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의 전쟁’ 22년 최후 승자는?
  • 서명숙 · 조용준 기자 ()
  • 승인 2006.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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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마지막이다.” 두 사람 모두 이렇게 말한다. 무려 22년이나 끌어온 경쟁이다. 지난 70년 9월29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金大中 4백58표,金泳三 4백10표의 역전극이 벌어진 이후 두 김씨는 때로는 협력자로, 때로는 한치 양보도 없는 경쟁자로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경쟁도 오는 12월18일이면 종지부를 찍게 된다. 현재 판세대로 간다면 그들 중 한명은 길었던 신화를 스스로 거두어야 한다. 불사조처럼 숭앙받던 과거만을 간직한 채 무대 전면에서 사라질 채비를 해야 한다. 오직 한사람만이 새로운 신화의 창조자로서 각광받을 것이다. 그만큼 절박하다. 22년의 끈질긴 승부와 정치생명을 갈라놓을 그 순간이 피를 말리듯 다가오고 있다.

 87년 12월16일 제13대 대통령선거에 나섰을 때의 두 김씨의 모습은 이제 찾을 길이 없다. 약간 장발에 온통 흰 머리였던 김영삼 후보와 항상 검정색 두루마기를 걸쳤던 김대중 후보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아울러 ‘군정종식’과 ‘대중은 김대중, 평민은 평민당’이라는 구호도 5년 전 일로만 기록되어 있다

 

 두 사람은 변했다. 87년 대통령선거 때와 비교해 두 사람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62세에서 67세(김대중) 로, 60세에서 65세 (김영삼)로의 단순변화 속에는 어쨌거나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지도자로서의 모진 풍상이 담겨 있다. 특히 김영삼 후보에게 일어난 변화는 통일 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87년과 비교하면 그야 말로 상전벽해를 연상시킨다. 김후보의 기호는 1번. 87년 2번에서 한 단계 뛰어올랐다. 물론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야당이 여당과 합친’ 3당 합당의 결과이다. 1번으로의 한 단계 비약은 자연스레 조직력 · 자금력 등 외형적 물리적 측면의 변화를 동반한다. 우선 김후보는 87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방대 한 규모의 공조직과 사조직, 여권 성향의 관변 단체 등을 거느리게 되었다. 87년 당시 김후보의 공조직은 현역의원 38명과 1백84개 지역선거대책위철회(당시 지역구는 2백24개)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선거 한달 전인 11월17일께야 보완된 조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역의원 1백26명에 2백37개 전지역구에서 선거대책 위원회를 가동하고 있다.

김영삼, 자금 · 조직력 엄청나게 향상

 사조직 부문에서 그 변화는 더욱 두드러진다. 87년 당시 김후보는 조직력 면에서 金鍾泌 후보 다음으로 취약하다는 평을 들었고, 선거전략도 ‘특유의 바람몰이’에 주로 의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후보 8명 가운데 가장 큰 사조직을 갖게 되었고, 이 조직의 방만하고 탈법적인 선거운동은 다른 후보의 주된 공격거리가 되고 있다. 지난 7월 방만한 사조직을 한 묶음으로 조직화 · 계열화하기 위해 출범한 사 조직 총본부 나라사랑실천본부에는 당 외곽조직인 한국청년지도자협의회 · 중앙청년연합회 등 각종 사조직이 총망라돼 있다.

 개별 사조직의 활동반경과 조직의 팽창 속도에서는 ‘2번에서 1번으로의’ 변화가 발휘한 약효가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87년 에는 선거운동을 하다 끌려가고 상대 운동원으로부터 몰매까지 맞는 수난을 겪었던 민주 산악회의 경우, 올 선거에서는 유세장을 반점 거한 채 산악회 스티커를 발부하는 등 ‘반공개적’으로 회원 확대에 나섰다. 87년 대선 직전 김후보가 다니던 충현교회 소속 장로들과 서울지역 일부 평신도를 중심으로 결성된 범교파 평신도 단체인 나사협은 현재 1백70여개 지역 본부를 둔 전국조직으로 커졌다.

