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서열 ’이 바뀌고 있다
  • 이흥환 차장대우 ()
  • 승인 1994.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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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코리아리서치 전국 대학 학과 평가 /세칭 ‘명문대 ’에 적색 경보···지방대 약진 두드러져



 ‘서울대학교 1위 ’는 불변의 서열인가.  한국에서 서울대 학교를 능가하는 대학은 왜 나오지 않는가.
 이 두 가지 물음은 고름투성이인 한국 대학 교육의 환부에 들이대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이야말로 한국 대학 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처방법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21세기 한국 교육 전략의 토대를 마련하는 지름길이다.

 〈시사저널〉은 국내 최초로 전국 4년제 대학 27개 학과 학과장 8백94명을 대상으로 한 학과 평가 작업을 실시했다.  그 결과 몇 개 학과를 제외한 전학과에서 서울대학교가 선두 자리를 지켰다.

 이 평가 작업의 목적은 대학이나 학과에 등급을 매겨 서열화하는 데 있지 않다.  학과의 질을 평가함으로써 질곡 상태에 빠진 한국 대학 교육 현장에 숨을 불어넣고자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반세기에 걸쳐 ‘죽음에 이르는 병 ’을 앓아 온 한국의 대학을 치유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중위권 다툼 치열
 이번 조사 결과는 괄목할 세 가지 현상을 수치로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서울대학교의 ‘1위 행진 ’에 쐐기를 박는 특정 학과의 약진세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런 현상에 힘입어 앞으로 10년을 고비로 이른바 명문 대학군의 판도가 바뀔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점이다.  셋째는, 부산대 · 경북대 · 충남대 등 지역 대학이 특정 분야에서 높은 평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서울 지역에서 세칭 명문 사학이라 일컬어지는 고려대학교의 경우 각 학과가 고르게 상위권 자리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질문에 응답한 해당 학과 교수들은 고려대학교의 일부 학과가 앞으로는 상위권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함으로써 경고 신호를 보냈다.  국어국문학과 · 영어영문학과 · 전자계산학과 등이 그런 평가를 받았으며, 경제학과는 현재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긴 했으나 상위권 탈락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서 최다 빈도로 지적돼 탈락 가능성에서도 최우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70∼75쪽 도표 참조)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는 서울대 국문학과와 함께 최고점을 받았지만 탈락 가능성에서는 고려대와 더불어 역시 1위로 평가됐고, 인문 계열에서 사학과가 낮은 평점을 받았다.

 부산대학교 중문학과는 이번 조사에서 중위권에 머물렀으나 잠재 가능성 측면에서 가장 뛰어난 학과로 평가됐으며, 법학과 · 행정학과 · 기계공학과 역시 발전 가능서 측면에서 높은 평판을 받는 학과로 나타났다.  이밖에도 지역 대학 중에서 경북대 생물학과와 공학 계열 학과가, 충남대 화학 · 생물학과 등 이학 계열 학과가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학과로 지목되었다.

 서울 지역에서 이른바 중위권 대학으로 알려진 한양대 · 홍익대 · 중앙대는 경영학과의 자리다툼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한양대는 물리학과와 의학 계열 학과가 앞으로 5년 내에 상위권으로 진출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학과로 집계되었다.  또 포항공과대학 · 한국종합예술학교 · 경원대학교 등 최근 들어 등장한 특화 대학들의 잠재력이 기존 대학 구조의 기본 틀을 바꾸는 지렛대 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이번 조사 결과 나타난 주목되는 현상이다.

