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돈 15조 ‘소탕 작전 ’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4.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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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실명 뭉칫돈 양성화 추진설···5· 6 공 자금은 ‘돈세탁방지법’으로 철퇴

 검은 돈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뒤에도 거액의 비실명 자금이 숨어 있다고 판단하는 정부는, 이 자금을 제도권 금융으로 흡수하는 한편 유통 경로를 차지단하기 위해 다각적인 시도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논란이 되는 작업은 정부가 민간인으로 구성한 사조직을 통해 거액의 비실명 자금주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한 뒤 이들의 자금을 양성화해 주는 것이다. 이 작업에 관계한 한 인사는 “이 사조직은 그동안 비실명 자산에 대한 대책을 세워 왔으며, 일부 사채업자들과는 이미 접촉한 것으로 안다 ”고 주장했다.

사채업자, 사조직 접촉 시인
 이와 관련하여 12월8일 열린 구회 재무위원회에서 박재윤 재무부장관은 이 극비 작업의 존재를 추궁하는 민주당 김원길 의원의 질의에 대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만 대답했다. 〈시사저널〉 취재반은 언론에 드러나기를 꺼리는 사채업자들의 속성 때문에 중개역으로 통해 몇몇 사채업자에게 실체로 그런 제의를 받은 적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 일부 사채업자가 비슷한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고 대답해 왔다.

 앞의 소식통에 따르면, 이들이 비실명 자금주들의 돈을 양성화해 주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우선 비실명 자금주들과 호텔에서 만난다. 자금주들은 주민등록등본 사본과 인감, 차명 혹은 가명 계좌 통장의 경우는 그 사본과 자기앞수표 사본등을 들고 나간다. 호텔 등지에서 이 팀과 자금주들은 이를 근거로 자금 중 일부를 양성화하기로 계약한다. 양성화 비율은 경우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대개 원금의 70%수준이라고 한다.

 실명제 아래에서도 거액이 현금과 자기앞수표, 차명 계좌와 각종 국· 공채 형태로 숨어 제도권 금융으로 흡수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금융계의 정설에 속한다. 이 비실명 자금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실질적 주인이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전문가들은 그 규모를 15조원 정도로 추산한다. 총통화의 8분의 1에 가까운 수준이다.

 비실명 자금주와 개별 접촉하는 양성화 작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작업을 진행하는 조직이 어떤 법적 권한을 갖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들은 민간인 신분으로 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채업자와 같은 비실명 자금주들이 이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을 경우, 이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12월9일 재무위에서 김원길 의원은 이 조직의 면면을 공개했는데, 유창윤씨(60)를 그 대표로 지목했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시사저널〉은 여러 차례 그와 접촉하려고 시도했으나, 소재가 불명확해 불발로 그쳤다.

 유씨는 지난 10월18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사금융 척결을 위한 비공식 대책회의에 참석할 정도로 이 작업을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참석자들은 김 덕 국가안전기획부장, 최형우 내무부장관, 황길수 법제처장, 김도언 검찰총장 등이다. 앞의 소식통은 “이 작업의 경과는 유관 부처 장관에게도 보도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비실명 자금 양성화 작업과 금융실명제 실시를 위한 대통령 긴급 명령과의 법적 관계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분야 전문가인 국책연구소의 한 연구위원은 “(이 작업은) 기존 비실명 자금을 실명화하려는 고유지책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명 전환 기간 이후의 실명전환 자금에 대해 과징금 징수와 이자 소득에 대한 중과세를 규정한 긴급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현행 긴급 명령에서는 실명 전환을 하지 않은  비실명  금융 자산에 대해 시행일로부터 계산하여 1년 단위로 매년 10%씩 최고 60%까지 과징금을 징수하고, 이자· 배당 소득에 대해서는 96.75%의 세금을 부과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30% 정도만 공제하고 나머지 금액을 양성화해 주는 것은 긴급 명령을 위반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반면 지난 10월20일 재무부가 한국금융연구원에 연구· 의뢰한 ‘사금융 양성화를 위한 방안’은 정부의 공식적인 대응을 위한 연구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이에 따라 ‘사금융연구팀 ’을 발족했으며, 12월 말까지 연구 결과를 재무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이 연구는 사채업자들의 (고리)대금업을 양성화해 준다는 취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이런 공식· 비공식 작업은 실명제를 마무리 짓는다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실명제가 성공적이었다는 정부의 공식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가 뚜렷한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 형편이다.  실명제 실시 1주년을 계기로 재무부가 의뢰해 진행한 설문조사보고서 〈금융관행 정상화의 실태 분석〉(비공개)을 보면 이 점은 더욱 명확해진다. 저축자, 금융기관 종사자, 사업자 들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사채시장은 실명제 직후 위축됐다가 상당한 수준으로 회복됐으며, 응답자 가운데 일부는 앞으로 시행될 종합과세를 피할 목적으로 사채가 더욱 성행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렇다면 지난해 실시된 실명제는‘금융기관을 통한 금융 거래에서 행위자의 실제 명의가 사용되도록 하는 법적 조처’정도의 의미로 평가절하 될 수도 있다.

비실명 자금 여기저기 ‘기웃’
 실명제를 실시하고 난 뒤인 지난 해 9월 발표된 후속 조처 가운데는 거액의 비실명 자금을 구제하는 방안이 들어 있었다. 장기산업채권 발행이 그것이다. 실명제 실시 이후에도 신분 노출을 꺼려 비실명으로 남아 있는 자금이나, 실명 전환 후 퇴장된 자금을 산업자금으로 유도하기 위해 증여세를 부담한 것과 같은 수준의 장기산업채권을 발행해 자금 출처 조사를 면제해 주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10월 한 달간을 기한으로 한 채권 청약 기간에 신청을 한 것을 총 3백 32건 1천 1백 42억원에 불과했다.