 선거 때마다 늘 여당 성향 표로 기능해온 관변단체와 각종 직능단체의 지원은 김후보가 처음 누리는 ‘준여당 프리미엄’이다. 물론 盧泰緣 대통령의 당적 이탈과 중립내각 출범으로 당초 기대한 관권선거 프리미엄은 거의 상실됐다는 게 정가의 관측이다. 그러나 87 년 당시와 비교하면 두배로 늘어난 관변조직이 김후보를 위해 측면에서 움직인다. 지난 2일 국민당 金東吉 최고위원이 기자회견을 통해 "안기부가 선거담당 기구인 보좌관실을 설치 · 운영하고, 이 기구에서 2백여개 사회 단체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도 관변단체의 민자당 지원 양상을 겨냥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민자당은 32개 직능 단체 본부를 가동하면서, 최소한 60억원 이상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선거 변수 조정할 ‘정보’ 독점”

 자금력과 정보력도 김후보의 새로운 무기다. 민자당의 자금사정은 과거 민정당과는 달리 대통령으로부터의 선거자금 조달을 전혀 기대할 수 없어 과거 집권당에 비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후보의 자금사정이 87년 야당 후보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탄탄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민자당 중앙당은 선거 공고일 직전 2백37개 지구당에 5천만원씩 지원한 데 이어 최근에는 지구당별 로 1억~2억원 정도를 차등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자당 안팎에서는 선거 당일까지 모든 지구당에 3억원 이상 지원하리라고 내다본다. 1개 지구당마다 3천여개의 만을 돌 며 사랑방 좌담회를 한번씩 여는 데만 이 정도의 조직 가동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보력에서도 김후보는 독점적이다. 87년 당시 거의 정확한 여론을 뽑아내 민정당이 민심의 흐름을 명확하게 반영하는 선거전을 치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국책연구소 여론조사팀은 김영삼 후보 차남 賢哲씨가 운영하던 중앙조사연구소와 합쳐져 ‘김후보를 위한’ 여론조사를 매주 실시한다. 준여권 후보의 정보력은 이렇듯 공개적인 분야에 국한 되지 않는다. 최근 정가의 최대 관심사로 떠 오른 朴泰俊 의원의 국민당행을 가로막는 외압의 정체는 민자당이 확보한 ‘모종의 정보’ 라는 추측이 무성하다. 한 원로 언론인은 “여권 프리미엄이 없어졌다하지만, 선거전의 큰 별 수를 자의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정보력을 독점하는 상황은 예나 다름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외형적 ·물리적인 부문에서 김후보가 얻어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느린 조직이 커진 대신, 내적 결합력을 약화됐다. 특히 민정계 위원장들의 비협조와 수수방관으로 말미암아 느슨해진 공조직은 김후보에게 커다란 부담이 된다. 3당 통합의 물리적 결합이 화학적 결합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오히려 폭발 요인으로 잠재하는 것이다. ‘자기 일처럼’ 움직이지 않는 민정계 위원장들을 따로 모아 단합대회를 치르는 등 고육지책을 쓰지만, 여전히 조직 가동률은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87년 대선 때는 김후보를 위해 죽고 산다는 의지를 가진 소수정예의 특공대가 뛰었다. 그런데 지금 민자당 조직은 투항한 수십만 패잔병을 거느리고 적벽대전에 나설 조조의 군대 같다”는 민주계 한 중진의원의 지적은 음미해볼 대목이다.

