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 발표 전야 빼닮았다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4.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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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차 허용 막후드라마 / 정치적 결단-비전문 관료 가담-전격 발표 ‘판박이 ’



 삼성그룹의 승용차 시장 진출에 반대해 오던 상공자원부가 입장을 선회하고 있음이 포착된 것은 지난 1일이었다.  상공부 고위 당국자가 한 언론에 이런 입장을 슬쩍 흘리면서부터였다.  그렇잖아도 청와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판단했던 기존 자동차 업계에서는, 상공부내에서 최초로 찬성의 뜻을 내비친 이 고위 관리가 누구인지 파악하려고 동분서주했다.  그 결과 담당 과장 · 국장과 장관 라인, 즉 그동안 삼성의 승용차 시장 진출 문제에 직접 간여해온 인물은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이 최초의 발설자는 정해주 제2차관보였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이 무역의 날 치사에서 언급한 산업정책 방향에 해답이 들어 있다 ”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정부는 국내에서부터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최대한 촉진하겠다 ”고 말한 적이 있다.  정차관보는 “다만 상공부가 지난 4월 삼성그룹의 승용차 시장 진출 움직임을 저지할 때 내세웠던 논리를 어떻게 바꾸느냐가 문제다 ”라고 말해, 사실상 상공자원부 유관 부처 실무자들이 마음을 돌리도록 종용했다.

 그는 비록 직제상으로는 담당국장의 상위직이었으나, 그동안 삼성의 승용차 시장 진출 결정과 관련해서는 소외당해 왔다는 것이 상공부 내의 중론이었다.  문제의 발언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파문을 일으키자, 평소 진입 불가가 지론이던 金喆壽 장관은 朴雲緖 차관에게  “기자들에게 상공부의 기본 원칙을 설명하라 ”고 지시했다.  박차관은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삼성이 상공자원부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한 기술도입신고서를 제출하면 이를 수리하겠다 ”고 밝혔다.  진출 허용을 기정사실화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김장관의 지시가 진출을 허용하겠다는 뜻을 밝히라는 것이었으냐 하는 것이다.  상공부 일각에는 박차관이 평소 소신과 논리를 바탕으로, 지시받은 이상으로 발언했다는 시각도 있다.  더욱이 김장관은 정부 조직 개편에 이어 개각 대상자로 거론되던 실정이었다.

삼성측에 미리 귀띔한 점만 달라
 이처럼 평소 삼성의 승용차 시장 진출 결정에서 배제돼 있던 정해주 차관보와 박운서 차관이 총대를 메게 된 배경은 확실치 않다.  다만 이미 마음을 굳힌 청와대의 의중을 읽고 ‘사후책 ’을 도모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상공부의 분위기다.  10월 들어서면서부터 청와대 분위기는 삼성의 진출을 허용한다는 쪽으로 완전히 가닥을 잡고 있었다.

 청와대 분위기를 다잡은 두 주역은 韓利憲 경제수석비서관과 洪仁吉 총무수석비서관. 두 사람 다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읽는 실세비서관이었던 탓에, 자연히 관료들은 이 두 사람의 말 속에서 대통령의 뜻을 읽으려 들었다.  뜻은 같이 했지만 두 사람의 근거 논리는 각각 달랐다.  한수석이 경제 논리를 대표했다면, 홍수석은 정치 논리를 대변했다.  한수석은 ‘진입 제한 규정을 푸는 것이 당연하며, 이것이 세계화 취지에도 걸맞는다 ’는 입장을 취임한 지 얼마 안돼서부터 밝혀왔다.

 반면 홍수석은 김영삼 정부의 확고부동한 권력 기반인 부산 지역 정서를 그 근거로 꼽았다.  삼성그룹이 공장 입지를 3∼4개 놓고 저울질하던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화한 부산지역 상공인들의 삼성 승용차 공장 유치 로비가 큰 부담이라고 판단했던 그는, 사적인 채널을 통해 부산 지역 정서와 여론을 계속 조사해 왔다.  그는 진작부터 삼성 승용차 공장의 부산 유치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삼성측에 ‘기다려 달라, 연말쯤이면 자연스러운 계기가 마련된다 ’고 밝혀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그룹은 드디어 기술도입신고서를 제출했다. 업계가 D데이로 추측했던 12월5일이었다. 상공부가 이를 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이틀.  1주일 정도 걸릴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는 조처였다.  삼성의 승용차 시장 진출 문제가 공론화한 후 꼭 1주일 만의 일이었다.  상공부 내에서는 정부 최상층부의 정치적 결단-비전문 관료의 가담-전격 발표로 이어지는 과정이 금융 실명제 전야와 꼭 빼닮았다는 지적이 무성하다.  권력층의 뜻을 사전에 이해 당사자에게 알렸다는 점만이 실명제 실시 당시와 크게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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