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3일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린 ‘해방 50년과 패전 50년-화해와 미래를 위하여’ 심포지엄(크리스챤
아카데미· 이와나미서점 공동 주최)은 한· 일 양국이 청산해야 할 문제와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협력 문제를 집중 논의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두
나라 지식인들이 모여 ‘과거 청산의 의지를 보이지 않은 일본’을 비판하고, ‘한국도 반성하고 청산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지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사카모토 요시카즈(坂本義和) 교수(동경대 명예교수· 국제정치학)의 발표문 <냉전 후의 과제는 무엇인가-아시아를
중심으로>는 논의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한· 일간의 화해가 동아시아라는 토대 위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전제하고, 냉전 이후 구조적
변동기를 맞고 있는 세계 질서 속에서 새롭게 대두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방안은 ‘국경을 넘은 시민의 대등한 협력이나 시민 사회의 연대’라고
주장했다.
“국제화와 평등화가 갈등하는 시대”
사카모토 교수는 동서 냉전이 끝남에 따라 지구적 규모의 네 가지 변화가 진행되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미국을 정점으로 한 세계 군사질서가 성립되었고, 세계가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자본주의 경제에 편입되었으며, 그 다음으로 소련권의 붕괴와
더불어 민족주의가 보편화 하였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가 지구화하였다. “앞의 두 개는 국제화 추세를 나타내는 것인데, 그것은 국경을 넘어 주권
국가를 점차로 공동화하는 과정이다. 뒤의 두개는 평등화 추세를 나타낸 것으로 그것은 민족과 인간이 평등한 권리를 지향하는 변동 과정을
나타낸다.”
국제화· 평등화를 새로운 시대의 특징으로 보고 있는 사카모토 교수는 “지금 두 개 사이의 모순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가의 틀을 넘어 국제화를 추진하는 것은 행동이나 유동성의 범위를 국경 너머까지 확대함으로써 이익을 획득할 수 있는, 자본· 기술· 정보를 가진 세력이다. 도 국제화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다국적 대기업이다. 국제화는 강자에게 이익을 가져오고 약자와의 격차를 확대한다. 다시 말해 국제화는 불평등을 확대하고, 평등화 요구와의 모순을 심화하는 경향을 갖는 것이다.”
그가 봉기에, 이와 같은 경향은 오늘날 세계질서의 구조를 살피면 명백해진다. 국제화한 선진국은 상호 의존 관계를 강화해 서로 간에 결정적인 이익 대립이 일어나지 않도록 수평적으로 조정하고 협력할 조직을 만들고 있는 반면 소말리아, 르완다, 옛 소련의 여러 공화국, 보스니아 같은 세계 질서의 하층부는 분쟁· 분열· 무질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요컨대 세계 질서라는 피라미드의 상층을 이루는 중심부에서는 질서가 유지되고, 하층의 주변부에서는 무질서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사카모토 교수는 이 피라미드의 상층을 조직적으로 강렬하게 지향하면서 나름대로 실적을 올려온 것이 신흥공업경제체제(NIES), 특히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경제체제라고 말한다. 그는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경제체제 문제는 백년 전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구미의 인권 의식과 시민 사회의 원리를 경시한 채 진행된 일본의 물질적· 경제적 성장 지향은 ‘신흥공업경제체제형 일본’의 뿌리 깊은 체질이 되어 ‘얼굴 없는 일본인’을 대량으로 만들어냈다고 본다. 그는 “그러나 신흥공업경제체제의 문제점은 불행하게도 일본만의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 신흥공업경제체제는 일본처럼 침략 전쟁은 하지 않았지만 고도 경제성장을 국가 목표로 치열하게 추구해왔다. 이 과정에서 인권이나 시민 사회의 원리를 뒷전으로 돌리는 경향을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즉 아시아 신흥공업경제체제의 행동 양식은, 대외적으로는 자기 나라보다 하위에 속하는 주변국과 민족을 이용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며, 대내적으로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민중과 약자를 지배하든가 무시하는 것이다. 사카모토 교수는 “현대의 지구적 변동 속에서 말하자면 국제화를 담당하는 유력한 추진역 기능을 하고 있지만 신흥공업경제체제는 지구 규모의 평등화· 민주화와의 모순이 한층 심해지게 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카모토 교수는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이 세계 민주화의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자기 변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수직적 질서밖에 모르던 동아시아 신흥공업경제체제가 평등의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지역 지배 엘리트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을 기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사카모토 교수는 “지금은 시장과 시민 사회가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급속하게 높여가고 있고, 탈국가화한 시장은 국내적· 국제적으로 불평등과 불공정을 만들어내고 있다. 따라서 한· 일의 국경을 넘어서서 민중의 대등하나 협력이나 평등한 공생 관계를 강화해 초국가적으로 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는 주체는 양쪽 시민 사회 이외에는 없다”고 규정했다.
