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기를 ‘盧心’으로 넘긴 보통 대통령
  • 김재일 정치부 차장 ()
  • 승인 2006.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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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5년에서 긍정적인 것은 북방외교와 민주화, 失政으로는 경제가 꼽힌다. 소극적 지도 방식으로 일관한 점도 부정적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지도력은 한마디로 ‘수동적 적응형’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을 만들기 보다는 흐름을 타는 방식, 상황 변화에 따라 생각을 바꾸는 형, 과도기에 어울리는 무리없는 지도력. 노대통령의 통치 방식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은 이렇듯 ‘미온적’이다. 노대통령의 지도방식이 그렇듯이 그에 대한 국민의 평가와 인식 또한 ‘보통과 평범’이다.

 《시사저널》과 리서치 앤 리서치가 일반 국민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11월 10~11일)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3분의 2가 넘는 다수(67%)는 노대통령의 지도력에 대해 ‘보통’이라고 답변했다. 그의 지도력이 ‘형편없다’고 응답한 사람 (17.3%)은 ‘뛰어나다’고 응답한 사람(11.2%)보다 다소 많았다.

 87년 노태우 후보의 당선에 대해 지금 국민들은 결과적으로 잘된 선택(29%), 보통(27.1%), 잘못된 선택(30.3%) 등으로 엇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잘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27%)는 ‘전반적으로 평범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박정희 · 전두환 두 정권 때 형성된 지도자의 강성 이미지가 6공화국에 와서 많이 완화됐고, 바로 그 점이 잘된 선택이라고 평가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국민은 노대통령을 모나지 않은 무난한 성격을 지닌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그가 87년 선거에서 내건 ‘보통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성공으로 정착됐음을 뜻한다.

 

애매모호로 일관한 ‘노심’

 노대통령의 정치 행태 중 두드러진 것은 애매모호성이다. 그는 처음에 비교적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것과 합께 타협적이고 남의 말을 잘 듣는 타입으로 보였다. 그러나 후계 문제를 둘러싼 당 내분, 경선 등 소용돌이 치는 정치 과정을 거치면서도 끝까지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이른바 ‘노심’으로 불린 이같은 애매모호한 행태는 정치권으로 하여금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오랫동안 오리무중에서 헤매게 했다. 3당 합당 이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민자당내 각 정파는 그가 의도적으로 구사하는 애매모호한 언행을 정반대로 해석해 아전인수격으로 받아들이기 일쑤였다.

 지금도 12월 대통령선거 관리를 위한 노대통령의 중립의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원래 ‘모호성의 전략’이란 선거 입후보자가 득표를 위해 극단적인 견해 표명을 삼가고 정견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이 전략을 적절히 구사함으로써 일단 합당한 이후 바람 잘 날 없이 시끄러웠던 집권당을 깨뜨리지 않고 이끌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일반 국민은 이처럼 모호한 노대통령의 정치 방식이 우리나라 정치 발전에 별로 나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은 것으로 인식한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응답률(31.6%) 이 나쁜 영향을 미쳤다는 응답률 (19.8%)보다 훨씬 높았다. 응답자들은 ‘노심’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분당 같은 정치적 혼란이나 평지풍파가 일어나지 않은 점을 높이 산 것으로 보인다.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응답은 35.4%를 차지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노심’이 극적인 상황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음을 말한다.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응답은 대구 · 경북 지역에서 47.4%로 가장 높았고 서울과 인천 · 경기 지역에서도 평균치를 웃돌았다. 전반적으로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사무관리직이나 전라 · 광주에서도 ‘나쁜 영향’보다 ‘좋은 영향’이라는 반응이 높게 나와 눈길을 끈다. 그러나 노대통령의 정치행태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책임성 측면에서 지도자의 메시지는 명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 행태는 국내정치 경제 외요 · 안보 분야등 각 부문의 정책에 스며들었다. 대통령을 평가하는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업적 평가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노대통령의 업적으로 북방외교와 민주화에 기여한 점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반면 가장 큰 실정으로 경제가 꼽힌다. 이번 여론 조사에서도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그 가장 큰 이유(44%)로 물가 폭등과 경제 불안정을 들었다.

 

확고한 경제관 없어 정책 일관성 상실

 노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잘못했다는 반응(32.7%)이 잘했다는 반응(25.3%)보다 높았다. ‘보통이다’라는 반응도 36%을 차지했다. 이같은 조사결과를 볼 때 국민은 지난 5년간 노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해 박한 점수를 주었다. ‘보통’이라는 유보 반응도 긍정평가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노태우 후보를 선택한 데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대구 · 경북 인천 · 경기 지역에서도 국정 운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 있어 평균 6% 포인트 가량 낮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노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각 분야별로 보자. 우선 국내 정치와 관련해 그는 세차례에 걸쳐 특이한 결정을 내렸다. 3당 합당, 대통령후보 경선, 집권당 탈당이 그 것이다. 노대통령은 합당으로 거대 여당을 탄생시킨 후 세 정파를 효과적으로 묶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여권에 권력 투쟁을 일상화시켰다. 야당과의 관계를 보더라도 소외된 평민당은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으나 거대 민자당은 야당을 달래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 결과 폭력 날치기 등 의회정치의 파행을 불렀다. 무엇보다 3당 합당으로 인해 금융 실명제 등 각 부문의 개혁 프로그램이 실종됐다. 그러므로 3당 합당의 효과는 별로 없었고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됐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반면 많은 정치 학자는 여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다. 경선에 나섰던 이종찬 의원은‘불공정한’ 노대통령의 태도를 문제 삼아 경선을 거부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경선의 모양이 망가지긴 했으나 노대통령의 경선 시도만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집권당내 후보 경선은 앞으로 정착할 가능성이 높다.

