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란 승리로 이끈 여수 제철소
  • 여수·남문희 기자 ()
  • 승인 2006.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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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동 일대에서 병기 공급창 터 확인…철판 얇게 펴 거북선 덮개 제작


 

 전라남도 여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본영이 있던 곳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영과 삼도수군통제영이 이곳에 있었고 왜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던 거북선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것치고 당시의 유적이나 유물이 아닌 것이 없다”는 여수시 인근에서 최근 임진란 당시 전라좌수영의 병기 공급창으로 보이는 대규모 제철소 터가 발견됐다.

 이 제철소 터는 전라좌수영 본영이 있던 현 여수시 鎭南宮에서 해안 쪽으로 약 2km 떨어진 여수시 봉산동 일대로, 이곳에서 잔뼈가 굵은 향토사학자 李重恨(62)씨가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여러 가지 문헌적 고증을 통해 이를 밝혀냄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앞으로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질 경우, 이곳은 임진란 때의 조선 수군 연구뿐 아니라 4백여년에 이르는 조선시대 제철·제련 기술의 발달사를 연대기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적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봉산동 일대에 대규모 제철소가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이 마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각종 제철 관련 부산물과 마을 노인들의 증언에서 확인된다. 특히 당시 제철소의 폐기물 처리장으로 추정되는 봉산동 3통3반과 4반 일대의 옛날식 돌담이나 주택의 안마당 등에서는 지금도 슬래그(제철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로 마을 사람은 ‘쇠똥’이라 부른다)와 내화돌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것들이 이 일대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30cm만 파면 수도 없이 나온다고 한다.

풀무터·장인 숙소 기억하는 마을 노인들

 이 마을의 70세 이상 노인들은 제철소와 관련한 구체적인 기억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구한말, 정확하게는 고정 32년인 1895년 수군제도 폐지로 전라좌수영이 폐쇄될 때까지 제철소가 있었기 때문에 노인들이 이와 관련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노인회 회장 金潤?씨(82)는 부친 金五福씨가 갑오농민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전라좌수영의 천포(천자포)대장을 지냈는데, 그의 부친이 사용했던 각종 무기류를 이곳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김씨는 지금도 당시 ‘불무터’(풀무터·제철을 위한 攄가 있는 곳)가 있던 자리와 장인들의 숙소 자리를 기억하고 있다. 봉산동 495번지에서 499번지 일대에 걸쳐 수십군데의 불무터와 장인들 숙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일하던 장인들은 제철소가 폐쇄된 직후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그 후손 가운데 일부는 지금도 여수 시내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충무동 파출소 뒤에 살고 있는 유기장들이 당시 장인의 후예일 것으로 마을 사람들은 추정한다.

 제철의 원료는 봉산동에서 길 하나 건너편에 있는 봉강동 일대의 ‘沙鐵’(철분이 포함돼 있는 모래)을 퍼다 썼다. 이곳은 지금도 봉강동이라는 행정 명칭보다는 ‘새철동’이라고 주로 불리는데, 새철은 사철이 변해서 된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 새철동 구봉산 기슭에는 당시 사철을 캐낸 커다란 구덩이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아직도 비가 오면 계곡을 따라 벌건 물이 흘러나오고 산기슭의 흙이 붉은 빛을 띠고 있어 이곳이 제철소의 원료 공급지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지금은 매립돼 버렸지만 옛날에는 ‘爐江’이라는 저수지가 있어 제철소에서 필요로 하는 물을 공급했고, 전에는 바닷물이 마을 입구까지 들어와 이곳에서 생산된 각종 철제품을 뱃길로 실어나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와같이 마을 노인들 사이에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곳 제철소에 관한 이야기는 향토사학자 이중근씨가 문헌 자료를 통해 이곳이 전라좌수영에 각종의 병장기를 공급하던 병기창이었다는 점을 고증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가 밝혀지게 됐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대사범대를 중퇴한 이씨는 12대째 여수시에서 사라온 토박이. 그는 국민학생 시절 爐江 저수지에 놀러가곤 했는데, 봉산동을 지날 때마다 슬래그나 철조각 때문에 신발이 헤어진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뒤 마을 노인들로부터 제철소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제철소에 대한 궁금증을 가졌다. 그러다가 50대가 다 된 80년대초부터 마을 노인들의 증언을 뒷받침할 문헌 조사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부에서 발간한 《문화유적총람》에 이곳의 제철소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문화유적총람》 69쪽에는 “製鐵址 鳳山洞 1568~1609년 壬辰亂 때 沙鐵이 생산되어 무기 제작에 사용. 1751년(英祖 27년)에 節度使 鄭益良이 沙鐵庫를 설치”라는 기술이 나온다.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임진왜란 20여년 전부터 이곳에 제철소가 있어 무기를 공급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또 조선시대의 고지도인 ‘全羅左水營圖’에는 마을 사람들이 ‘새철동’이라고 부르는 봉강동 일대를 ‘沙鐵’이라고 명기해 이곳이 제철의 원료 산지임을 밝혀놓고 있다.