 그러나 후보 이미지 측면에서는 잃은 것부터 셈하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우선 김후보는 전체 유권자의 57%에 이르는 20~30대 유권자층 상당수의 이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87년 김후보는 ‘군정종식’을 구호로 군사정권의 명백하고 단호한 청산과 함께 온건개혁 성향을 표방했다. 이 때문에 점진적인 개혁을 바라는, 소위 ‘86년 거리로 나섰던 넥타이부대’가 김후보를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고, 연세대를 비롯한 일부 대학 운동권에서는 당시 운동권의 대세와는 달리 ‘현실 가능한 대안’으로 김후보를 미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朴贊都 교수(서울대 · 정치학)는 "야에서 여로 일순간에 돌변한 정치행태와 그로 인한 개혁 이미지 퇴색 때문에 50대 이상을 새로 얻은 대신 20~30대를 상당수 잃을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박교수는 87년 대선 때 김후보의 주된 지지기반이었던 ‘넥타이부대’ 에 대해서도 “그 향방을 짐작하기 힘들지만 정주영 후보가 상당수 흡수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지난 5년간 중상층으로 이동한 경우에는 안정 지향적인 성향이 강해졌기 때문에 김후보를 여전히 지지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한다. 20~30대 유권자의 비중이 워낙 커 이들이 선거에 적극 참여하면 할수록 김 후보의 손실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개혁 세력 잃고 안정지향 세력 확보

 선거 쟁점의 변화도 김후보에게 새로운 부담이 된다. 87년에는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뚜렷이 설정되고 군정종식이 쟁점으로 떠올랐던 반면 이번에는 '경제난국 타개 · 경제문제 해결'이 전체 유권자의 관심으로 떠오르면서 투표 행위에 결정적인 동기로 작용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 점을 십분 활용한 김대중 후보는 경제학 이론서를 저술한 경계통 임을, 정주영 후보는 세계적인 기업을 일으킨 실물경제동임을 집중 부각시키고 있다 김영삼 후보의 한 핵심 측근은 “경제대통령이라 는 이슈가 유권자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경제 면에서 가장 취약한 김후보에게 이러한 쟁점의 전환이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의 경계선이 모호해진 데다 사회 전반에 보수안정 지향적 분위기가 강화되는 추세인 만큼 김후보의 변신과 이미지 변화가 얻어낸 것도 많다는 분석도 있다. 즉 20~30대 상당수와 개혁을 원하는 유권자를 잃은 대신, 87년에 김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안정 지향적 유권자를 새로 확보했다는 것이다. 정정길 교수(서울대 · 행정대학원) 는 "지난 5년간 민주화의 대가와 시련을 충분히 경험한 국민 가운데는 국가관리 면에서 불안을 느끼는 층이 많다"고 전제하고, "김후보는 집권당에 음담은 경험 때문에 민주투사의 이미지를 확실히 벗고 국가관리 능력 면에서 어느 정도 신뢰를 얻어냈다. 이는 안정 지향적 유권자의 표를 끌어 모으는 데 큰 역 할을 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87년에는 영남권 후보 2명이 출마한 데 비해 김후보가 영남권 유일후보로 나선 것도 이번 선거가 지닌 큰 변화다. 그러나 대구 · 경북 출신 '정치 TK'가 대거 이탈하는 바람에 이 지역 전반이 부동표로 떠돈다. 따라서 영남권 유일후보로서의 이점은 누리지 못하고 있고, 지역감정 농도도 87년에 비해 현저하게 엷어졌다는게 정가의 일반적인 시각이 다. 그러나 한 정치학자는 "원색적 지역감정은 많이 순화 · 희석됐지만, 막상 투표장에서 는 지역성에 근거한 투표행위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지난 5년 새에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김후보의 대차대조표는 어떻게 작성될 것인가. 그 것은 87년 대선에서 그를 지지한 28%의 지지기반 중 얼마가 그에게 등을 돌리느냐, 노 후보가 얻은 36.7%의 지지기반 중 얼마를 그가 흡수하느냐에 달려 있다. 87년 대통령선거 이후 평민당은 두번 '환골탈태'하며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거듭했다. 지역정당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평민당에서 신민당으로 (91년 4월9일), 다시 민주당으로(91년 9월10일) 변신하며 야권통합을 이룩해 정통야당의 맥을 잇는 수권 야당임을 자임하게 되었다.

