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9동 19통3반 빈곤한 ‘빈곤정책’ … 도시 빈민 양산 구조화
  • 글 장영희 ()
  • 승인 1990.12.2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닥불이 어둠을 걷어낸다. 새벽 5시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현대시장 앞에는 작업복 차림에 가방을 맨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다. 인력시장이 선 것이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이 시장은 선다. 하루벌어 하루먹는 이들에겐 날씨가 궂다고 투정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새벽부터 하루를 여는 이들의 표정엔 절박함이 배어 있다.

  인력난이 심하다고 하지만 이들에게 일거리가 매일 생기지는 않는다. 한달을 꼬박 나와도 일감이 걸리는 날은 잘해야 18~20일이다. 특히 겨울은 어둡고 긴 계절이다. 공사도중이거나 중단한 공사를 다시 하는 일감만 있을 뿐 새로 ‘땅을 파는’ 현장은 드물어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 게다가 인부를 건설회사에 알선해주는 용역회사가 많이 생겨 인력시장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팔려가기’를 기다리며 소주로 한기를 떨쳐버리던 ‘한 패’가 모닥불 주위로 모여든다. 이들에게는 ‘이웃’이 지난달에 몇날 일했느냐가 최대 관심거리다. “어디에 현장이 있다”는 일감정보도 교환된다. 드디어 봉고차가 멎고 ‘살 사람’이 나타난다. 대표격인 사람이 앞에 나가 “몇층짜리 건물이냐, 몇평이냐, 얼마 줄 것이냐” 하며 흥정을 벌인다. 조건이 맞으면 순식간에 팀이 만들어진다. 이곳에는 철근공(데구르)과 콘크리트공(공구르)이 많다. 길 건너편은 벽돌공(쓰미)의 집합소다. 이들은 여기서 팔려나가 오후5시(여름에는 7시)까지 일하고 평균 5만원을 받는다.

  동이 틀 무렵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마치 패잔병 같다. ‘데마찌’(하루를 거르는것)를 당한 이들은 ‘하꼬방’(상자집) 같은 막걸리집에서 김치를 안주로 속상함을 달랜다. 한편에서는 도박판이 벌어진다. 새벽공기는 밑바닥인생을 자조하는 이들로 혼탁해진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5동에서 은천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현대시장 좌우로 빈민 밀집지역이 펼쳐진다. 왼쪽이 ‘산동네’로 불리는 봉천9동이고 ‘가마니촌’으로 일컬어지는 봉천5동이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봉천9동은 지난 68년 철거당한 여의도 주민이 이주해 정착한 곳이다. 그후 봉천9동은 사당동 수색 등에서 수재민과 이농민이 대거 몰려와 전형적인 영세민 집단 주거지역이 됐다. 이 동네에는 산비탈에 게딱지처럼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오른쪽으로 자리한 국회단지나 왼쪽의 연립주택 등 반듯한 집들은 산동네의 집을 더 초라하게 만든다. 첫눈은 모든 지붕 위에 골고루 내려 있지만 사는 모습은 공평하지 않다. 산1백2번지라는 지번에 걸맞게 이곳은 하늘과 가장 가깝다. 통로인 비좁은 계단은 꾸불꾸불 끝이 없어 보인다. 가장 높이 오르면 19통3반이다.

  3반에는 18가구가 산다. 집이 10채이니까 한집에 두가구 정도 사는 셈이나, 단독거주 가구도 있으므로 2~3가구나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어깨를 부딪히며 생활하고 있다. 이 동네의 전세값은 독채가 8백~9백만원이다. 사글셋방 한칸을 얻으려면 보증금 1백만원에 월세 5~6만원이나, 2백만원에 4~5만원 정도를 줘야 한다. 주민등록표에 이름만 올려놓은 3명을 빼면 실거주자는 53명. 적게는 1명에서 많게는 4명 이상이 1~2평의 비좁은 방에 기거한다.

  3반 사람들의 주민등록표는 복잡하다. 주소변경난이 10여개나 차 있는 가구가 많다. 농촌에서 무작정 상경, 서울 변두리를 전전하다가 이곳에 흘러들어온 사람이 대부분이다. 봉천동내에서 이리저리 움직인 사람도 쾌 된다. 한 주민은 서울에서만 19번을 이사한 끝에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숨짓는다. 한해에 세 번 이사한 적도 있다는 말이고 이들의 쫓기는 삶을 짐작할 수 있다.

