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겨레의 초상 ‘몽실이’
  • 안동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0.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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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언니≫의 작가 權正生씨/“통일 이루기 전에는 진정한 행복없다”

“첫회나 보고 죽 안보다가 요즘 다시 봅니다.” 셋이 앉으면 서로 무릎이 닿는 작은 방이다.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 아침 햇빛이 들어와 그의 얼굴에 ‘손수건만하게’ 닿는다. “내려오지 말라고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린 뒤 한참 동안 말이 없다. 언짢은 낯빛이었다. 李賢周 목사의 표현대로 ‘늘 당하기만 하며 살아온’ 그가 또한번 매스컴에 치이는 순간이었다.

지난 8월부터 텔레비전으로 방송되면서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MBC 주말연속극 <몽실언니>의 원작자 權正生(54)씨는 많은 소갯말이 필요하다. 시골교회 종지기. 국민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동화작가 · 시인. 30년 넘게 전신결핵과 투병중인 ‘쉰이 넘은 총각’. 70년대 중반 1년 총수입이 원고료 2천4백원이던 생활보호 대상자.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쫓겨난 수상작가… 그만 두자. 동화와 문학 그리고 작가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진 어른들에게 이같은 어휘들은 위험하다. 그를 자칫 ‘인간승리’와 같은 세속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몰고갈 우려가 있다. 그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떳떳한, 몇 안되는 작가이며 ‘종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글쓰기와 믿음을 통해 자신의 삶의 지독한 불우를 끌어안고 분단현실을 꿰뚫어보는 이 시대의 ‘순결한 양심’이다.

“처음엔 연속극인 줄 몰랐습니다. 단막극인 줄 알았지요. ≪몽실언니≫가 시청각교재로 쓰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원작자가 보기에, 드라마는 원작과 많은 거리가 있었다. 극본을 쓴 이나 연출자의 애쓴 흔적이 보이지만 아직도 ‘많은 제약’이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는 불특정 다수를 위한 연속극이므로 원작의 변질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며 ‘자포자기’하면서도 몽실이역을 맡은 어린이(임동진양)의 연기는 썩 빼어나다고 덧붙였다.

 

인민군 중에도 ‘사람’을 보는 몽실이

소설 ≪몽실언니≫는 연속극에 비해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사건도 그닥 복잡한 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고향을 등지고 이국땅에서 살다가 8 · 15와 더불어 고향에 돌아온 한 가족의 이합집산하는 밑바닥 삶을 통해 해방공간의 혼란과 6 · 25의 비극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분단현실의 원인을 돌이켜보게 하는 ‘소년소설’이다. 착하지만 야학에서 배운대로 ‘자기의 갈 길’에 대해 고민할 줄 아는 몽실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몽실은 인민군 중에서도 ‘사람’을 발견하며 토벌대의 ‘야만’도 볼 줄 아는 것이다. 역사성과 민중성이 몽실이의 삶과 결합된 아동문학으로, 어른들을 위한 ‘분단소설’ 못지 않게 감동적이다. 아동문학가 李五德씨 같은 이는 ≪몽실언니≫를 읽으면 몇번이나 울었다고 한다.

조탑동 동네 할머니들은 연속극 <몽실언니>의 열렬한 시청자이다. 텔레비전 앞에서 눈물을 훔치곤 한다. 어떤 어린이 독자는 “연속극이 원작하고 너무 틀려서 화가 나요”라는 ‘항의성’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그 어린이는 ≪몽실언니≫를 펴놓고 연속극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속극 <몽실언니>는 각계각층으로부터 박수를 받고 있다. 전쟁세대에게는 다름아닌 ‘그때 그시절’ 자신들의 이야기여서, 화면에 빠져든다. 동일시하는 것이다. 특히 전후세대에게 이 연속극은 부모로부터 듣던 ‘또 그 소리’가 아닌, 새 눈길로 분단아픔을 생각케 한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몽실이의 투명한 마음씨와 사람살이의 어려움을 느낄 터이다.

‘아주 조그만 불행도, 그 뒤에는 아주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몽실이는 건국 이후 줄곧 이땅을 억압해온 반공(냉전)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야만 분단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작가의 단단한 바람의 결과이다. 몽실이는 그의 거의 모든 글에 나타난다. 지난 여름에 나온, ≪몽실언니≫와 비슷 한 구조를 가진 ≪점득이네≫는 물론이고 그 전에 나온 ≪바닷가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부 ‘순수아동문학인’들은 그의 작품이 너무 거칠고 현실비판적이라며 외면하기도 한다.

그는 ‘소년영웅 이승복군’의 ‘반공이야기’가 널리 읽히고 있을 무렵 북에서 넘어온 소년과 남의 소년이 만나 화해하는 ‘불온한’ 단편 <바닷가 아이들>을 발표했었다. 그 작품이 실린 동화집 머릿말에서 그는 “지난 40년 동안 이 반공이란 지휘봉 하나로 모두가 하나의 꼭두각시 인형이 되었습니다”라고 쓰면서 이승복군의 목숨은 공산당의 총탄에 앞서 “이 나라의 정치, 교육, 종교, 문학, 이 모든 것이 서로 공모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의 문학이 분단극복을 주제로 일관해왔다면 그의 삶은 ‘깜박거리는 목숨의 불을 간신히 지펴온’ 고행의 이력 그것이었다.