 이 두번의 변신은 92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대목이다. 평민 · 신민당의 이미지와 지역적 편중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대선에 나섰다가는 거대 민자당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난 11월24일 민주당은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과 정치협상을 완전 타결해 김대중 후보를 범민주 단일후보로 확정했다. 이는 비록 단순한 연대체제에 불과 하지만 선거를 앞둔 민주당이 전노협 전농 전대협 전교조 등 재야를 총망라, 87년 선거 이후 분열된 야권을 완전히 흡수하고 진영 재편을 마무리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로써 김대중 후보는 5년 만에 다시 야권 대표주자로 나서게 됐다. 국민당이 여권의 분열세력으로 인정되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모든 야권진영으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 에서 김후보는 과거 5년 전과 비교해 엄청난 세 확장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DJ, 87년엔 천석꾼 지금은 만석꾼”

 우선 조직책과 현역의원 수에서 차이가 난다. 당시 평민당 현역의원은 겨우 31명. 이 중에서도 지구당을 맡은 의원은 25명에 불과 했다. 대통령선거를 겨우 20여일 앞두고 통일민주당에서 떨어져나온 상황이었으므로 영남의 거의 모든 지역에 조직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선거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현역의원만 96명이다. 87년과 비교해 세 배 이상 늘었다. 단 한곳을 제외한 전국 2백 36개 지역구의 조직책을 이미 오래 전에 임명했다. '불과 20명 겨우 넘는 현역의원 가지고도 당시 6백11만표를 얻었는데 그보다 세 배가 넘는 지금 그때보다 3백만표 더 얻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라는 柳峻相 선거기획단 수석부단장의 장담은 허언이 아니다. 이는 상당 부분 야권통합에 힘입은 바 크다. 李基澤 대표를 비롯, 金正吉 최고위원과 盧武鐘 청년 특위 위원장 등 부산 출신 3인방은 민주당 최 대 취약지구인 영남권의 20~30대를 겨냥하고 자신의 선거처럼 뛰어다닌다.

 이기택 대표는 “87년에 천석꾼이 있다면 지금은 만석꾼”이라고 말한다. 韓光玉 선대본 부장(사무총장)은 “선거에서 자만심보다 더 위험한 것은 패배의식인데, 우리 당원들은 지난번 연기군 한군수 사건 이후로 이제는 해 볼 만하다고 말한다. 패배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반면 여권이 오히려 패배의식에 잠겨 들고 있다”라고 진단한다.

 姜昌成 전 보안사령관을 비롯해 林福識 · 羅柄을 · 張濃翼 의원 등 군 고위장성 출신 의원을 가지게 된 것도 김대중 후보에 게 커다란 힘이 된다. 지난 11월28일 대구집회부터 유세에 참여 ·보안사령관 때 朴正熙 대통령의 명에 따라 5개월 동안이나 샅샅이 조사했지만 김대중 후보에게서 용공성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역설한 강창성 의원은, 다른 군 출신 의원들과 함께 특별유세 반을 구성해 호남을 제외한 전국을 돌며 김후보의 사상성 시비를 잠재우고 있다. 김후보에 대한 군부의 거부감을 지우는 연결고리로서 이들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군 출신들의 영입과 마찬가지로 콜롬비아대학 조리 교수나 경제학 박사인 柳鍾機 홍보위원장 등 미국동의 대거 참여로 '뉴 민주당'이 가능하게 된 것도 지난 5년간 김후보가 거둔 큰 수확이다. 특히 주택은행장 출신 張在植 정책위의장 밑에 교수 86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정책팀이 김후보의 각종 정책공약을 뒷받침해 그 어느 때보다 이론적 배정이 튼튼하다.

 선거자금 역시 87년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물론 민자 · 국민당에 비교해 턱없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이대표는 "각 지구당별로 1억원 정도는 투입해야 한다고 보는데 조달이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2백36개 모든 지구당에 1억원씩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민주당의 자금동원 능력이 예전보다 월등히 나아졌음을 뜻한다. 민주당은 비록 민자 · 국민당 물량의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 홍보전에도 상당한 액수를 책정했다. 홍보 부문의 실무를 총지휘하는 李海覆 당무기획 실장은 "20억원 정도만 더 있었으면 완벽할 청도로 홍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 을 표시한다.