 이러한 사료들 중 헌종 13년(1847년) 허섬이라는 사람이 그때까지의 전라좌수영 관련 기록 가운데 중요한 부분만을 발췌해 기록한 《?左水營誌》는 봉산동 제철소의 실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밝힌 사료로 평가된다. 원래 《호좌수영지》는 1978년 당시 여수수산대 전라좌수영연구소 소장이었던 文榮龜교수(현재는 정년 퇴임)가 서울대 규장각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동안 이 책에 실린 제철소 관련 기록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별로 없다가, 이씨가 이 기록을 토대로 봉산동 제철소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고증했다.

 호좌수영지의 제철소 관련 내용에는 제철소에서 일했던 장인의 종류와 숫자, 장인이 급여 수준, 제철·제련 과정에서의 원료 배합 비율, 이곳에서 생산된 각종의 병장기류가 어느 곳으로 얼마만큼 보내졌는지에 대한 기록 등이 구체적으로 언급됐다. 이런 내용을 토대로 이씨는 봉산동 제철소에서 일했던 장인이 97명에 이르고 여기에 군졸과 노비를 포함하면 2백~3백명에 이르는 대규모 제철소였다는 점, 장인의 구성으로 볼 때 매우 높은 수준의 제철·제련 기술이 사용됐다는 점, 철판을 얇게 펴는 작업을 전문으로 하는 ‘ 鐵 ’이 3명이나 존재했다는 점에서 볼 때 거북선의 덮개 철판을 이곳에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알렸다.

 이씨의 이러한 연구 결과는 지난 4월 전라좌수영성역화추진위원회(위원장 丁埰鎬)가 주최한 ‘전라좌수영성역화 지역민 토론회’에서 발표돼 지역사회에 소개됐다. 금년 7월에는 광양제철소 산업과학기술연구소 연구팀이 이씨와 연결돼 봉산동와 봉강동 현지에서 슬래그와 사철 원석을 채집해 분석 작업을 했는데 그 결과가 지난 11월1일 몇몇 향토사학자에게 비공식적으로 발표됐다.

4백년 앞선 기술

 연구팀의 조사 결과 슬래그와 사철 원석의 구성 성분이 같게 나와 봉강동의 사철을 제철 원료로 사용했다는 마을 노인의 증언이 사실로 밝혀졌다. 또한 이곳에서 채집한 쇠조각 등을 분석한 결과 현재 광양제철소 등에서 사용하는 산소제강법과 같은 기술을 이미 이곳에서 사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러한 기술을 가리키는 말로 호좌수영지에 ‘吹鍊’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산업과학기술연구소의 박종민 주임연구원에 따르면 취련이라는 용어는 지금도 광양제철소 등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여태까지는 일본말에서 연유한 것으로 인식돼 사용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선조가 이미 이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이 밝혀져 “앞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이 말을 쓸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당시의 조사 때는 현재 지표면에 드러나있는 슬래그만을 가지고는 그것의 생산 시기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연대측정은 보통 탄소측정법에 의해 가능한 데 이를 위해서는 이곳 일대를 대대적으로 발굴해 제철과정에서 사용된 숯이나 爐 등을 찾아내야 한다. 이러한 조사가 이루어지면 이곳이 임진왜란사 연구뿐 아니라 조선시대 제철·제련 기술사 연구의 보고가 될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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