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츠렸던 노동단체 “새해엔 멀리 뛴다”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1.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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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노조 연대로 체제정비, 정부 강경진압에 맞불지를 태세

새해 임금협상을 앞두고 노사 쌍방의 준비가 한창이다. 노동계가 새로이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가운데 올 노사관계에는 벌써부터 전운이 감돌고 있어 작년과 크게 다른 양상을 보일 것 같다.

 90년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최근 몇 년 가운데 가장 조용한 한해였다. 작년 11월30일 현재 3백 16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하여 전년 동기의 1천5백85건에 비해 80%가 감소했다. 연초 KBS와 현대중공업 사태를 제외하면 큰 충돌도 없었다. 또 타결된 임금 인상률도 9.0% 수준(89년 18.0%)에 머물러 정부의 임금인상 한자리수 고수 정책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정부나 기업측에서는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룬 셈이지만 노동진영으로서는 ‘좌절’의 한해였다.

 그러나 이같은 노사관계 구도는 90년 하반기 들어 새로운 상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패배’를 번전시키기 위한 노동진영의 준비가 눈에 띄게 활발해진 것을 들 수 있다. 노동계의 움직임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작년 12월9일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동조합회의’(이하 연대회의)를 발족한 사실이다. 연대회의에는 현대중공업 포항제철 대우자동차 서울지하철공사 등 16개 대기업 노동조합이 참여하고 있다. 모두 조선 제철 화학 자동차 등 기간산업 부문으로 조합원 수는 10만3천4백명에 달한다. 노조 집행부는 대부분 최근에 선거를 통해 등장한 이른바 ‘민주파’로서 전노협에 가입하고 있거나 가입할 것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정부나 기업측에서는 전노협과 연대회의의 연계 가능성 때문에 전노협 결성 때보다 더 긴장하고 있다.

 노동연구원의 康淳熙 책임연구원은 “대기업 노조의 쟁의는 산업전후방 효과나 사회적 영향에 있어 중소기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며 “연대회의의 임금협상 결과는 여타 기업의 협상을 선도하는 모형설정자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연대회의나 전노협쪽에서는 1월부터 상반기 임금투쟁을 위한 본격적인 체제정비에 들어갈 계획이다. 전노협?연대회의?업종별노련이 참여하는 ‘공동투쟁본부’를 결성할 계획도 세우고 있고 하반기에는 이를 더욱 확대하여 대규모 연대기구로 발전시킬 구상도 하고 있다.

 연대회의 등장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것은 작년 하반기에 집중된 노조위원장 선거이다. 전노협에 따르면 전국 8천개 노조 가운데 약 4천개 노조에서 선거를 치러 이 가운데 70% 정도가 집행부를 교체했는데, 특히 다수의 대기업 노조에서 ‘민주파’ 위원장이 선출됐다고 한다. 이에 따라 작년 상반기에 결성됐던 ‘대기업 노조 대표자 비상대책회의’의 연장선상에서 기존 전노협 가입 노조와의 ‘공동투쟁기구’를 결성하게 됐다는 것이다.

 

형기만료 노동자 복귀하면서 활기

 지하철공사 노조위원장이자 연대회의 공동의장인 鄭允洸(43)씨는 “최근 정부와 자본가측은 87년 이래 노동운동이 쟁취한 성과들을 모두 뒤집으려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운동의 기반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그동안 꾸준히 쌓아온 노동운동 역량에 대한 자신감이 오늘의 연대회의를 낳았다”고 말한다.

 작년 하반기 들어 87년 이래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노동자들이 형기만료로 속속 석방되고 있는 것도 노동운동 활성화의 큰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전노협의 한 관계자는 10~11월 두달 동안에만 1백여명의 구속 노동자들이 석방되었다고 말했다. 아직까지도 사업장에서 동료 노동자들의 지지를 잃지 않고 있는 이들이 복귀하면서 노동조합운동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 노동계의 평가이다.

 산하에 21개 산별노련과 7천8백여개의 단위노조를 포괄하고 있는 한국노총은 연대회의 결성에 대해 내심 못마땅해 하면서도 공개적인 비판은 하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최대의 제도권 노동단체로서 지방자치 의회선거를 앞두고 정치참여를 선언하는 등 나름대로의 입지확보를 위한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노동부나 경제단체협의회측에서는 연대회의 등장과 관련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의 金榮培 조사부장은 “노동단체의 복수화는 노사관계 안정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공식 입장”이라며 “우리나라처럼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격차가 심한 상황에서 대기업 노조끼리의 연대는 불합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노동총동맹(AFL)과 산업별조합회의(CIO)가 미국노동총동맹산업별조합회의 (AFL-CIO)로 통합되고, 일본에서는 總評(일본노동조합평의회)과 連合(전민노련)이 新連合(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을 결성한 것처럼 세계적으로 노동단체의 통합추세가 나타나고 있는데 오히려 제3의 단체를 만드는 것은 노동자의 권익보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간접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노동부는 연대회의가 합법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아예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 관계자는 “특별한 대응방안이 있다기보다는 해당 사업장에서 재의가 일어날 경우 90년과 같이 인사?경영권 교섭금지, 무노동무임금 등의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고 필요시 공권력를 동원하며, 업무조사 등을 통해 조합비의 불법유출을 차단한다는 정도의 기준을 견지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용자측은 상반기 노사관계에 악재가 겹쳐 있어 어려움이 많다고 보고 있다. 경제계에서 꼽고 있는 변수들을 보면 △물가상승 △정부의 공권력개입 자제 가능성 △지자제 선거로 87년과 유사한 상황 도래 △제조업부문 노동투입량 감소에 따른 노동생산성 상승 △비제도권 노조의 공동전선 구축 △노총의 정치투쟁 전개 가능성 등이다.

 

노동생산성 증가해도 임금인상률 한자리수

 기업쪽에서 가장 고심하는 문제는 역시 임금인상률이다. 정부와 기업측이 임금인상의 기준으로 제시해온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최근들어 크게 높아지고 있어 새로운 대응논리를 개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관계자에 따르면 “생산성 증가에 대한 자본기여분과 노동기여분을 분리시키고 물가와 임금의 연결고리를 끊는 방향”으로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정부는 한자리수 임금인상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기업측도 작년 하반기 이후 지표상으로는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시장개방을 앞두고 대외경쟁력 강화를 위해 큰 폭의 임금인상은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반면 전노협쪽에서는 실제 생활비 상승을 감안할 때 임금의 대폭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작년도 임투의 패배를 인정하면서,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그간 일궈온 조직 기반이 모두 무너질 것이라는 위기감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전노협은 40여개 주력 노조를 주축으로 공동교섭을 진행하여 타결이 안될 경우 연대파업 등 공동전선을 구축할 계획이다. 여기에 연대회의 등이 가세한다면 상당한 힘을 결집시킬 수 있어 공권력을 앞세운 정부와의 대규모의 격돌도 예상된다.

 아직 양쪽에서 분명한 방침을 정하지 않은 상태지만 한자리수로 묶겠다는 정부와 대폭인상을 주장하는 노동지영의 대결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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