 국내 5대 기업에 속하는 한 재벌그룹은 최근 자체 조사결과 김대중 후보의 당선 가능 경이 김영삼 후보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선거와 관련한 그룹 차원의 로비를 두 김씨에게 동등하게 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형평원칙에는 선거 자금의 대등 배분이 뒤따르는 것은 물론이다. 5대 기업에 속하는 또 다른 대그룹 정보팀의 한 관계자는 "비록 민자당에 대한 지원액수 와 차이는 있지만, 대기업 대부분이 과거처럼 민주당을 소홀히 다를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투사에서 용서와 화합의 지도자로 변신

 5년 전에 비해 가장 많이 변한 부분은 뭐니뭐니 해도 김대중 후보 자신의 이미지다. 김후보는 투박한 검정색 두루마기 차림에서 말쑥한 더블양복의 신사로 탈바꿈한 것처럼, 과격한 투사형 정치인에서 용서와 화합의 지도자로 변신했다. 김후보는 가는 곳마다 “나를 납치하려 했던 이후락씨는 물론 사형시키려 한 전두환씨도 다 용서한 것처럼, 정치보복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강조하며 대화합의 정치를 부르짖는다. 이는 그의 가장 커다란 공약이다. 全斗煥 전 대통령이 자신의 아들들을 김후보에게 보내 인사를 하게 한 것은 그의 대화합론이 거둔 결실에 속한다. 이른바 ‘뉴 DJ’에 의해 “알고보면 부드러운 남자”를 강조하는 것 역시 많이 달라진 세상을 실감나게 한다. 87년 당시 야권후보 단일화를 부르짖다 두 김씨와 모두 껄끄러운 입장이 된 李重載 전 의원 (민주당 서울 강남 갑지구당 위원장)은 “김대중 후보의 대화합론은 현명하게 방향을 잡은 거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면서 “양김씨의 성격을 볼 때 김대중 후보는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는 반면, 오히려 김영삼 후보가 손잡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김영삼 후보는 자기를 도와준 사람은 끝까지 도와주지만 반대한 사람은 법정하게 버리는데, 이번 관훈토론회에서 그의 성격의 일단이 드러났듯 李鍾贊 · 朴哲彦 씨는 김영삼 치하에 서는 온전하기 힘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중도우파로 보여지기를 원하는 김대중 후보의 변화는 우파와 좌파 모두로부터 공격담할 가능성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한쪽으로는 張世東 전 안기부장 등 5 · 6공 고위급 인 사를 영입해 보수성향 이미지를 강화하려는 한편, 다른 쪽으로는 전국연합 과 연대해 재야세력까지 품에 안으려는 김후보의 전략은 우파와 좌파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모습이 될 수 있다. 이는 ‘뉴 DJ’ 가 가져온 하나의 손실에 속한다.

 그런데도 김대중 후보가 해방 이후 정당사에서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유일한 대통령후보라는 사실은 덕목이 될 듯하다. 민주당이 각 유세장에서 “오직 한길만을 걸어온 사람”으로서의 김후보를 강조하는 것도 김영삼 후보와 비교할 때 가장 유리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5년 전과 비교해 이 사실은 소위 자질론과 함께 그의 가장 빛나는 훈장이 되고 있다. 5년 전과 모든 양상이 변한 지금, 비호남권과 보수안정 희구세력이 그에게도 가능성의 문을 열 것인지는 멀지않아 그 해답이 나온다. 그것은 “이번에는 바꿉시다! 금요일에 바꿉시다 !”라는 변화의 물결이 얼마나 퍼져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이번 대통령선거는 문민정치 시대를 개막 하는 선거이므로 두 김씨에게 한번의 기회는 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 그러니 그것이 과연 패배자가 무대에서 아주 사라지는 ‘양김시대’의 종식으로 연결될지는 좀더 두고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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