“현대와 21세기에는 국경을 넘은 시민의 대등한 협력이나 연대에 입각한 초국가적 시민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 각 국가의 민주화를 달성하는 길이다.” 사카모토 교수는 시민이 국가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시민 사회에 뿌리내려 성립한다는 현대 세계의 구조적 변동의 중요한 사례로, ‘종군 위안부’와 일본 침략의 희생자에 대한 보상 책임 문제를 들고 있다. 그 책임을 추궁하는 방식 자체가 매우 중요한 ‘현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 개인이 일본이라는 국가에게 보상 책임을 추궁하고 있는 데는, 국가가 자국의 시민뿐 아니라 외국 시민의 인권에도 ‘직접’ 책임을 진다는 사상이 들어 있다. 그것은 국경을 넘은 시민 사회의 존재를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으며, 일본이나 독일이 과거의 파시즘 국가에서 민주 국가로 변했다는 증거로 초국가적인 시민 사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상이다. 다시 말해 개별 국가의 민주주의적 책임을 묻는다는 이 보상 문제에는, 이미 개별 국가의 시민 사회뿐 아니라 국경을 넘은 시민 사회라는 새로운 구조의 세계 질서를 향한 변동이 표출되어 있다”고 사카모토 교수는 말했다.
“남북통일도 시민 사회 연대에서 출발해야”
사카모토 교수는 한반도 통일과 관련해서도 시민 사회의 연대를 강조한다. 남북한 통일이 주로 시장 논리의 침투· 공유에 기초하여 진행된다면 독일과 동유럽에서 일어났던 격차와 차별이 생길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분단선을 넘어선 시민 사회를 형성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고, 그 일환으로 분단을 넘어선 시장을 형성해 간다는 사상이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각각의 국가가 다민족 시민이 공생하는 시민 사회에 기초를 두는 것이 다수의 다민족 국가가 공생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유럽연합(EU)에서 시작했고, 이 변동은 세계 국가 체제의 장기적인 장래를 구상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맺었다.
사카모토 교수의 주장에 대해 백낙청 교수(서울대· 영문학)는 “시민 사회는 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기존 국가를 어떻게 변형하겠다는 생각 없이는 초국가적 시민 사회란 막연한 것이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경우 기존 국가의 어떤 면을 강화하고 약화할지를 구체적으로 따져 봐야 한다. 관념적으로 형성하는 시민 사회란 오히려 초국적 자본의 힘에 의해 맥을 못추는 약한 사회가 될 우려가 있다”라고 말했다. 강만길 교수(고려대· 한국사)는 “초국적· 초민족 시민사회론은 과거 역사에서 보면 강대국의 논리에 속한다. 유럽 통합은 과거에 대한 독일의 철저한 반성이 바탕이 되어 있다. 이런 동아시아 구상은 일본이 독일에 못지 않은 강도 높은 반성을 해야만 실현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 成宇濟 기자