 상위권 명문 사학의 하향세를 예고하는 목소리와 중위권 사학의 상승세를 전망하는 시각이 서로 맞물려 나타났다는 것은 대학, 특히 사립대학의 생존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우수한 교수진과 학생, 훌륭한 교육 시설 등 특정 학과의 ‘자질 ’이 상승세의 최대 원동력으로 작용하겠지만, 격변하는 시대 상황도 교육 현장의 판도 변화를 한껏 자극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학 교육은 주도권을 틀어잡은 교육부와 대학이 정원 · 교과목 · 학과 종류와 수 등 모든 교육 상품을 공급자 위주로 좌지우지해 왔다.  그러나 불과    5∼6년 후면 현재의 대학 정원보다 지원자 수가 줄어드는 상황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며, 국내 교육 시장 개방은 어떤 방법으로든 기득권 해체와 시장구도 재편이라는 대학 교육의 일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서울대는 언제까지 1등인가
 한 사학의 ㄱ교수는 “서울대학교(학과)를 능가하는 대학(학과)이 나올 수 있는가 ”라고 자문한 다음 “현재의 교육 풍토와 구도로는 불가능하다 ”고 자답했다.  왜?  한국은 인생마저도 성적 순으로 결정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왜 특정 한 학교가 모든 학과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현상이 없어지지 않는가.  법학과는 OO대학이, 경영학과는 OO대학이 월등하다는 극히 상식적인 구조가 왜 한국에서는 자리 잡지 못하는 것일까.  ㄱ교수는 “교수 · 학생의 질이나 학교 시설 등 교육 여건보다 교육 밖의 조건인 ‘사회 통념 ’이 더 중요한 변수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지적한다.  ‘한국의 학문 수준〓서울대학교 수준 ’이라는 도식이 깨지지 않는 한 경쟁을 통한 학문 수준 상승이나 변화를 위한 자극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학과 평가 작업은 이미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주관으로 91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세 번째로 전국 대학의 생물학 계열학과(56개교 65개 학과)와 화학공학 계열 학과(34개교 36개 학과)를 대상으로 서면 평가 및 현지 방문 평가가 실시되었다.  대교협이 주관하는 현재의 학과 평가 기준은 교육 목표, 교육 과정, 학생, 교수, 시설 및 설비, 행정 및 재정 등 여섯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항목에 50∼60개의 소항목 지표가 동원되고 있다.

 그러나 평가 척도가 아무리 세밀하고 정교하다 해도 학과의 역사나 성격, 분위기, 면학열 등 무형의 것을 수치로 옮기기란 결코 쉽지 않다.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평가 작업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학과장을 대상으로 한 학과 평판도 조사는,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주관적인 평가 방법을 택했다는 점에서, 평가 기준의 타당성이나 과정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힘들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교육 현장을 지켜 온 전임 강사 이상 교수들이 해당 학과에 대한 충분한 정보에 근거하여 나름대로 분석들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 평판 조사 작업의 기초 자료가 앞으로 본격적으로 실시될 학과 평가 작업에서 ‘평판 ’ 항목의 주된 기준치를 제공할 것이라는 점도 이번조사의 성과로 기록될 만하다.

다가오는 ‘학생 소비자 시대 ’
 이번 평가 작업의 기본 취지는 자극이다.  자극은 경쟁을 유도하며, 경쟁은 우수한 질을 이끌어내는 최대 원동력이다.  경쟁 무풍지대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대학에 이제는 자극과 경재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평가 결과 높은 점수를 받은 학과라고 해서 자만하거나, 그 반대라고 해서 자포자기할 이유도 시간적 여유도 없다.  어떤 평가를 받은 학과든 교실 창문 밖에는 생존경쟁이라는 냉혹한 현실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바람은 숨거나 외면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번 학과 평가 작업에서도 냉혹한 경쟁 현실을 입증하는 여러 사례가 발견되었다.

 대학은 학생이라는 교육 소비자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고등 교육에서의 학생 소비자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선진 외국에서 예고되었다.  대학은 학생이라는 고객의 욕구를 존중해야 하며, 고객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국가 고사든 대학의 본고사든 성적만으로 학생을 서열화하고 계급화하는 방식만 고집하는 한 대학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폐쇄성과 집단이기주의, 행정편의주의와 획일성의 병폐가 지적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학의 바퀴는 굴러왔다.  그러나 학생 소비자 시대에도 그 바퀴가 굴러갈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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