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에 몰리는 늙은 학생의 젊은 발길
  • 허광준 기자 ()
  • 승인 1995.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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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대학 한의대 합격생에 인생 행로 바꾼 사회인 수두룩/석· 박사도 상당수… ‘동양사상에 끌려서’ 등 동기 다양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와 학생들은 해마다 신입생을 맞는 이맘때면 어떤 학생들이 한의예과에 새로 입학했는지 눈여겨 본다. 교수나 선배가 새내기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한의학 가족들의 관심은 좀 특이하다. 해마다 합격자를 뽑고 나면 그중에는 반드시 남다른 경력을 가진 사람이 끼여 있기 마련이어서, 올해는 또 어떤 학생이 화제가 될까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나이가 많은 만학도라는 정도로는 이 학과에서 특이한 사례로 꼽히지 않는다. 올해 이 학과를 지원한 수험생 중에서 69년 이전 출생자(26세 이상)는 1백9명으로 전체 지원자의 22%에 달했다. 다른 대학을 졸업했거나 다니다가 새로 시험을 쳐서 들어온 사람도 드물지 않다. 이번 입시에서도 전체 지원자의 15% 정도가 이른바 명문 대학교를 졸업했거나 중퇴한 사람이다.

 

공학박사 김재현씨 ‘동· 서 학문 결합’ 새 꿈

올해 신입생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이는 공학박사 출신인 김재현씨(35)이다. 김씨는 80년 서울대 자원공학과에 입학한 뒤 같은 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쳐 94년 2월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대륙붕의 천연가스 생산성 조사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학위를 받은 후 김씨는 대한석유개발공사에 입사했으나, 직장 생활은 석달을 넘기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계획해 왔던 한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8개월 동안 혼자서 꾸준히 대입을 준비했으며, 이번 입시에서 수능고사 성적 1백81.1점을 얻어 경희대 한의예과 특차 전형에 합격했다.

김씨를 한의학으로 이끈 것은 동양의 정신 세계에 대해 그가 오래 전부터 가져왔던 커다란 관심이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공학과는 거리가 먼 노장사상 등 동양적 세계관에 흥미를 가져 왔다. 이것은 서양의 자연과학적 문명이 인간의 생활을 실제로 풍요하게 했는가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김씨는 단전호흡 수련원을 다니면서 자연과학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체 경험을 많이 하게 됐고, 이러한 생명 현상을 한의학을 통해 연구해보고 싶다는 의지를 품게 된 것이다. 그동안에 김씨는 <명심보감> 같은 기초 한서도 공부했고, <주역>에 접근해 보기도 했다.