 

家長 대부분이 막노동자

  3반 가구의 경제활동은 불안정하다. 가장의 직업을 보면, 건설업 등에 임시 및 일용노동자로 취업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특별한 기술도 없으며 학력도 낮아 막노동판으로 밀려난 것이다. 도시의 공식적 노동시장에서 번듯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 이들 나름대로의 ‘알음알이망’이 적극적으로 동원된다. 빈민 집단거주지역에 인력시장을 세운 것은 이들의 자구책이다. 안정된 직업으로 꼽는 경비원 환경미화원 사무직 등에 종사해도 저임금에 허덕이기는 마찬가지다. 판매ㆍ서비스직도 독립된 경영을 하는 경우는 한가구도 없고 행상등으로 연명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이 실직한 경험을 갖고 있다. 계절적 실업의 고통은 식료품가게 주인인 고준환씨의 얘기에서도 미루어 짐작된다. “봄ㆍ가을의 매상은 하루 20만원 정도 되나 겨울은 7~8만원도 어렵다”는 것이다.

  가장의 수입만으로 생계를 꾸려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온 식구가 취업전선에 나서야 한다. 부인도 일하고 학교에 다니는 자녀도 직장을 구한다. 이른바 ‘다가구원 취업’이 불가피한 것이다. 실제로 3반 부인들은 거의 파출부로 나가거나 식당 등에서 일하고 있다. 장갑ㆍ볼펜부품 맞추기ㆍ인형부채 만들기ㆍ스웨터 짜맞추기 등 가내공업에 종사하는 부인도 많다. 이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평균 13~15만원선. 69세의 고령자인 池順福 할머니도 취로사업을 나간다. 막노동을 하는 아들의 30만원 남짓 수입으로는 “택도 없다”는 대답이다. 목수인 柳相潤(49)씨의 가정도 가장의 불안정한 수입에만 의존할 수 없어 두 딸이 취업했다.

  3반내에도 빈부차는 존재한다. 월수입이 10만원이 채 안되는 극빈가구가 있는가 하면 드물지만 70만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가구도 있다. 노동력의 질, 가족구성, 학력 등 각자의 조건이 달라 복잡한 양상을 띤다. 현장조사에 다르면 매달 40~50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는 가정이 가장 많다.

  다가구원 취업이 불가피하고 특히 주부의 취업이 늘어남에 따라 양육문제가 심각하다. 문을 잠그고 부부가 일을 나간 사이 불이 나 자녀가 숨진 사건은 그 극단적 예이다. 어머니 부재의 가정에서 자녀들은 경제적 빈곤과 함께 사랑의 결핍이라는 고통도 받는다. 어쩔 수 없이 시립유아원과 탁아소 등에 아이를 맡기지만, 아침 8시께면 그곳에서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들의 몸부림을 보게 된다. ‘희망꾸러기집’ 교사인 金軟淑씨는 “생계를 위해서 맞벌이는 해야겠고, 정아(딸)는 떨어지지 않으려고해 적지만 봉급을 받을 수 있는 교사가 됐다‘고 말한다. 그래도 탁아소 등의 시설에서 보호받고 있는 아이들은 다행스런 편이다. 시설부족도 문제지만 2~4만원의 양육비가 부담스러워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방치해놓은 가구가 상당수 있는 것이다.

  불안정하게나마 취업한 경우, 유일한 밑천인 노동력만을 가지고 이들이 소득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은 노동강도를 높이거나 절대적 노동시간을 연장하는 길뿐이다. 막노동자들은 가능하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인력시장에 나가려 하고, 부인들은 최소한의 가사노동시간을 빼고 가내부업 등 돈벌이에 매달린다. 노동조건이 열악한 가운데 이처럼 오랜 시간 일함으로써 노동능력이 급속하게 떨어지고 있다. 이 지역에는 뇌졸중 심부전증 호흡기질환 등을 호소하는 환자가 많다. 팔다리가 결리고 허리를 못 쓰는 사람은 흔하다. 게다가 극단적인 빈곤에 상심해 정신질환자가 된 사람도 있다.

 

교육열 높지만 “가르칠 돈 없다”

  빈곤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은 가정의 파괴다. 막노동자에게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폭음과 구타, 생활고 등에 시달린 부인의 가출이나 이혼 사례가 많다. 전남 영광에서 무작정 상경, 구로동 등 서울의 변두리지역을 전전하다 지난 89년 봉천동에 흘러들어온 조모씨는 부인이 가출한 상태다. 3반 주민인 崔庚鎭(44)씨는 “돈을 잘 벌지 못한다는 열등의식 때문에 부인을 윽박지르는 남편들이 있다”고 전한다. 경제적 어려움은 자녀의 교육에도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단칸방에 3~4명이 오그리고 자는 공간에서 공부방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자신이 배우지 못해 “내 자식만은 많이 가르치겠다”는 생각이 강하지만 현실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 李順子(45)씨는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는다”고 가슴 아파했다. 영세민 밀집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봉천9동에도 공부방을 활성화하려는 노력이 실행되고 있다. 지난 1일 희망교회 주최로 열린 ‘공부장 마련을 위한 바자회’ 등이 그것이다.