 노대통령의 탈당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우선 선거 관리를 위해 당적을 버린다는 것이 상식에 어긋나고 논리적으로 합리화하기 어려울뿐더러 정치의 책임성 측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탈당이 결과적으로 선거문화가 정착하는 데 기여한다면, 우리 정치의 특수성을 감안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각종 여론 조사에 따르면 국민은 노대통령의 탈당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가장 부정적인 평가가 나온 경제 부문에 있어서는 노대통령이 확고한 경제관이나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성장, 전두환 대통령은 물가 안정에 관한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이를 강력히 추진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의 경우 경제정책의 방향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6공의 경제 정책은 등장하는 사람에 따라 방향이 바뀌었고, 그 결과 정책의 일관성을 상실했다. 금융실명제를 주장한 문희갑씨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들어가고, 안정론자인 조 순씨 후임으로 성장론자인 이승윤씨가 부총리에 기용된 것이 예이다.

 경제 부문에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은 대목은 수출입 구조 다변화, 그리고 경제구조의 안정성과 다양성이 증대된 점 등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전문가가 이것도 정부가 의도하여 이끌었다기보다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이라고 본다. 역설적이지만 정부를 더 이상 믿어선 안된다고 각성한 기업들의 자립심이 커진 것도 긍정적인 측면이다. ‘5 · 8 조치’ 즉 기업들로 하여금 비업무용 부동산을 강제 매각토록 한 정책은 다른 정권이 하지 못한 일로 시행 과정에 다소 무리가 있기는 했으나 취지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노대통령은 외교 · 안보 · 통일 분야에서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 북방외교는 한마디로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단지 수행 방법에 있어 미흡했던 점이 지적된다. 임기 내에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쫒겨 사회주의 국기와의 관계 개선을 지나치게 서둘렀고, 그 결과 ‘졸속 외교’라는 여론에 직면하기도 했다. 6공의 한반도 통일 방안은 과거의 것에 비해 보다 현실을 감안함으로써 북한의 고려 연방안과 협의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정치 생존은 성공, 치적은 미흡

 각 부문별로 살펴볼 때 우선 눈에 띄는 특징은 정책의 의인화 현상이다. 경제나 외교 · 안보 · 통일 정책이 정부 부처 등 공식 채널이 아닌 특정 인무에 의해 좌우된 흔적이 많다. 이는 정책 기능의 제도화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지적된다. 이와 관련해 노대통령의 용인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강경론자들을 특히 신임했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 서동권 전 안기부장, 손주환 전 청와대 정무수석, 그리고 최병렬 전 노동부 장관이 이 부류에 속한다. 강경론자들의 충성심이 강한 점이 그의 인사에 감안됐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욕을 안 먹겠다’는 보신주의가 노대통령 용인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용인 방식은 책임성과 신뢰성 문제를 제기한다.

 노대통령에 대한 신뢰도는 어느 정도일까.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7.4%가 노대통령을 ‘신뢰한다’고 답했고,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22.8%를 차지했다. 이것만 보면 노대통령을 신뢰하는 사람이 신뢰하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그러나 ‘보통이다 혹은 그저 그렇다’는 응답 35.6%는 사실상 부정적인 측면이 많은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 국민은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에 익숙해온 탓에 지도자에 대한 표현을 야박하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노대통령의 공약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잘 이행했다고 생각하는 사람(17.2%)보다 잘 이행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34.2%)이 2배 정도로 많다. 공약 이행 실적을 따지기 전에 국민이 공약 이행에 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내정 전반에 대해 실망하고 있음을 말한다. 외교 분야의 성과보다도 내정의 실패를 더욱 피부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주로 노대통령의 지도력과 정치 행태, 국정운영과 업적, 그리고 신뢰성과 책임성의 문제를 짚어 보았다. 이를 종합해 보자. 노대통령은 야당과 함께 형식적으로나마 5공을 청산했고 사회 자유화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그러나 그는 시종 무행동으로 일관했고 상황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움직였다. 이와 관련해 적지 않은 전문가가 노대통령의 업적으로 꼽히는 북방외교와 민주화 기여가 과연 주체적으로 의도한 결과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탈냉전이라는 세계적인 추세속에서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 개선과 국내정치의 민주화는 필연적인 흐름이라는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보더라도 그 흐름을 저지하지 않은 것 자체는 긍정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상황론자로 불리는 노대통령은 정치적 생존을 위해 지나치게 몸을 사렸다. 그 결과 보신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치적은 전반적으로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정한 선거관리로 유종의 미 거둬야

 손주환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노대통령은 퇴임한 이튿날부터 나날이 높게 평가받을 것이다. 일각에서 그를 약한 대통령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지도력의 형태라고 본다”고 말한 바 있다. 노대통령은 어떤점에서 양김씨의 경쟁으로 인한 어부지리로, 그것도 37에 못미치는 소수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또 6공은 군정에서 문민정권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정권은 어느 정도 자기 모순을 내포한다. 기존 세력을 권력 기반으로 한 노정권은 개혁 목표를 내걸었지만 현실적으로 개혁 주체는 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권력의 성격을 감안할 때 노대통령의 소극적 정치 방식은 민주화 과정에서 불가피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박찬욱 교수(서울대 · 정치학)는 “노대통령이 소수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고는 하나 그는 정통성을 부여받은 민선 대통령이다. 엄연한 대통령제에서 미온적인 지도력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대통령의 지도력은 한 나라와 민족의 진운을 좌우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따라서 많은 전문가들은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가혹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렇다면 노대통령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에 나타난 ‘보통과 평범’이라는 일반 국민의 반응은 부정적인 평가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노대통령은 이제 공정한 선거관리에 대해 평가 받는 일을 마지막으로 남겨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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