 여성지 ≪우먼센스≫에 소설 ≪바람난 황제≫를 연재했는데 역시 중단시키려는 기도가 있었다”고 흥분했다.

 

재벌의 ‘로열 패밀리’는 성역인가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여성지 ≪퀸≫ 9월호에 한국화약그룹의 김승연 회장 어머니 강태영씨와 원로작가 김동리씨의 친분관계에 대해 기사를 쓴 이모 기자도 “한국화약 홍보실로부터 자기네 기업과 관련된 기사를 멋대로 쓰면 되느냐 하는 항의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광고문안과는 달리 기사내용에 별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더이상의 이의제기나 압력행사는 없었다고 한다. 재벌관련 기사를 종종 써왔다는 그는 재벌과 관계된 글이나 기사에 대응하는 재벌들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재벌그룹은 자기들 이야기에 매우 민감하다. 그래도 경영에 관한 문제는 대충 묵인하지만 소위 ‘로열 패밀리’ 관련기사에 대해서는 유리한 것이든 불리한 것이든 기사화 자체에 대해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다.”

기업문학협의회 정을병 회장(작가)은 기업들이 자기네와 관련된 소설 등에 반응하고 간섭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기업소설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은 그야말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 숫자가 너무 적기 때문에 기업이 문제삼는 면도 없지 않다. 일본처럼 물량이 많을 경우 어떻게 하나하나 물고늘어질 수 있겠는가.”정회장은 또 “어떤 이유로든 창작행위를 방해하는 행태는 용납될 수 없으며 작가들도 돈벌이를 위해 흥미위주의 작품을 무책임하게 써내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라며 기업과 작가 양쪽의 인식전환을 촉구했다. 특히 “기업쪽에서 고의적으로 정보를 차단해 자신들의 이미지를 신성화하는 데서 갈등이 시작된다”는 정회장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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