  꼭대기에 사는 것도 억울한데 이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11월 중순께부터 3반 주민들은 비상대책을 세웠다. 한가구만 빼고 모두 연탄으로 방을 덥히고 있으므로 연탄구입은 주민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이들에게는 많은 연탄을 사들여야 한다는 경제적 부담도 무겁지만 연탄상인들이 배달을 꺼려 더욱 조바심을 져야 한다. 게다가 이들은 1장에 2백원하는 연탄을 2백60~2백80원을 줘야 살 수 있다. 계단 4~5개가 늘면 10원씩 연탄값이 비싸진다는 것이다.

  수도사정도 열악하다. 구청은 많은 돈을 들여 加壓場을 만들었다고 생색내지만 여전히 물은 잘 안 나온다. 봉천9동에서 제일 높은 지역인 19통3반은 밤 12시가 돼야 물이 나온다. 그것도 새벽 6시면 끊긴다. 하루종일 일에 시달린 부인들은 이 시간을 이용해 빨래 설거지 등 집안일을 해야 하고 식수로 받아두어야 한다. 겨울에는 수도관마저 얼어 이를 녹이는 고통까지 보태진다. 물론 화장실은 수세식일 리가 없다. 악취도 악취려니와 분뇨를 한번 퍼낼 때마다 가뜩이나 불결한 동네가 더욱 더러워진다. 빈민들의 살기 어려움은 몸이 아플 때 가장 두드러진다. 신경성 빈혈환자인 鄭福順(42)씨는 영세민의료보험카드를 가지고 병원에 가면 진찰을 거절당하기 일쑤라고 호소한다.

 

이웃간의 살뜰한 정 흘러넘쳐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산동네에는 사람사는 정이 흘러넘친다. 19통3반 사람들은 “여기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라고 표현한다. 궁핍 때문에 이것저것 짜증나는 일이 많지만 이웃간의 살뜰한 정은 웬만한 친척보다 낫다고 얘기한다. 공동의 복지기구가 만들어져 있고 결혼식 장례식 등 경조사 때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내집일처럼 애써준다. 김장도 같이 한다. 올 수해 때는 8만원의 성금을 모아 기탁하기도 했다. ‘없이’ 산다는 공통분모가 이들을 더욱 화합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바꾸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회를 보는 눈도 껄끄럽다. 한 주민은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먹고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절대적 빈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정말 싫지만 자식들에게 이 혹독한 가난을 물려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한 청년은 “달동네에 범죄가 많다고 텔레비전에서 떠들지만 오히려 돈있는 사람들이 부도덕한 짓을 저지른다. 돈이 있으니까 그들은 법을 무시하면서도 잘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분개했다. 또 한 주민은 “정치인은 선거때만 반짝 달동네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한다. 말짱 헛말임을 우리는 잘 안다. 정부도 가진자 편이다”라고 정부를 불신했다. 3반에서 만난 사람들의 대체적인 사회의식이다. 우리사회는 가진자 위주여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정치인과 기업인에 대한 불신과 불만도 많으며, 막연하지만 우리 사회는 크게 뒤틀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70년대 이후 뚜렷해진 빈곤구조

  빈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하는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빈곤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해도 우리나라 빈민들의 형성과정은 서구와는 다르다. 사회적으로 강요당한 측면이 더 강하다는 점에서 빈곤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전적으로 돌리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3반에서 만난 빈민들의 “빈곤은 내 탓이라기보다는 남의 탓이 더 크다”는 인식은 그리 틀린 생각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빈곤층은 일제 침탈기의 농민 수탈정책, 한국전쟁 등 극심한 사회혼란기를 겪으면서 양산됐다. 그러나 그때는 이런 외적 요인들이 가라앉으면서 지속적으로 늘어나지는 않았다. 구조적 양산기는 60년대들어 본격화된 산업화와 함께 열렸다. 선성장 후분배 방식을 채택, 서둘러 성장하려는 해외의존적 공업화 전략은 누군가에게 그 성장의 부담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저임금과 저곡가로 노동자 농민에게 부담이 전가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농촌노동력의 이농ㆍ탈농현상이 두드러졌다. 3반에는 농촌의 피폐 때문에 서울로 유입된 이농인구가 상당수 있다. 이는 전라도 출신이 많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빈곤구조는 70년대 이후 더욱 분명해진다. 이농민은 줄기 시작했으나 도시내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가 대자본에 눌려 자꾸 빈곤층으로 물러앉은 것이다. 이제는 내부에서 빈민이 만들어졌다. 자식세대로의 빈곤대물림 현상도 뒤따랐다. 특히 계층상승의 확실한 길인 교육기회에서 이들은 ‘원천봉쇄’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도시빈민의 빈곤탈피를 위한 노력은 국가의 정책적 배려없이는 결실을 거두기 어렵다. 하층노동자-노동빈민-폐질화된 노동자라는 빈곤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적은 것이다.