 거액의 비실명 자금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황은 여기저기서 확인되다. 이런 자금은 지난달 한국통신주 입찰과 중소기업은행 주식 청약 당시 위력을 과시한 적이 있다. 더욱이 실명제 실시 후부터 일부 기업에 집중돼 온 ‘거액 대출 제의’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단계 중간 알선책들을 통해 기업에 유리한 조건으로 거액을 빌려주겠다는 제의가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제의를 사기극이라고 결론지었지만, 일부 기업들이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는 관련 문서들이 몇몇 언론에 공개되고 있어 정부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려운 실정이다. 사조직을 통한 실명화 작업이 사실이라면, 이에 응하기 어려운 거액의 자금주들이 자기들의 돈을 기업에 묻어두려는 목적에서 이런 제의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거액의 비실명 자금을 개별적으로 양성화해 주는 움직임에는 정치적 동기가 있다는 관측도 있다. 앞의 소식통은 “구정치권 세력의 자금은 최악의 경우에도 양성화 작업에 응할 수 없는 돈이다”라고 말했다. 거액의 비실명 자금을 양성화한다는 것은 자금 규모와 출처를 만천하에 드러낸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사조직으로 통한 비공식적인 양성화 작업과 대금업 허용을 통한 공식적인 작업에도 응하지 않는 자금은 그야말로 뒤가 구린 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돈세탁방지법 제정  대통령 결단만 남아
 그동안 실명제 아래서 숨어버린 이런 돈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처방이 나와야 한다는 시각이 있었고, 이런 점에서 화폐교환설이 꾸준히 흘러나왔다. 구화폐를 신권으로 바꾸면 숨은 돈이 일시에 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화폐 교환은 한꺼번에 몸의 피를 빼고 새로운 피를 갈아 넣는 것과 같은 충격적 저처여서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화폐 교환처럼 검은 돈을 일거에 금고 밖으로 끌어낼 수는 없지만, 이 돈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 바로 돈세탁방지법이다. 개별적인 양성화와 대금업법 도입을 통한 제도적 양성화에도 응하지 않는 자금에 대해서 유통 경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방법이다. 결국 돈의 본질은 유동성을 약화시킴으로써 그 값어치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개별적인 양성화 작업이 숨통을 마지막으로 터주는 것이라면, 돈세탁방지법은 비실명 자금의 숨통을 죄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역대 정권 역시 검은 돈 척결과 동시에 양성화를 추진했다.  11쪽 딸린 기사 참조). 이미 민주당은 ‘부정자금 유통 거래 방지법’(일명 돈세탁방지법)을 추진해 왔다. 이 안에 따르면, 실명제 실시를 위한 대통령 긴급 명령을 해제하고 이 법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부는 아직까지 돈세탁방지법과 관련해 공식 입장을 밝히지는 않고 있으나 돈세탁방지 전문가인 정부의 한 관계자는 “돈세탁방지법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해왔으며, 실시 여부는 대통령의 결단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 조기에 단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부 안은 민주당 안과 달리 대통령의 긴급 명령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 조처로 검토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실명제 실시와 함께 외환과 자본의 자유화가 급진전되고 있다. 돈세탁 방지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는 어차피 필요하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돈세탁방지법을 도입할 경우 과거 정권 때 부정하게 축적한 정치자금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돈세탁방지법을 도입하면 거액의 입출금을 감시할 수 있다. 더욱이 실명제 실시로 차명 계좌라 하더라도 자금 출처는 간단하게 추적할 수 있다. 구제되지 않은 비실명 자금은 앞으로 유통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이 조처가 앞으로 정치 상황에 따라 신당을 창당할 가능성이 있는 5· 6공 세력의 자금을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앞의 정부 관계자는 돈세탁방지법은 정치적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실시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돈세탁’은 원래 마약 거래, 도박, 무기 밀매와 같은 거래로부터 생기는 돈의 내역과 출처를 숨기기 위해 행해지는 수법이다. 이를 위해 통상 불법 자금을 소액의 은행계좌로 쪼개 예치한 뒤 거래를 거듭한다. 따라서 금융실명제는 돈세탁을 방지하기 위한 기초 조건에 불과하다. 금융 실명 거래 관행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일본에서는 실명제를 돈세탁 방지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90년 4월 19일 일본 정부에 설치된 ‘자금세척에 관한 금융활동작업그룹’의 보고서에 따라 일본 정부는 각 금융기관에 금융 거래 때 본인임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도록 권고했다.

 실명제만으로 돈세탁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금융 실명 거래가 관행이 된 미국에서도 은행비밀법(BSA)과 부정자금위장통제법(MLCA)등을 통해 돈세탁을 범죄 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철저히 감시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이에 따르면, 각 금융기관은 일정 금액 이상의 현금 입출에 대해서는 국세청이나 관세청에 통보하고, 이 기관들은 재무부에 통보해야 한다.  재무부 산하에는 각 기관에서 파견된 수사관과 정보분석관들이 종합수사정보망을 구축해 두고 있다. 정부의 한 보고서는 최근 “실명제 실시로 앞으로 가명· 차명에 의한 불법 자금 위장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으나 아직까지 법체계가 정비돼 있지 못하며, 부처 간의 수사 공조체제 또한 미흡한 실정”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보고서는 실명제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돈세탁방지법 도입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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