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환자 고르는 세상
  • 박성준 기자 ()
  • 승인 2006.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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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분쟁 피하려 ‘방어진료’급급…의료분쟁조정법 제정 서둘러야

 

 

 의사들이 본인의 사명을 저버린 ‘소심증 환자’로 전략하고 있다. 의료계가 의료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환자를 외면하거나 의료행위의 책임을 환자에게 떠넘기는 이른바 ‘방어진료’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하루는 자궁수술을 받아야 할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수술하기 바로 전에 절대로 음식을 먹지 말라고 당부했지요. 그런데 지시를 무시한 환자 가족이 ‘수술 받으려면 배가 든든해야 한다’며 억지로 음식을 먹였어요. 마취주사를 맞은 환자가 갑자기 토하면서 음식물 찌꺼기가 폐로 스며드는 바람에 환자가 폐렴에 걸려 난리가 났습니다. 물론 잘못은 환자측에 있지만 그들은 오히려 ‘어떻게 했기에 멀쩡한 사람이 이 지경이 됐느냐’며 거칠게 항의하더군요.”

 서울 둔촌동에 산부인과를 개업한 金賢植씨(김현식 산부인과 원장)의 경험담이다. 김씨는 “특히 산부인과에서는 이와 비슷한 의료사고가 자주 일어난다”고 하소연한다. “진료를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수 있지만 그때마다 환자측은 무조건 의료사고로 단정해 의사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 일쑤이지요.” 더러 질 나쁜 환자 측이 사건 브로커를 내세워 의사와 병원을 상대로 협박, 돈을 뜯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대개 그 같은 일을 겪으면 의사들은 이렇게 다짐합니다.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식의 봉변은 당하지 않겠다’고요”라고 김씨는 말한다.

 의사의 의료과실과 그에 따른 의료분쟁이 늘면서 방어진료도 부쩍 늘고 있다. 지난 9월 의료인 단체인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약청 인의협)가 서울대병원을 비롯한 전국 4개 종합병원의 수련의와 전공의, 그리고 인의협회원 의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내가 하는 진료행위가 방어진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진료에 임한 적이 있다”는 응답자가 전공의는 전체의 80%, 개원의는 90%에 이르렀다. 반면 소신진료에 대한 질문에 ‘한다’고 대답한 의사가 개원이의 경우 전체 응답자의 65.2%였다. 이런 응답결과에 따른다면 병원을 찾는 환자는 언젠가 한번쯤 방어진료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방어진료도 환자 죽일 수도

 달라진 의료계 풍속도에서도 방어진료는 쉽게 감지된다. 개인병원 응급실에서는 ‘심상치 않은’ 환자가 찾아오면 종합병원으로 보낸다. 공부 잘하는 의대생들은 의료사고가 잦은 외과계통을 피해 안과나 치과 등 좀더 안전한 곳을 지망한다. 이른바 ‘칼잡이’는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미 개업한 의사들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가령 산부인과의 경우 안전한 부인과만 특화하고 산과는 폐지해 버리는 일이 잦다.

 아직 교과서적 정의는 내려지지 않았으나 방어진료는 통상 ‘진료에 임하여 의사들이 법적 규제를 의식하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나 조처를 취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인의협은 최근 방어진료를 “의료행위 결과로 인한 법률적·물리적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질병 치유와는 직접적인 관계없이 행해지는 유형·무형의 모든 의료형태”로 규정했다. 방어진료는 진료 거부나 수술 거부 등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는 유형도 있지만 비전문가인 환자가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값비싼 검사를 한다든지 드문 합병증을 설명하는 행위, 전과 또는 전원 등이 바로 그것이다(도표 참조).

 문제는 방어진료가 문자로 표현된 것 이상의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는 데 있다. 질병의 치유와 직접 관계가 없는 의료행위에는 진료거부 또는 수술 거부가 포함된다. 이럴 경우 방어진료는 사실상 “의료인은 진료 또는 조산의 요구를 받은 때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는 현행 의료법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치료의 손길이 닿으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환자를 저승길로 내몰 위험성까지 있다.

 ㄱ씨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 응급실에 옮겨진 환자였다. 환자의 상태를 살펴본 병원측은 “수술이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다. 병원은 결과에 책임질 수 없다”고 설명했다. 보호자 측은 환자를 데리고 그대로 돌아갔다. 병원 측은 규정대로 ‘설명의 의무’를 다했지만 환자측으로 볼 때는 사실상 ‘진료 거부’를 당한 셈이다.

 응급실 진료 거부는 가장 흔한 방어진료이다. 올해 들어서만 서울중앙병원 전남대병원 대구병원에서 응급환자가 진료 거부로 사망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방어진료는 때때로 필요 이상의 검사를 강행해 환자 측에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고 과잉 진료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만일의 경우를 두려워한 의사가 온갖 검사 방법을 다 동원하기 때문이다. 되도록 빨리 진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 측은 의사 요구에 따라 때로는 의료보험의 혜택이 적용되지 않는 값비싼 검사료까지 물면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다 귀중한 시간을 허송한다. 현재 병원 응급실에서 일상화된 컴퓨터 뇌단층 촬영은 좋은 보기이다. 신경학적 이상이 없는 ‘하찮은’ 머리 부상 환자들도 “1백%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와 ‘만약의 경우’라는 의사의 두려움 때문에 컴퓨터 단층촬영을 한다.

