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民정치와 청와대 개조
  • 안병찬 (편집인) ()
  • 승인 2006.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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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평민 당선자의 새로운 정치는 청와대의 낡은 우상을 허물어버리는 변혁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제 14대 대통령 당선자의 짐은 다른 때보다 무겁다. 이번 당선자는 권·언 복합구조라든가 정경일체 체제 혹은 탈냉전 한국형 매카시즘, 색깔론 따위의 신조어로 살촉을 매긴 화살들이 어지럽게 오고간 정치투쟁의문을 거쳤으니 어깨가 무겁다.

 옛날 옛적에 효자동 끝 궁정동 입구에는 전차 종점이 있었는데 대통령 당선자는 그 종점자리인 청와대 어귀쯤에 서서 취임식을 기다리게 된 셈이다. 청와대는 권부의 상징이다. 푸른 기와를 얹은 그 건축물은 마치 궁정 같아서 국민에게 전혀 친근감을 주지 않았다.

 그 궁정에서는 쿠데타도 일어났다. 청와대 민방위훈련을 지휘하던 경호실 수뇌부의 사진 한 장이 무언으로 그것을 말하는 듯하다. 78년 1월에 찍은 그 사진은 역사의 기괴한 인연을 보여주고 있다.

 돌출인물로 차지철 경호실장이 버텨 서 있고 노태우 전두환 두 소장이 그 좌우에, 전성각  소장과 배정도 준장이 배경인물로 배열한 장면이다. 그 사진을 찍은 날로부터 오래지 않아, 전두환 노태우 두 소장이 번갈아 대통령이 되고, 두 기간을 합쳐서 12년 동안 청와대 궁정 주인으로 지냈으니 아이러니를 아니 느낄 도리가 없다.

모든 평민에 사달오통으로 열린 프랑스 대통령궁

 아무튼, 이번 당선자는 최초의 평민 당선자로 기록된다는 점이 다르다. 군복을 부랴부랴 평복으로 바꿔입고 변신한 직업군인이 아니라 평복을 입고 지내던 민간인 출신이다. 그런 평민 당선자의 가장 큰 부담은 우리가 사는 공화국을 입헌적이고 민주적으로 완성해나가야 하는 책무에서 생긴다. 평민 당선자는 평민정치를 구현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것이다.

 평민정치는 변화와 혁신, 그리고 대전환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펼쳐지지 못한다. 고인 물은 썩고, 숨을 멈춘 생명체는 사멸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변화를 갈구하는데, 그 변화는 진보의 시초요 혁명의 원칙이라고 말한 이가 있다. 혁명이야말로 침체와 퇴화를 활기와 진보로 바꾸는 힘이자 원동력이 아닌가.

 프랑스인들도 청와대 같은 대통령궁을 가지고 있다. 왕실건축가가 2백74년 전에 지은 3층짜리 엘리제궁이 그것이다. 엘리제궁이 공화국대통령 집무실 및 관저로 지정된 것은 1백19년 전이고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시절에 핵전용 지하방공호와 중앙통제본부를 지었다. 그렇지만 엘리제궁은 전혀 궁정답지 않다. 정문은 효자동보다 폭이 좁은 번화가 포부르 생토노레로 나있고 뒤편으로 가브리에 산책로 및 상젤리제 큰길이, 좌우로 엘리제 길과 마리니 길이 나 있지만 모두 평민의 자유통행이 보장되어 사달오통이다.

 특별히 엘리제궁에 찬사를 보낼 까닭은 없다 엘리제궁의 평민성을 눈여겨보자는 말이다. 이른바 ‘洋爲韓用‘, 그들의 장점 가운데 필요한 것을 우리가 지혜를 발휘해 쓰자는 뜻이다.

 우리는 선거전에서 청와대를 놓고 아방궁 논쟁이 벌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2천2백4년 전에 중국 진시황이 함양에 세웠고 초패왕 항우가 불사르자 석달 동안 불탔다는 아방궁이다. 어떤 후보는 현 대통령이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청와대를 아방궁처럼 호화롭게 지어 호의호식하니 큰 책임이 있다고 공박했다. 다른 후보는 자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청와대를 없애서 박물관을 만들고 청와대를 달동네로 옮기겠다고 공언했다.

 지금까지 독재와 권위주의의 상징이 되고 북악산 깊숙이 자리잡아 국민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노라고 신문광고를 한 후보는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국가원수 집무실을 중상한다는 반박을 당했다.

노대통령 ‘청와대 앞 자유통행’ 공약 제대로 이행 안해

 청와대 개방 공약은 5년전 13대 대선 때도 있었으니, 기록은 비교를 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법이다. 1노3김의 경쟁이 달아오르던 87년 11월 노태우 민정당 후보는 각 일간지에 ‘대통령관저앞을 시민들이 자유롭게 통행하는 나라’라는 제목의 광고를 해서 유권자 마음을 사려 했었다. 그렇지만 집권한 뒤 평민에게 제한적으로나마 도보통행을 허용한 지역은 청와대 서쪽의 효자·궁정동과 동쪽의 삼청·팔판 동 사이의 1km 거리였다. 숨을 쉴 만큼 활짝 튼 것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다. 효자로 1km 거리는 3분의 1쯤 허리를 잘라 통제하여 사람들은 전차종점 자리까지 들어갈 수 없다. 결국 청와대는 6공 초기에 잠깐 열렸을 뿐 다시 삼엄한 통제 속에 들어갔으므로 노대통령은 ‘대통령관저 앞을 시민들이 자유롭게 통행하는 나라’의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셈이다.

 평민 당선자가 93년 이른 봄에 청와대로 들어가서 해야 할 첫 변혁은 청와대 자체의 개조여야 할 터이다. 청와대를 개조하자고해서 지어놓은 건물을 어떻게 하자는 말은 아니다. 청와대가 함축한 경직성과 불관용의 벽을 허물어버리자는 말이다.

 청와대는 권력의 신전이었다. 새로운 시대는 청와대의 낡은 우상부터 허물어버리는 변혁에서 출발할 일이다. 평민정치의 새 시대는 그렇게 열어나가야 마땅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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