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뽑은 올해의 인물
  • 최일남 (소설가 본지칼럼니스트) ()
  • 승인 1991.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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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휘장을 닫을 무렵이 되면 개인이나 사회는 결산을 꼬는다. 그걸 共同善의 지향이란 관점에서 압축한 얼굴이 ‘올해의 인물’이다. ‘그렇다면 나도’의 심정에서 착수한 건 아니나, 한번 그래보고 싶어 여기 아홉 분의 이름을 꼽았다. 누구를 넣고 누구는 뺄 것인가를 놓고 여러날 끙끙거렸을망정 ‘私選’임엔 틀림없다. 그만큼 이의 제기의 여지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해를 보내면서 더불어 사는 이웃의 내림을 생각하고, 낱낱의 행위가 드러낸 대 사회적 질문의 뜻을 섬세하게 기억하자는 의도 외에 타의는 없다. 단수 아닌 복수, 그것도 굳이 아홉 명으로 숫자를 국한한 것은 ‘10대사건’류의 각진 규격성이 싫었기 때문이며, 아구를 일부러 맞추지 않고 열어둠으로써 아무나 자기나름의 인물을 추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가나다 순).

● 강철구(KBS 부산 방송본부 기자) : 결국 2심 공판에서도 유죄(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고 대법원에 상고중이지만, 검찰?사법부의 ‘집단 이기주의’ 비판 제기와 함께 그의 기자정신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 현직 검사의 술자리 행태에서 비롯된 공권력의 감정적 조작수사 논란과 취재?보도활동의 위축 우려는 이미 개인 문제가 아니다.

● 김상모 (형을 폭행치사한 경관과 국가를 상대로 9천만원의 배상판결을 받아낸 분) : 사소한 검문시비 끝에 파출소로 끌려간 형이 경관들의 폭행으로 숨지자, 무려 4년6개월 동안이나 형의 억울한 죽음을 증거하기 위해 싸워 이겼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그 뒤엔 또 형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놓고 영국까지 도망쳤던 차주인을 경찰과 함께 잡아들인 동생(김정낙)을 보았다. 접때의 ‘음폐경찰’은 비난받고 이때의 경찰(강남경찰서 교통사고 조사반)은 칭송의 대상이 된 사실과 더불어, 비극의 개인화를 사회정의 실천으로 공유화시킨 의미가 어찌 작으랴.

● 김진명(90송년통일전통음악회에 참가했던 북한 인민배우) : 서도민요의 명맥이 살아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왕년의 한량 기질을 느끼게 해주어 개인적으로 흥미있었다. 김동인의 단편 제목이기도 한 ‘배따라기’가 반가웠으며, 동생을 상봉한 자리에서 터뜨린, “꿈이라면 깨지 말고 생시라면 변하지 말라”가 분단현실의 노랫가락 같아 좋았다.

● 서경석(‘경실련’ 사무국장) : 생긴 지 얼마 안되는 단체의 핵심인물치고는 그의 행동반경이 넓고 잽싸다. 토지공개념, 금융실명제 증발 후에도 활동이 ‘유명유실’하다. ‘경제부정의’를 꾸짖는 선두에 그가 있으며, 목소리는 더욱 옹골지고 커졌다.

● 윤석양(보안사의 민간인사찰을 폭로한 이등병) : 스스로 프락치였던 갈등에 괴로워하며, 양심선언을 하고도 줄곧 부끄러워하는 그의 용기는 암만인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는 ‘90인권상’만으로는 오히려 부족한 부채감을 안는다. 그의 가족?친지들이 시상식장에서 흘린 눈물과 그후 겪고 있는 또 다른 수난은 그분들만의 것일까.

● 이경해(제네바 가트(GATT)본부에서 할복자결을 기도한 농어민후계자협의회 회장) : 사람 따라 이회장의 충격적 행동에 대해 견해가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벼랑에 선 마음을, 하물며 그가 대표하고 있는 농민들의 UR협상 공황증을 연상한다면 그심정 모를 리 없다. “우리 농민들의 절박한 아우성을 호소할 딴 방법이 없었다”는 귀국담을 아프게 새김질할 따름이다.

● 이문옥(전 감사관) : 지난 주 <시사저널> 커버스토리로 넉넉하여 더 보탤 것이 없다. 다만 첨가할 게 있다면 이런 말이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과료조직이야 당분간 그 타령이겠지요. 하나 그걸 떠받치고 있는 땅으로서의 국민들 가슴에 신선한 분수를 뿜어올렸습니다. 요새는 센 물줄기로 강철도 자른다니, 제2, 제3의 이문옥이 나타나 눈꼴사나운 바위를 보기 좋게 다듬는 일을 기대해도 될 겁니다.”

● 이복순(충남대에 50억원을 기증한 할머니) : 일찍 홀몸이 되어 37년간 김밥을 팔아 모은 재산을, 그나마 숨어서 기증하려고 했다는 사연은 淨財의 아름답고 고전적인 사회환원 방식이다. 어쩌면 가난을 연상하게 하는 김밥의 접착력 같은 겸손이 마침내 그런 선의를 쌓았을까. 터진 김밥처럼 각각 노는 인심을 정성스레 모으고 말아준 듯한 공덕이 더 크게 보인다.

● 피코노조 아줌마들(사장이 밀린 임금과 퇴직금을 떼어먹고 미국으로 달아난, 부천 피코회사의 여성노조원들) : 노조위원장 유점순씨 등의 이름 대신 이렇게 불러 죄송하다. 그러나 그쪽이 더 친근하게 들리는 것은 노조원 거의가 아주머니들이기 때문이다. 그중 세 대표는 금년 여름 미국 본사를 찾아 단식투쟁 등 모진 고생을 하고도 타결을 못보고 귀국했다가, 11월초 또다시 원정길에 나섰다. 이와 전후하여 ‘스미다’ ‘티엔디’ 같은 일본기업 상대 여성노조의 성공사례가 있었으며, 얼마전엔 또 호주 웨스트택은행 한국지점의 여성노조원 대표 일행이 노조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호주로 떠났다. 여성들의 서럽고 외로운 싸움의 상징하는 곳에 ‘피코아줌마’들이 있다. 성깔있는 한국여성 만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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