김씨가 진로를 바꾸어 한의대에 입학하게 된 데에는 숙명여대 약대를 나와 3년째 약국을 개업하고 있는 부인 최윤정씨의 영향도 컸다. 부인은 김씨의 조언자가 되기도 했고, 몸의 병리적 현상을 놓고 의견을 나누는 토론자가 되기도 했다. 김씨는 자기가 14년 가까이 공학을 전공하면서 몸에 밴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한의학을 공부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직관과 통찰력을 중요시하는 동양적 접근법과 합쳐져 생명과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결과를 얻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워낙 나이든 새내기가 많다 보니 올해 특차로 같은 학과에 입학한 강신옥씨(27)는 그다지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 86년에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는 92년 여름 대학을 졸업하고 1년동안 신용카드 회사에 다니다 올해 한의대에 입학했다. 실은 대학 3학년 때부터 한의학을 공부하려고 생각했었으나, 일단 다니던 대학은 졸업하라는 주변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강씨는 기회만 있으면 한의대 입학을 노렸다. 대학 입시 제도가 크게 달라져 수능고사가 처음 생긴 작년 입시 때는 시험 문제를 구해 풀어보고 할 만하다고 안심하기도 했다. 1년 남짓했던 따분한 회사 생활은 그를 한의대로 줄달음치게 하는 촉매가 됐다. 직장을 미련없이 그만둔 뒤 대입 수험서를 싸들고 고시원에 들어가 시험을 준비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철학이나 사학에 관심이 많던 강씨는 한의대 입시를 위해 인문계열에서 자연계열로 바꾸어 시험을 치렀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로 고등학생 과외 수업을 해온 그는, 작년에는 자기처럼 대입 시험을 봐야 할 처지인 고3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모의고사 성적이 나오는 날이면 스승과 제자가 똑같이 성적표를 놓고 울고웃곤 했다고 한다. 강씨의 수능고사 성적은 1백79점. 이 성적이라면 일반 의과대학도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실력이지만, 강씨의 지망은 여전히 한의대였다. 입시 면접에서 왜 한의대를 지원했느냐고 묻는 교수의 말에 강씨의 대답은 “오고 싶어서 왔다”였다. 그밖에 다른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서울대 계산통계학과를 나온 이태권씨(31)도 대학 졸업 뒤 직장생활을 하다 한의대에 입학했다. 이씨는 88년 대학을 졸업하고 증권회사 전산실에서 4년, 한국통신 계열 회사에서 대리로 1년 가까이 근무했다. 93년 말 회사를 그만둔 그의 관심은 처음에는 전공인 계산통계학을 더 공부하기 위한 해외 유학이었다. 94년 여름까지 유학 준비를 하던 그는 8월에 한의대에 지원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그가 마음을 바꾼 데에는 부친의 강력한 권고가 크게 작용했다. 이씨의 부친은 독학으로 한의학을 공부한 ‘아마추어 한의사’이다. 물론 진료는 하지 않지만, 그가 보기에 한의학에 대한 부친의 애정과 지식은 일반 한의사 못지 않다. 이씨가 대학에 들어갈 때인 83년에도 부친은 한의대를 적극 추천했으나 아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이제 12년이 지난 후 부친의 희망은 직장 생활에 대한 이씨의 회의와 만나 한의대 입학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이들말고도 많은 지원자가 입시 관계자의 관심을 모았다. 올해 지원자 중에서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 한 여성도 있었다. 응시한 사람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이는 개인 사업을 하는 46세 남자이다. 이 사람은 몇년째 이 학교에 응시했는데, 올해 또 떨어져도 다시 도전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합격자 중에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포항공대를 졸업한 사람도 있고, 한국과학기술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사람도 있다. 경력도 일반 회사원에서부터 일용직 사원, 신문 배달을 하다 입학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적성 안맞아’ ‘직업 전망 좋아’ 인생 되돌이

이같은 현상은 다른 대학교 한의대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부산 동의대 한의예과는 합격생 50명 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 이상이 된 만학도가 32%를 차지했다. 동국대 한의대에도 올해 입학한 정원 80명 중에서 절반 정도가 다른 대학을 졸업했거나 대학에 재학중인 ‘되돌이 신입생’이다. 한의대의 입시 경쟁률이나 합격 점수도 계속 높아지고 있다. 한의대를 개설한 학교에서는 대체로 한의대의 입학 성적이 가장 높다. 올해 경희대 한의예과에는 수능고사 성적 1백92.5점으로 전국 석차 5위인 창원 중앙고교 출신 강종필군(18)이 수석을 차지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왜 많은 사람이 삶의 길을 도중에 바꾸면서까지 한의대에 몰리는 것일까. 홍무창 교수(경희대· 한의대)는 이같은 현상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현재의 입시 경쟁 구조에서 성적에 따라 일단 대학에 진학했던 학생들이, 전공을 공부하면서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고 대학을 바꾸거나 다시 입학하는 경우. 둘째, 한의사 직종에 대한 직업적 전망과 발전 가능성을 보고 매력을 느껴 지원하는 경우. 셋째, 동양철학 같은 동양사상에 대한 학문적 관심 때문에 한의학에 뜻을 품는 경우이다. 어떤 동기에서든 이같은 ‘늙은 대학생’들은 다양한 사회 생활을 한번씩 거치면서 자기가 나아가야 할 길을 새로 선택했기 때문에, 학업에 대한 열망이 매우 강하고 수업도 열심이라고 홍교수는 말했다.

서구식 합리주의에 의한 교육과 직장 생활을 거친 청장년 엘리트들이 동양의학을 향해 생애를 전환하는 이같은 현상은 젊은 세대의 ‘우리것 되찾기’ 움직임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 許匡畯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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