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벌 싸움에 대학 개혁 무색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5.02.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수 공채에 인맥· 학맥 갈등 여전… 서울대에선 법정 싸움 치달아

최근 마무리된 각 대학의 95학년도 신임교수 공채 결과는 대학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유능한 교수 확보라는 목표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명문 서울대에서부터 시골 한구석에 자리잡은 낯선 지방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 대학이 적법한 절차나 정당한 실력보다 인맥· 학연· 지연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낡은 관행에 발목을 붙잡히는 볼썽 사나운 모습을 또다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최근 신임 교수를 뽑는 과정에서 교수들간 인맥 다툼이 소송 제기로 이어진 서울대 언어학과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문제의 학과가 동료 교수들간 법정 분쟁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휘말린 때는 지난해 12월27일. 원인은 지난해 11월17일 신임교수로 정식 발령이 난 권○○교수 임용을 둘러싼 절차상 하자였다. 이 학과 이정민 교수는 “일부 교수들이 권씨 임용 과정에서 전체 교수회의의 합의를 거치지 않고 상급 인사위원회에 추천해 교수가 되게 한 위법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최종 임명권자인 교육부를 상대로 교수임용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서울 고등법원에 제기했다.

권교수는 이 일이 있기 전에도 89년 이래 세번이나 임용 시비의 표적이 됐다. 이번에 권씨가 교수로 발령받은 것은 ‘3전4기’로 성취한 꿈인 셈이다. 하지만 권교수가 가까스로 얻은 교수직을 다시 반납해야 할지도 모를 시련을 맞게 된 배경에는 다른 이유도 숨어 있다. 바로 권교수가 이 학과 안에 형성된 특정 인맥 사람이어서 학과 내 일부 교수들로부터 특별한 후원과 배려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다는 시비에 휘말린 것이다.

이 학과 교수 7명은, 90년 봄 정년 퇴임한 국내 언어학계의 원로 김○○ 교수의 학문적 영향력 안에 속하는 파와 그에 반대하는 파로 양분된 상태다. 권교수는 김교수가 정년 퇴임하기 직전 박사 학위 논문을 지도한 제자로, 말하자면 김교수의 영향권 안에 있는 마지막 인물이라는 것이다. 정년 퇴임한 김교수의 후임에 권씨를 앉히려는 김교수파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던 반대파는 김교수파가 ‘재직 교수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내규까지 무시하고 권씨를 무리하게 교수로 앉히려 하자 마침내 절차의 위법성을 걸어 법정 싸움으로 내달은 것이다.

 

연세대는 86명을 채용 유보

모집 정원 2백1명에 7백21명이 지원한 연세대의 95학년도 1학기 교수 초빙 작업도, 교수들 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얼룩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예 적임자를 뽑지 않거나 교수 채용을 유보하는 사태가 대량으로 발생한 것이다. 연세대가 지는 1월 중순 최종 확정한 신규 채용 교수 수는 애초 계획에 훨씬 못미치는 1백 18명이다. 반면 채용이 유보된 사람은 86명에 이른다. 이같은 결과에 대한 연세대 관계자들의 공식 설명은 “경쟁률은 비교적 높았지만 마땅한 지원자가 생각 밖으로 적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연세대 교수 공채 사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알고 있는 한 박사 학위 소지자는 “대학측 설명이 사실인 부분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학과내 교수들간 싸움 때문에 실제로 유자격자가 있었는데도 사람을 뽑지 못한 경우가 상당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더러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한다.

연세대 문과대학 한 학과의 교수 공채는 ‘반대 경우’의 표본 사례다. 교수들간 싸움 덕분에 비교적 순위가 낮았던 사람이 교수가 되는 어부지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 학과는 특정 전공분야에 1명을 공모했었는데, 유력한 지원자에 대해 의견이 합치되지 않자 전공이 중복되는 지원자 2명을 함께 뽑기로 타협했다. 이같은 내용을 귀띔해준 한 교수 지원자는 “이런 일이 연세대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라고 덧붙인다.

최근 주간 <교수신문>(발행인 이영수 경기대 교수)이 발표한 한 설문조사 결과는 이같은 파행이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교수신문>은 지난해 12월 전국 4년제 대학에 재직하는 교수 2백30명을 대상으로 현행 교수 임용 방식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한 설문지를 돌렸다. 조사에 응한 교수들 가운데 국· 공립대 교수의 43%, 사립대 교수의 33.6%가 교수간 인맥· 파벌 대립이 가장 큰 문제라고 대답했다(30쪽 도표 참조).

이같은 조사 결과는 최근 변화하고 있는 각 대학의 교수 임용 추세와도 관련이 있다. 즉 과거에 총장이나 재단에 집중해 있던 신임 교수에 대한 자격 심사 권한이 해당 학과에 많이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학과 교수회 권한이 커진 까닭은 총장· 재단 중심의 인사가 교수직 매매· 낙하산 인사 등 교수 채용 비리의 원인이 되어 왔다는 지적이 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도권 대학을 중심으로 앞다투어 도입하고 있는 학과 중심의 교수 임용 방식은 교수들간 인맥· 파벌 싸움이라는 또 다른 잘못을 낳고 있다.

현직 교수가 특정 인물을 교수로 앉히기 위해 자기 제자 혹은 후배 교수의 전공에 맞춰 공고를 내거나, 일단 원서를 낸 지원자를 만나 자기 편에 줄서기를 강요하는 폐단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국내에서 중문학으로 석·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중국 유학을 마치고 최근 돌아온 ㅇ씨도 이같은 폐단을 직접 경험했던 당사자 가운데 한사람이다. ㅇ씨는 “얼마전 중부권의 한 대학에서 교수 제의가 들어와 지원서를 냈다. 교수 자리를 제의한 사람을 만나 보니 ‘일단 들어오게 되면 우리 편에 서서 발언해 달라’며 노골적으로 줄서기를 요구했다”라고 말한다. 이씨가 이같은 요구를 거절하자 얼마 뒤 학과측은 이씨에게 ‘해당 분야에 당장 인원을 충원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교수 사회가 먼저 개혁돼야

이처럼 파행으로 치닫는 교수 공채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쪽은 내막을 모르고 원서를 냈다가 낭패를 보는 순진한 지원자들이다. 이미 특정 인물이 교수로 내정된 사실을 모르고 교수 초빙에 응모해 번번히 들러리 노릇만 하다가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기 일쑤인 것이다. 특히 사람을 뽑을 생각이 없는데도 채용 공고를 내는 이른바 ‘가라(가짜) 모집 공고’에 응모했다가 탈락하는 지원자의 심경은 참담하다. 최근 수도권 ㅅ대학에서 ‘가라’로 낸 교수초빙 공고에 응모했다가 허탕을 친 권○○ 박사(한국철학전공)는 “지원한 대학이 어떤 대학이든 일단 원서를 내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애를 태우기 마련이다. 그런데 기다리는 동안 뜻밖의 정보를 듣게 됐다. 애초부터 내가 지원한 분야는 교수를 뽑지 않기로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결과도 그 정보대로 나왔다. 당시의 허탈감이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산하 고등교육연구소 이현청 소장은 “각 대학이 교수 임용 때의 심사 기준· 절차를 명문화함으로써 절차상의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쉬운 점은, 절차가 합리화되어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여전하다는 점이다”라고 말한다. 이제 교수가 자기 자신을 개혁해야 할 차례이다.

- 朴晟濬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