  빈곤에 관한 정부의 정책은 부족했다기보다는 잘못돼왔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특히 주거정책은 “잘못됨의 극치”라고 주택학자들은 평한다. 집단이주정착지 조성정책, 시민아파트 건립, 합동재개발정책 등은 빈민들을 또 다른 무허가정착지로 쫓아냈다. 또 재개발은 집값 폭등과 투기의 온상이 됐다.

  3반에는 집주인의 얼굴조차 모르는 세입자가 많다. 실제로는 살지 않는 가구원도 상당수 있다. 재개발을 노리고 투기꾼이 몰려들어 10평 남짓한 이곳의 집값이 올초에는 5~6천만원을 호가했다. 산동네의 집값이 평지의 집값보다 두배 가까이 높은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가난은 나라가 구제해야 한다

  재개발지역 세입자들의 철거반대와 주거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조직적으로 터져 나오자 정부는 89년 4월 도시 저소득주민의 주거환경개선을 위한 임시조치법을 만들었다.  이법으로 5월부터 ‘세입자용 영구임대 주택건립’이 의무조항으로 됐다. 그러나 건설업체는 이 조항으로 수익이 줄 것이 예상되자 재개발을 ‘일단 멈춤’한 상태다. 재개발지역으로 고시된 봉천9동에도 재개발추진위원회가 구성됐지만 뚜렷한 움직임을 찾기 어렵다. 재개발을 하려면 대책있는 재개발을 빨리하고, 하지 않으려면 마음놓고 살게 해달라는 주민의 요구가 빗발치고 있을 뿐이다.

  주거대책 외에 정부의 빈곤대책이라면 생활보호정책 정도를 들 수 있다 1인당 월소득 4만6천원 미만에 재산 3백20만원인 가구를 기준으로 잡은 이 정책은 그 자체가 이들의 생활상이나 물가수준을 볼 때 현실성도 없고 선정기준도 공평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많다. 자활보호대상자인 지순복 할머니는 일당 7천원 주는 취로사업비가 생계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항의한다. “그것조차 없었다면 영세민은 더 살기 어려웠을 것” 이라고 봉천9동 金楨秀 동장은 말하지만 도시빈곤층이 구조적으로 다시 생겨나는 지금, 그 정도의 미봉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토개발원의 任昌虎 수석연구원은 “도시빈곤 문제를 푸는 데는 형성요인 자체를 없애 더 이상의 적체현상을 막는 것이 급선무다. 이는 국민경제 및 소득재분배정책, 나아가 장기적 경제ㆍ사회적 개발정책 차원의 큰 틀에서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국가가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임연구원은 여기에 소요되는 엄청난 재정자금은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의 도입, 재산세 및 상속세 강화 등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로 조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분배구조 악화 및 부의 편중 따위의 빈곤층 양산 원인을 제거하는 길이기도 하다는 지적이다. 단기적 대책으로는 자립에 필요한 교육강화 및 고용확대책이나 영구임대주택 등 주거대책을 들 수 있지만 이는 근본적 해결을 위한 장기대책과 맞물려야 완결될 수 있다고 많은 이들이 주장한다. ‘언발에 소변보는 듯한’ 임시방편책이나 지나치게 경제의 효율성을 강조해 형평성을 도외시하는 정책기조는 이제 더 이상 용납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타결되면 농촌에서 농민을 밀어내는 힘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UR이 아니더라도 농산물개방압력이 거세지면서 빈곤층이 더 많이 나올 소지는 얼마든지 있다. 분배구조에 일대 혁신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빈곤층이 양산되는 구조의 고착화를 피할 수 없다. 우리사회는 그 갈림길 앞에 선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정책을 추진할 때는 완급을 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존 롤스 교수(철학)가 그이 저서 《정의론》에서 “가장 어려운 계층인 최빈층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정의”라고 지적한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19통3반의 한 주민은 “산동네에 사니까 산 아래 꽃등불(네온사인 등 서울의 야경)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려워도 굳세게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이 말과 이 사람을 내리누르는 이 사회는 묘한 대조를 이루는 듯 싶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