 의료행위에 대한 동의를 철저히 요구하고 환자에게 필요 이상 투약하는 행위도 또다른 방어진료 사례이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동의 절차 때문에 환자는 환자대로 불편을 겪고, 병원 문턱은 그만큼 높아진다. 약물 과잉 투여는 종종 의료과오 시비를 부르기도 한다. 서울중앙병원 天京秀씨(가정의학과)는 “하찮은 바이러스성 질환인 상기도 감염에 항생제를 쓰는 것도 단지 의사의 불안심리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그밖에 의사는 “내 소관이 아니니 다른 과로 가보라. 우리 병원은 능력 부족이니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한다. 환자가 다른 과나 다른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그만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을 길거리에서 허비하게 된다.

 대부분의 의사는 방어진료를 나쁜 의미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의료행위를 신성시했던 과거와 달리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수평적·쌍무적으로 변한 오늘날엔 의료행위도 계약에 따라 이뤄지므로 방어진료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체는 저마다 개인적 특이성이 있다. 그와 같은 인체의 예측 불허성 때문에 수술 전에 합병증이 발생하거나 사망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일은 오히려 의사들이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다”라고 주장한다.

환자·의사 모두 현행 체계에 불만

 그러나 방어진료의 좀더 본질적 부분은 의료행위의 대상인 ‘인체’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페니실린을 주사할 경우 개인 신체의 특이성에 따라 어떤 환자는 쇼크사할 수도 있다는 점은 개인 특이성의 좋은 본보기이다.

 순천향의대 신경외과 下博章 과장은 “안전한 치료방법을 찾는 것은 의료행위의 바른길”이라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치료에 앞서 철저한 준비로 환자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의사들은 방어진료의 근본 원인이 현재의 잘못된 의료제도라고 주장한다. 특히 현실을 무시한 의료수가가 의사들의 공격 표적이다. 정해진 비용을 조금만 넘어도 ‘진료비 과다청구’, ‘불법진료’로 매도되기 때문에 환자를 소신껏 진료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성심껏 환자를 치료했다가 오히려 진료비 과다청구 건으로 경고장을 받기도 했다는 모 산부인과 원장은 ”법으로 걸면 의사만 죽일 놈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환자를 소신껏 돌볼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의료계 현실의 급격한 변모, 분쟁이 발생했을 때 환자측이 보이는 몰이성적 태도, 의사들을 옥죄고 있는 의료체계가 바로 의사들로 하여금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료 소비자들(환자) 편에 선 전문가들이 방어진료에 보내는 눈길은 의구심으로 가득차 있다. 지난 10여년 동안 피해자 입장에서 의료분쟁을 다룬 韓基贊 변호사는 “방어진료는 의사가 의료 과오 또는 과실의 책임을 피하기 위한 상투적 수단”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방어진료에는 치료전 단계의 검사 절차를 복잡하게 해 환자의 상태를 입원 당시보다 악화시킨 뒤 서서히 회복시키는 ‘사전 방어진료’와, 진료를 끝내고 환자의 검사자료와 진료차트를 일절 공개하지 않는 ‘사후 방어진료’가 있다.

 한씨는 “현재 법적으로는 입원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옮길 때 환자의 검사자료 일체를 넘겨줘야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진정으로 환자 편에 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계속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방어진료는 또한 의료계 문제점을 지적할 때 흔히 동원되는 이른바 ‘의사의 침묵’ 또는 ‘의사의 공모’를 고질화할 우려가 있다. 의사의 침묵 또는 공모란 의료사고가 생겼을 때 의사측의 과오 여부를 밝힐 사람들이 바로 의료행위의 전문가들인 의사 ‘자신’밖에 없다는 한계에서 출발한다.

 동업자 의식 또는 학연·지연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의료집단은 일단 사고가 나면 그 책임이 의사에게 있더라도 “의학적으로 불가항력”이라며 입을 다물어 버린다. 이 같은 태도 때문에 환자들은 의료계 전반을 ‘썩었다’고 비난한다. 의료사고가족협의회(현재 의료사고가족연합회로 이름을 바꿈) 전 회장 李殷丁씨는 “바로 이런 까닭에 병원쪽 과실이 명백한 경우에도 피해자측이 소송에서 패하기 일쑤”라고 말한다.

 의사측은 방어진료를 피하기 위해서는 의사들이 마음놓고 진료할 수 있는 분위기를 보장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반면 환자 측은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마음놓고 내맡길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길 바라고 있다. 변박장 과장은 “의사도 환자도 아닌 제3의 강력한 기구를 만들어야 방어진료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의료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인 의료분쟁조정법의 제정이 시급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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