37년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시절 내내 ‘아무데도 위로받을 데’가 없었다. 다섯살 때 누이들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그를 떠나지 않는다. 밑바닥 인생들이 꾸려가는 환경 속에서도 다행히 동화를 읽었다. 여섯살 무렵 쓰레기 책더미 속에서 혼자 글을 익혔다. 열살 때인 46년 10식구가 귀국, 외가가 있던 경북 청송에 터전을 마련했지만 고향의 품은 따뜻하지 않았고 6 · 25가 터지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부산에서 재봉틀상회 점원을 하면서 혼자 ‘객지생활’을 했는데 이때도 ≪단종애사≫ ≪학원≫ 등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영화구경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밤길을 걸을 때는 ‘굳세어라 금순아’ 따위를 부르던 이 총명한 소년은 그러나 자기앞에 닥칠 엄청난 고통을 알 리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을 오르는데 숨이 가빠온 것이었다. 결핵균이 폐를 갉아내기 시작했으며 늑막염까지 겹치고 말았다. 집 떠난지 5년만에 고향에 돌아갔으나 결핵은 신장과 방광을 거쳐 전신결핵이 되어갔다.

스무살 시절 그의 몰골은 성경의 ‘욥’처럼 참담했다. 5분마다 소변을 보아야 했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밤마다 교회당 바닥에 엎드려 차라리 죽여달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63년 교회학교 교사가 되면서 차츰 건강을 회복했고 성경을 읽으면서 죽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졌다. 집안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어느날 아버지가 그를 불렀다. “정생아, 아버지로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도리가 아니지만, 집안을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니, 네가 어디 좀 나가서 있다가 오너라….”  65년 4월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미리 헤아리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때부터 그는 실제로 거지생활을 했다.

 

‘예수처럼’과 결핵 그리고 거지생활

“주님/어쩌면 이런 자리에/누추하게 함께 주무실런지요.” 다리 밑에서 잠을 자던 거지시절에 쓴 시의 한 귀절이다. 깡통을 들고 다니던 그때 결핵은 다시 번져 부고환 결핵까지 앓게 되었다. 결국 3개월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죽음과 몇번이나 마주치던 그 3개월은 그에게 ‘예수님의 40일간의 금식기도만큼 산 교훈’을 주었다.

65년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함께 살던 동생도 이듬해 결혼했다. 이때부터 그는 혼자 살았다. 68년경부터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 일직교회 문간방에 살면서 종지기로 있었다. 시골의 작은 교회 종을 치면서 “가슴에 맺힌 이야기를 누구에겐가 들려주고 싶어”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69년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현상모집에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강아지 똥>이 당선되었다. 71년에는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입선했다. 이때 있었던 일화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마을사람이 “조금 나은 바지를 입고 가라”고 해서 바지를 덧껴입었는데 심사위원이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어서 돌아가라”며 등을 밀었던 것이다. 이어 73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들어갔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체험했을 고난을 슬프게, 그러나 절망하지 않는 이야기로 그려내 ‘고달프고 원통한 이웃’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지만 않으면 그것이 이웃사랑”이라고 말하는 그는 교회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비판적이다. ≪점득이네≫에서, 교회를 지키려고 하는 목사와 신도를 일꾼으로 쓰려는 인민군 장교가 말다툼하는 장면은 그의 종교관을 잘 보여준다. 인민군 장교는 보다 큰 폭력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목사는 교회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맞서는 것이다. 교회현실을 비판하는 글에서 그는 교회가 “사랑 사랑하면서 결코 용서해서는 안될 사실까지 덮어버렸다”고 꼬집는다. 고통의 현장과 동떨어져 있는 목회자를 향해서는 “성공하는 목사가 아닌, 외치다가 죽는 실패하는 목사”가 되어달라고 호소한다.

그의 밝은 눈과 열린 귀에 농촌의 현실이 안들어올 리가 없다. 올해는 ‘우루과이라운드 태풍’탓에 더욱 우울한 겨울이다. 일찍부터 농약공해와 농촌인심이 흉흉해짐을 염려해온 그는 “큰 문제가 발생해도 농민들은 해결책을 스스로 찾기가 어렵다”고 안타까워한다. 농사와 생활로부터 떨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걱정거리가 또하나 늘었다. 마을에서 시오리 떨어진 곳에 골프장이 들어서는 것이다. 재벌의 ‘금전공세’와 중립을 지키지 않고 재벌 편을 드는 공무원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방콕시장 잠롱이 인상 싶었다는 그는 “덜 먹고 덜 쓰는 검소한 생활자세가 환경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방 한쪽 벽에는 원고청탁 메모가 붙어 있었는데 ‘서울신문 12월10일’이라고 적혀있었다.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달라고 하는데 아직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어린이의 시각으로 통일문제를 짚는 글이 될 것 같다. 독일통일을 그는 통일로 보지 않고 ‘자본에 의한 통합’으로 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돼서는 절대 안됩니다. 강대국들의 역학관계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통일만큼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이뤄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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